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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2 은혜와 평강(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3. 1. 17. 23:28 Writer : 김홍덕

2. 평강은 무엇인가?



사도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형제들에게 문안하면서 사용하는 평강은 에이레네(Eirene)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평화(peace)로 치환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합의”라는 의미에 가까운데, 즉 ‘서로 합의한 상태’ 혹은 ‘서로 동일한 상태’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흔히 사람들은 평강 혹은 평안하다는 것을 ‘아무런 걱정이 없는 삶’을 이야기 하는 듯해도 실제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육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 근심이나 고민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단 한 가지, 죽음에 대한 고민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과 무엇이 하나 된 상태가 평강의 상태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긴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2)

이라고 기도하셨다. 즉, 인생에게 있어 평강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인 그 관계 안에 인생들도 함께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람이 이르러야 할 합의된 평강의 자리인 것이다.


사람의 인생이 평강하지 않는 것은 창조자이신 하나님과 하나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하나 되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의 삶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하나 되지 않았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 성품을 좇아 사는 것(창 1:26)인데 그렇지 못한 삶이 바로 평강이 없는 삶인 것이다. 


이는 사람뿐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과 자신이 하나가 되어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수행하고 있지 않으면 평강이 없는 상태인 것은 동일한 상황인 것이다. 자동차가 이동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상황은 사고가 나려는 상황인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자동차는 평강도 안식도 없고 오히려 사망 가운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도 태어난 이유, 존재하게 된 이유,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한 이유와 목적을 모른다면 이는 평안하지 못한 것이다. 고로 안식을 누릴 수도 없다. 또한 더불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에 관해서는 안식하실 수 없다. 이는 아직 창조조차 완성되지 않은 상황과 같은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신데 사람은 행위와 소유에 관심을 두고 살며, 선하고 악한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선함에도 사람은 눈앞에 펼쳐지는 아주 작은 일에도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가를 평가하며 사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신적인 역량이 나타나는 은혜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의 노력이나 소유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하나가 됨으로 창조의 목적이 달성되어 영광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은혜인 것이다. 


그것은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은혜이다. 사람에게 자신의 존재 목적을 발견하게 하는 것 이상의 은혜를 베푸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하기도 하는데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사람의 삶이 하나가 된 삶이 바로 에이레네, 곧 하나님과 하나 된 평강의 상태인 것이다.


내게 주신 영광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나이다 (요 17:23)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은 사람이 신이 된다거나, 육신을 부인하고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과 같이 그 생명이 같고, 품성이 같아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목적 아래에서 보면 하나님의 목적이 그 안에 이루어지는 것을 말함이고, 의(義)안에서 본다면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시면 저도 선하게 여기고, 하나님께서 악하게 여기시면 또한 악하게 여기는 의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인생이 평안해진다는 것이며, 바울 사도가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형제에게 문안하는 문안 역시 이러한 문안인 것이다.


사람이 육신 안에 있다 보니, 육신의 삶을 살아감에 있어 곤고함도 많고 불편함도 많아 그에 따른 희망사항도 많아서 그런 바람 위에서 신앙을 가지게 되다 보니, 어쩌면 자연스레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고, 또 그것이 평안이라 여기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본질적인 사람의 문제나 곤고함이 아니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곤고함이자 문제는 '왜 사는지?' 그것을 모르는 것이다. 바로 그 문제가 해결된 상태, 즉 사람이 왜 사는지,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알게 되어 그것이 자신의 삶과 하나가 된 상태 그것이 진정한 평안인 것이다.


그리고 그 존재의 이유와 목적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것이고, 무엇보다 그것을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가장 큰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 뜻으로 사도가 되었다는 것은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기에, 그렇게 사도된 바울이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문안했다는 것은 골로새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그들의 삶과 하나가 되는 평강의 상태가 되는 은혜를 기원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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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2 은혜와 평강(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3. 1. 17. 14:07 Writer : 김홍덕

1. 무엇이 하나님의 은혜인가?

사도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문안하기를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1:2)”

라고 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은혜는 Caris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 평강은 Eirene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카리스(Caris)는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카리스마라는 말의 어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단어는 “절대적인 역량이 나타난다. 라는 의미가 짙다. 즉, 신적인 역량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 에이레네(Eirene)라는 말은 단순히 평화(peace)로 치환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합의”라는 의미에 가까운데, 즉 ‘서로 합의한 상태’ 혹은 ‘서로 동일한 상태’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사실 필자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성경에 나오는 단어를 구체적으로 공부한 사람도 아니라 그 단어의 뜻을 풀어내는 것이 전문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뜻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성경이 기록되던 시절의 단어들은 지금과 같이 단 몇 가지의 뜻으로 뜻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문맥의 정황에 따라 여러 의미로 해석되던 시절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대체적인 의미를 기반으로 하여 전후에 어떤 것을 이어가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기초적인 의미를 언급해 보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 신실한 형제들에게 문안함에 있어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고 있다. 은혜라는 것은 ‘값이 주는 선물’이라는 말이기도 하고, 신적인 역량이 나타난다는 말이기도 하다. 바울은 1장 1절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라고 하고 있는데, 은혜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은혜는 신적인 역량이 나타나는 것이기에,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이라는 것이고,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됨과 같이,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형제들에게도 그런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신적인 역량이 나타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사실 신적인 역량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언뜻 기적을 말하곤 한다. 큰 교회의 기독교인들이 바라는 기적은 한마디로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는 것과 육신의 문제에 대한 불가사의한 해결이나 변화를 기적이라 여긴다. 


