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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사도가 그의 서신에서 제법 긴 문안을 이어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겪는 곤고함과 환난 그리고 핍박에 관하여 위로하고자 함입니다. 그런 목적에서 베드로 사도는 그런 고난을 당하는 것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도 함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은 환난과 핍박을 단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받는 차별이나 억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놀림에서부터 목숨이 달린 문제까지 그 수준이나 범위가 광범위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본질적인 환난과 핍박은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과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현상의 일부일 뿐, 그것이 신앙을 가진 곤고함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작금을 생각해보면 기독교는 개독교라 불리며 사회적인 비난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하나님을 믿는 선한 사람들이라고 자부하기에 교회 세습과 같은 문제 제기에 ‘하나님의 일을 모르고 방해하는 것’이라고 일축하는 용감함과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의 감정을 폭발 시킬 정도의 집단 이기주의에 반해 여러 사회적인 문제의 중심에 기독교가 흔적을 남기고 다니기 때문에 겪는 일들이 많습니다. 


이런 일은 그냥 자업자득일 뿐이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정확히는 기독교라는 종교 단체)에 다니는 사람들을 향하여 핍박으로 여길 만한 말과 행동을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하여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핍박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면서 당하는 일들을 핍박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일요일에 교회에 가야 하는데 출근하라고 해서 가지 않으면 당하는 비난 같은 것들 말입니다. 하지만 교회에 가는 목적이 하나님께 기도해서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마음이거나, 아니면 예배에 빠져서 벌을 받으면 안 되니 교회에 가는 사람이라면 출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하거나 심지어 이런 맥락에서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핍박이나 순교는 아닙니다. 이런 것을 착각하면 안됩니다. 


이는 그 목적이 하나님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뜻하신 목적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고난은 오직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고난 그 한 가지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고난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 인생의 의미라는 것을 나타낼 때에, 피라미드의 높은 곳으로 가야 하나님의 아들이고 성공이며 영광이라는 자들의 가치관에 위배되기에 육신이 사는 세상에서 배척 당하고 멸시 당하며 심지어 육신과 삶의 고통 그리고 죽임을 당하게 되는 그 하나의 이유만이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문안은 바로 이런 고난을 받고 있는 이들을 향한 안부이며, 문안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경쟁에서 하나님을 힘 입고자 하는 사람들이 받는 세상의 시기와 질투가 아니라, 세상이 가치로 여기는 것에 동참하지 않기에 받는 외면과 세상이 가치로 여기는 것에 동의하지 않기에 받는 징벌적인 모든 곤고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 사도가 앞서 이야기 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자기 삶의 고백이 되었기에 그렇게 얻은 영원한 생명, 곧 썩지 않고, 더럽지 않으며, 쇠하지 않는 하늘에 있는 기업을 가진 사람들의 본성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보니 세상이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모습인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므로 죽임을 당하신 것과 같은 본성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 본성이 우리를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죽은 자로 만듭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가치관이 좇는 것을 좇지 않으니 그것을 좇는 이들이 볼 때는 버릴 수 밖에 없는 돌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버려진 돌이 성전의 모통이 돌이 된다고 하신 것과 같이, 우리가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어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과 같은 본성으로 살기에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인생을 만드신 그 목적을 나타내는 것인 인생을 소비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기에 받는 세상의 외면과 멸시와 세상을 찬양하지 않기에 죽임을 당하는 그것이 바로 고난인 것입니다.


이 고난은 의지와 신념이나 각오로 임하거나 진입하거나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의지를 가지고 십자가를 지셨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아주 잘못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가진 본성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모든 율법을 육신으로 지켜내고, 세상에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본성이고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도저히 그럴 수 없기에 그럴 수 없다고 했기에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본성을 어떻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본성과 정체성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당하는 고난과 핍박을 받는 이들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위로하는 ‘너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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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하늘’은 사람의 모든 운명을 가진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도 하늘은 많이 나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무래도 ‘주기도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꼭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올라가신 하늘은 눈으로 보기에 하늘이지 가신 곳이 우주라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라는 정도는 이해가 되어야 성경을 볼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그 몸이 우주로 사람 눈에 보이는 속도로 갔다면 아직 태양계 안일 것입니다. 그럼 천국이 태양계 안에 있다는 이야기일까요?


