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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1:3-13) 고난과 기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1. 4. 11:02 Writer : 김홍덕

예수를 믿는다면 시험과 근심이 있다는 것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습니다. 물론 앞서 여러 번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그 시련이 어떤 것인지는 좀 다른 문제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과 동일하게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신앙이 겪는 고난이나 시련은 역시 세상적인 것입니다. 목사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을 시련이라고 하는 것이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시련은 아닌데 착각하고 있는 것일 뿐이긴 합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은 이 육신이 가진 기본적인 곤고함을 벗을 수 없습니다. 일을 하고 운동을 하면 몸이 피곤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고, 누구라도 가급적이면 몸을 덜 움직이면서 자기 마음에 바라는 바를 이루고 싶으며,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다른 사람의 요구나 의지나 명령에 의하여 자기 몸을 움직이는 것은 누구나 다 싫은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 것은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느끼고 겪는 육신의 고단함과 곤고함은 모두 고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육신의 고난을 벗어나서 평안한 상태로 세상을 살면서 여유 있게 신앙 생활하는 것을 소망합니다. 따라서 여유롭게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은 것이고, 어렵게 살면 하나님이 더 열심히 하라고 채찍질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모두 육신에 대한 오해입니다. 육신의 평안은 복이고 육신의 고난은 벌이라는 생각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육신에 대하여 가장 착각하는 부분이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것은 소비하라고 주신 것인데 사람들은 육신의 평안을 하나님의 복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보존하는 것, 평안하게 하는 것이 육신의 존재 목적이라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육신의 상태는 곧 믿음과 신앙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육신이 얼마나 풍족한지, 육신의 행위가 얼마나 경건하고 거룩한지가 신앙의 척도가 되고 하나님의 축복의 척도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육신은 역사적으로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일회용이었습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 갔다고 하나 그 육신을 재활용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윤회설이나 전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뭐 부족하게 있어 재활용 하겠습니까? 육신은 소비재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육신의 모든 역량을 다하는 것입니다.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는 존재가 바로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곤고함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생을 육신으로 주신 목적에 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뜻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육신은 항상 최선을 다하여 소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앞에서 이야기 한 고난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몸이 곤고해지고, 남이 나를 오라 가라 하는 것에 내 육신을 내어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셨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어 육신이 평안해 지려 하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십자가에 드려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가는 것이 신앙이고 믿음이라면 당연히 우리 육신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수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고난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예수의 좋은 병사로서 고난도 함께 받으라고 권면하기도 했습니다. 고난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육신을 드려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셨듯, 우리도 이 육신이 곤고해지도록 소비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삶을 사는 것이 본분이기에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려고 산다면 곤고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육신이 평안해 질수록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언뜻 수도승과 같이 육신을 괴롭게 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우선은 시작이 다릅니다. 수도승들이 몸을 괴롭게 하고 신부나 수녀가 결혼하지 않고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그것을 경건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 육신과 그 육신이 가진 본성을 부정하게 보기에 그것을 이기기 위하여 몸을 괴롭히고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과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육신이 수고하는 고난은 세계가 다른 것입니다. 


육신을 부정하게 보므로 육신을 괴롭히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었다고 하나님을 조롱하고 비난하며 도전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육신이 수고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에 온전한 것임을 믿기에 그것에 수고하는 것이기에 온전히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다른 것입니다.


바울 사도와 베드로 사도가 고난을 권면하듯 말하고 또한 이를 기뻐하라고 하는 것은 온전한 고난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 된 사람들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즉 육신을 드려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한 것이니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다는 것은 그 존재하는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아는 것이고 그것은 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안에 있는 것이기에 그 사람은 온전히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를 가졌으니 당연히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기에 육신이 수고하고 힘들게 사는 것은 같아 보이지만 어떤 이들은 이 육신이 곤고한 것은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것이라 여기고 또 육신이 부정하기에 그런 것이므로 그것을 이기는 것은 육신을 괴롭게 하여 하나님이 주신 육신의 본능을 억제하므로 경건해 져서 결국은 몸과 마음이 평안해 질 것이라고 믿는 외모로 보고 육신의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입니다.


하지만 눈으로 보기에 동일하게 육신의 수고로움과 곤고함 가운데 있어도 이 육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온전한 것으로 순종하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선악과를 먹은 인생들 앞에서 죄인이 되고 수고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온전히 믿는 것이며 하나님이 자신을 만든 목적 안에 순종하는 것이며, 자신의 존재 의미와 삶의 목적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기에 그 고난은 정말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베드로 사도와 많은 사도들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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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6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8. 1. 2. 10:46 Writer : 김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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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사도가 ‘너희’라 말하는 사람은 단순하게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물론 성경을 읽고 문자 그대로 지키려는 사람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You라고 하는 사람 곧 하나님과 <너와 나>의 관계가 형성이 된 사람은 하나님과 가치관이 같은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는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본질인 것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겠다는 사람 역시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셨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과 다르게 살고 있는데 보호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그런 사람들을 즉시 멸망에 처하지 않는 것은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기에 그 기회를 주고 계실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마치 경찰이 신변을 보호하듯, 또 은행이 보증하듯 지키는 것을 생각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험한 꼴 당하지 않는 모습으로 교회에 잘 다니고 하나님께 세상에서 평안하기를 기도하는 것에 지장 없는 건강과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부자(눅 12:13-21)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지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게다가 초대교회의 많은 사도들이 순교를 당하는 험난한 삶도 대체로 보호해주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라면 사람은 죽어도 된다는 식으로 방치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대적하는 사람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이었음에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것은 육신의 복락과 안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TV 드라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가족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는 것과 유사합니다. 드라마 안에서 때로 많은 돈이 필요한 상황을 설정해 두고 가족의 정체성에 위배되는 방법(예를 들면 결혼과 같은 거래)으로 돈이 충당되지만 결국 가정이 큰 갈등을 겪는 것을 묘사된 것을 보기도 합니다. 가족이 원하는 것은 서로의 관계에 대한 의미와 마음이지 돈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것도 비슷합니다. 우리의 육신의 문제, 경제적인 것, 건강에 관한 것,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 관한 것, 사업의 성공과 같은 것, 큰 교회를 짓는 것과 같은 것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지키고자 하시는 유일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의 정체성, 그것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시고, 나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관계, 그것 하나 만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지금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거룩한 성령에 순종하므로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는 성도들에게 이 서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곧 ‘너희’이며 그들을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은 사람들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뿌림에 순종한 그 순종함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뿌림에 순종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신의 생명임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진 본성이 자기 삶의 본성이 되는 것이 자기의 존재 목적이 온전해 진다는 것을 고백하고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우리 인생의 정체성을 자기의 정체성으로 받으며, 그것을 보이신 예수님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셨으니 주님으로 모시는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관계를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이 하는 일의 안위와, 가정과 가족의 평안과, 사업의 번창함을 하나님께서 지키시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의 삶을 지키시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 육신 안에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께서 지키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피, 곧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어야 지키는 것입니다. 보석이 들어 있지 않는 보석함을 지킬 이유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문안과 같은 사도들의 문안을 읽을 때 그 문안이 자신과 상관이 있는 문안인지부터 먼저 상고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보호하신다는 그 문구만 볼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낭비하시는 분이 아니시니 그 능력으로 보호하신다는 것은 분명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내 안에 있는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내 안에 있는지 그것을 먼저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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