그러한 관점으로 드리는 예배는 육신의 축복(Have와 Do에 관한 축복)을 기원하는 것에 매몰되기 쉬운데 그런 모습이 큰 교회들의 신앙 정체성과 목적이 되어 가는 것 같은 시대적 상황은 기쁜 일이 아니다. 


기적은 그런 것이 아니다. 골로새서 포스트의 처음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기적은 사람이 바뀌는 것이다. 은혜, 곧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이 사람에게 나타난다는 것은 사람이 이전과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전혀 다른 삶의 모습(보이는 모양을 한정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 진정한 기적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금전적인 문제와 같은 문제들이 뜻하지 않고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방법이나 현상으로 해결되는 것을 기적이 아니라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일으키시는 기적, 곧 은혜의 본질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는 바울 사도 역시 자신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뜻은 세상적인 권세를 얻게 되거나, 영생불멸의 몸이 되었거나 한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 하지 않고,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 곧 신적인 역량이 자신에게 나타난 기적이라고 말하고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가 또한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형제들에게 임하기를 문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과 성경이 말하는 은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사람이 변하는 기적 그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다 사도가 된 것은 단순한 신분과 행위의 변화가 아니라, 생명과 안목이 바뀐 것이다.


알고 보면 바울 사도는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졌을 때에 그리스도인을 핍박했었던 사람이었다. 그때 그는 모든 율법을 행위로 지키려고 한 유대교인이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율법이 정한 규례와 법을 행함으로 지켜내야 한다는 신앙관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그러했던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7장 9-10절에서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라고 율법 안에서의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있다.


그런 사울이 사도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은 행위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의로움은 율법을 행함에 있지 않고 오직 믿음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그 내적 변화가 바로 기적이고, 은혜이며, 하나님의 신적인 역량이 자기에게 나타난 것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 3장 28절에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은혜는 사람의 마음에서 사람이라는 존재가 행함과 소유로 의로워지거나, 세상적 경쟁력이 높아질수록 기뻐하시는 신을 믿는 세계에 살다가, 그런 것에 의가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처럼 어떤 행함이나 조건도 없이 의롭고 인정받는 하나님의 법을 믿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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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은 옥중에서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냄에 있어 <신실한 형제들에게>라고 표현하고 있다. 신실하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어로 믿음을 의미하는 피스티스(πιστις (pi'stis)의 형용사형인 pistos(faithful)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충성스러운' 혹은 '신뢰할 만한'이라는 뜻이다. Pi'stis와 Pistos는 아래 도식에서 보는바와 같이 같은 어원이나 믿음의 방향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수동적인 것이다. 즉, 믿음이라는 것은 "믿습니다!!"하면 혓바닥 갈라지는 소리로 기도하거나 신념을 가진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하여 의지와 열정으로 믿을 것을 강요하지만, 믿음은 어떤 면에서는 <부인할 수 없는 상태>라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절대적으로 수동적인 것이다. 이것을 신앙 안에서는 <순종>이라고 하는 것이다. '믿는다.'가 아니라 '믿어진다.'나 '과연 그러합니다!'라는 고백적인 표현들이 진정한 믿음에 대한 표현인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나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피조물이 가지는 어떤 의지가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정말 그 창조자를 경외한다면 있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작금의 큰 교회들은 믿음을 강요한다. 그것은 그렇게 강요하지 않으면 믿을만한 것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등을 떠밀고 교회에 나오지 말라고 해도 나올 수밖에 없을 정도로 믿어지는 그런 것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보자. 아들은 결코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된 과정을 본 적이 없다. 그냥 믿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믿으려 애쓰지도 않는다. 그것이 바로 절대적인 수동이고 순종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그려지는 것이다. 그렇듯 믿는 믿음이 바로 믿음이지, 소나무 붙잡고 뽑을 기세로 "주여! 믿~습니다!!" 외친다고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믿음이라면, '뱃속의 아기가 아들인 줄 믿습니다.' 했다가 설사 딸이 나오더라도 그 아기가 아들로 바뀐다고 믿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 진실로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것이며 그 믿음 안에서, 바울이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을 <신실한(Pistos) 형제>라 한 것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을 대함에 있어 그런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관계라는 것이다. 이는 골로새 교인들이 '바울이 사도임을 믿습니다!' 하면서 자신의 세뇌시켜가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말하는 것이라면 의지를 가지고 믿으려 하지 않아도 다 수용될 수 있고, 순종되고, 설득 당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편지는 그런 형제들에게 전하는 편지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믿~습니다"라는 의지로 믿으려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편지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골로새 교회에 편지하는 바울과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형제들이라는 관계 안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즉, 믿음이라는 것이 의지를 가진 것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를 믿듯 그냥 믿어지고, 하나님은 또한 우리에게 뭔가를 말씀하실 때 수용되고, 설득되고, 순종되는 충성된 사람으로 여기는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골로새 교인들이 하나님의 본체가 아닌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도, 즉 육신을 가진 사람을 믿고, 또한 바울은 그들을 신실한 형제로 여기는 관계와 같이 교회 안에서 지체들을 대함에 서로 그러한 관계임을 보여주는 바울 사도의 문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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