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2

많은 사도들이 서신서를 보낼 때에 항상 ‘은혜와 평강’을 기원했습니다. 이 은혜와 평강은 이 블로그의 다른 글에서도 자주 설명한 것이기도 합니다. 은혜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주심입니다. 사람이 스스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아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자기가 결정해서 온 것이 아닌 이상 자신이 사는 목적이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절대적인 일을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셔서 알게 하셨기에 그것이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평강은 말 그대로 평안인데, 모든 사물의 평안한 상태는 자기 존재의 목적대로 있는 것, 그것입니다. 식칼은 주방에 있을 때 가장 평안한 것이고, 총은 전쟁터에 있을 때 가장 평안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 존재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에게 있어 가장 평안한 상태는 다름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목적대로 있는 것, 그것이 사람에게 가장 평안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든 목적대로 존재하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크고 온전한 평강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입니다. 특정한 사람의 삶의 순간들, 사람들이 흔히 결정해야 하는 순간의 결과를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존재의 정체성과 운명을 미리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만들기 전에 정하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그 하나님의 뜻은 미리 정하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하신 뜻을 표현하시니 사람이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그 존재의 이유와 의미와 목적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정이고, 그 예정하심에 순종한 사람은 그 부르심에 순종한 것이며, 그 순종 안에 있으면 그것이 은혜이고 평강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와 평강은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은 사람들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졌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존재 목적, 삶의 의미,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평강은 다름 아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 인간의 정체성 = 우리 삶의 의미와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흔히들 생각하는 은혜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은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사업이 남들보다 잘 되고, 교회에 다녔더니 아이들이 성공하는 것이라 여기며,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다녔더니 큰 사고를 면했다는 것과 같은 것이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평안은 말할 것도 없이 육신의 평안과 육신이 하는 일들이 아무런 갈등 없이 자기 뜻대로 평안히 잘 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베드로사도는 그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뿌림이 있어야 평안하고 은혜를 입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사도는 다른 서신서와는 조금 다르게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 것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이미 은혜와 평강이 있는 이들에게 이 서신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 베드로전서가 믿음 안에서 힘든 시련을 겪는 이들에게 문안하고 위로하는 말이 많은 것과 연관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것을 생각해 본다면 믿음의 시련은 은혜와 평강이 있는 사람의 것이라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일반으로 생각하는 시련의 본질은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유전으로부터 받은 자기 가치관에 뿌리를 두고서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자기 삶의 목표를 향해 가는 길에 만나는 여러가지 문제를 시련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것을 시련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런 것을 자기가 걸려 넘어질 돌뿌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 가운에 창조한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가 삶을 주관하니 겪게 되는 갈등인데 그것을 믿음의 시련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련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와 뜻을 자기 존재의 목적으로 살면 그것은 세상의 가치관과 전혀 다른 것이기에 세상 사람들이 운영하는 사회의 법이나 기준으로 볼 때 바보 같고 미련해 보이는 것과, 세상의 가치관이 왕이 되어 서로 살아가는 법 안에서 그 법과 다른 의로 살아가니 늘 죄인이 되는 그 삶이 바로 믿음의 시련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왜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가난한지와 같은 것이 믿음의 시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베드로사도의 서신은 그런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어져서 나오는 베드로사도의 권면의 말씀, 믿음과 덕과 지식과 같은 것도 세상의 가치관으로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으로 아는 이들에게 해당되지 않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성경을 지키는 것은 덕을 더하고 지식을 더하려고 하는 모든 것은 그 목적이 자신이 바라는 바 세상에서 성공하는 은혜와 평강일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과 다르게 성경을 지키는 것이 바로 행위에 기반을 둔 신앙이고, 그것이 선지자 노릇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베드로사도의 서신은 온전한 믿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누어진 사람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지신 인생을 향한 미리 정하신 뜻에 순종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은혜와 평강을 온전히 아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베드로전(후)서를 읽고자 한다면 이 베드로사도의 인사말씀이 자신의 마음인지, 자신의 신앙 고백인지부터 먼저 돌아보면 좋을 것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배드로전서 1:1-2) 하나님의 예정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7. 12. 23. 09:03 Writer : 김홍덕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고 하면 구원을 받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정하셨다는 말로 받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는 것은 a man에 대한 정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the Man의 운명과 정체성 그리고 목적에 대하여 정하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1: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미리 아심’도 foreknowledge(선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어떤 한 개인에 대하여 복을 받을 사람인지, 아니면 저주 받을 사람인지를 정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어떤 운명과 목적과 정체성을 가졌는지를 사람이 나기 이전에 정하시고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방송도 재방송 보면 재미가 없는데, 고양이가 쥐 잡아 먹기 전에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운명이 정해져 있는데 복도 주고 벌도 하는 일을 왜 하시겠습니까?


따라서 성령의 거룩하심에 순종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과 정체성과 삶의 의미와 목적에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고,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여러가지를 듣고 자기 안에 넣지만 대부분은 자기 기준으로 듣습니다. 같은 뉴스를 보고 정치적 성향에 따라 반응이 다른 것은 들은 것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기준으로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종적인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는 듣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순종적으로 듣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 들은 말씀이 모든 것의 기준이고, 그것이 법이라는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들은 말씀과 자신의 의가 다르고 충돌하면 하나님의 의가 온전한데 자신이 무엇을 이해하지 못했는지를 상고하는 그런 들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고 하는 것,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 들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이 의도하는 바를 자기 의의 기준이나, 자기 바램의 색안경을 끼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비유로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밭에 가서 일하라고 했는데, 하나는 간다고 하고 가지 않았고, 다른 한 아들은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갔다면 누가 순종한 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성경을 문자 그래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가지신 뜻, 예정하시고 계획하신 사람 창조의 의도와 목적, 그것입니다.


이 예정하심을 순종한다는 것은 대단히 거룩한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을 순수하고 깨끗한 것으로 생각하면 이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거룩하심은 곧 <구분>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성경을 보면서 자기가 복을 받기 위하여 성경을 지켜는 것을 순종이라고 포장한 사람들과 구분되게, 하나님의 의도하심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구분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구분됨을 가진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그것이 나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의에 성령으로 순종하는 것이 알려면 이렇게 생각해보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나에게 유익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유익인가?”

특별히 여기서 하나님께 유익이라는 것을 내가 유익해지고 세상에서 성공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을 하나님의 유익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의 찬양은 오히려 모독입니다.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를 본질로 아는 이들에게 찬양을 받는다는 것은 한국에 살면서 북한의 찬양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께 유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이 드러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광은 ‘나타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예수를 믿고 순종하면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이 더욱 드러날 때 하나님이 유익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물질세계에서 풍요와 안정을 취하게 하시는 신으로 드러나는 것은 바알이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으로 드러나려면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들이 나면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것과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가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이가 아들인 것입니다. 이런 법에 순종하지 않고, 세상을 살면서, 물질세계의 성공을 꿈꾸는 자기 욕망과 바램의 소망이라는 색안경을 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성경을 몸으로 지켜 자기가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금도끼 은도끼를 바라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고 한 욕심 많은 나뭇꾼과 같이.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성령으로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자기 인생의 운명으로 알고 순종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며, 그런 순종은 사람의 의지로는 되지 않고 성령으로 잉태되고 거듭날 때 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순종 가운데 있는 사람이 바로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베드로전서 1:1-2) 나그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7. 12. 21. 17:11 Writer : 김홍덕

베드로 사도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편지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 등에 성도들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의 내용으로 볼 때 그곳에 살고 있는 성도들이 믿음의 환난을 겪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도들을 베드로 사도는 <나그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우리 인생을 나그네라고 많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서도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나그네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에 정착하기까지의 여정이 나그네와 같았기에 그렇게 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하나님을 믿는 백성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에 그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 10:19)


우리의 인생은 애굽 땅에서 나그네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가치관 아래에서 살고 있는 육신의 삶은 나그네의 삶과 같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나그네와 같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본향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나그네는 정착하지 못한 여정 가운데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어차피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없는, 그러니까 정착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이 세상은 단지 천국에 가기 위하여 수고하는 그런 곳은 아닙니다. 우리가 나그네라는 것은 정착할 곳이 있다는 것이며, 역설적으로 우리의 정체성이 세상의 가치관과 같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천국이란 정체성과 같은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나그네인 것이 이 세상의 가치관이 정한 정체성과 달라서라면 이 세상에서 세상의 정체성과 다르게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과 같은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나그네입니다. 고향, 곧 하나님 나라의 의가 자신을 통치하는 의인 사람이 세상의 의가 다스리는 세상에 살기에 나그네이고, 그런 나그네(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이기에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그네는 이 땅에서 곤고할 수 있습니다. 이 곤고함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들 보다 더 잘살고, 어 영광스런(세상적으로) 자리에 가야 하는데 이르지 못해서 느끼는 갈등이나 경쟁에서 예수를 믿기 때문에 교회에 가야하는 등 시간을 신앙에 투자해야 하기에 경쟁에서 불합리한 조건에서 다투기에 겪는 고난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서 육신 잘 사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며 그것을 위하여 열심히 사는데, 도무지 그런 것을 의로운 것이라고 삼을 수 없는 마음과 이를 가졌기에 세상 사람들이 그런 것에 관심 없음을 보고 비난하고 바보 같다고 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바로 나그네인 것입니다. 오리들 중에 있는 백조와 같다고 보면 됩니다. 이것이 나그네에 대한 올바른 개념입니다. 그것이 나그네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