베드로 사도는 부활의 산소망에서 비롯된 썩지 않고 더럽지 않은 우리의 기업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두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늘에 두신 이유가 누가 훔쳐 갈 것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냥 두신 것도 아니라 간직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땅에 살고 있는데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갈 수 없는 하늘에 기업을 간직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존재이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기업을 두신 것이 그들을 위한 것이 되겠지만 하늘과 뜻이 다른 사람에게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간직한 이 기업이 자신의 기업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은 보통 사람에게 운명을 가진 곳이라는 의미를 줍니다. 주기도문 포스트에서 많이 언급한 바와 같이 땅은 모든 것을 하늘에 맞춥니다. 하늘이 여름이 되면 땅도 여름이 되고, 하늘이 추워지면 땅도 추워집니다. 또한 비가 오면 땅은 비를 맞아 생명을 내고, 사람들은 우산을 씁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오직 하늘의 상태가 땅의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의 모든 것에 맞추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땅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은 다름이 아니라 땅의 모든 운명을 가진 곳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늘은 당연히 썩지도 더럽지도 쇠하지도 않으며 좀 먹지 않는 곳입니다. 그 하늘의 뜻이 곧 자신의 운명인 사람에게 하늘의 기업은 그야말로 든든한 은행과 같은 곳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하나된 자, 곧 사람(the Man)의 모든 운명을 정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그 삶의 내용이고 그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인 존재는 하늘의 모든 기업이 다 자신의 기업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기업을 간직하시듯 그 사람의 삶을 안위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폰을 사서 애지중지하는 것 같이.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모든 운명, 곧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에 순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문안하는 ‘너희’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자신이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하나남을 통하여 관철시키려는 사람들에게 이 안부와 문안은 전혀 해당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사 자신이 생각할 때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도 자기들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한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교회에 다니니까, 또 성경 읽고 찬송 부르며 기도하고 또 때로 성경에 이른 대로 선행하고 성경을 지키려 노력하는 삶을 살기에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사일 수는 있어도 순종은 아닙니다. 마크 트웨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곤경에 처하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라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지키며 산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성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가 된다는 것은 그 본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듭남’, ‘새 생명’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려는 행위 규범의 신앙에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이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로 순종하는 것이 순종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고 하늘의 기업을 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도로를 달리는 운전자들은 가 옆에 가는 차 보다 앞서 가기 위하여 길을 나선 것도 아닌데, 서로 지려 하지 않고 빨리 가려 하며, 끼워 들고 또 반대로 끼워주지 않으려 위험한 운전을 하고 더 나아가 보복 운전까지 합니다. 집을 나설 때 도로에서 만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보다 운전 잘하는 것을 보이려 한 것이 아니라 자기 길을 가려 했건만 그렇게 하듯이,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세상의 법에 의하여 경쟁하여 이기려 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이가 정하고 약속한 땅(자리)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잊고 오히려 서로 경쟁해서 이겨야 영광이기에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것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에는 하늘의 기업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활이 없다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고 좋은 믿음의 열매라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전하러 지구 반대편에 갈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드리면서까지 보여주신 우리 인생의 목적, 이 육신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가장 온전한 존재임을 알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삶을 사는 것이 자신의 존재 의미인 것으로 알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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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1:3-12) 썩지 않는 기업을 잇는 신앙

Category : 카테고리 없음 Date : 2017. 12. 29. 12:26 Writer : 김홍덕

세상의 모든 것은 그 존재의 목적이라고 하는 내용이 있고, 그 목적하는 바를 실현하기 위한 모양과 기능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만드는 모든 물건도 동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건의 외관이나 기능의 작동이 되는 것과 무관하게 자신이 그 물건에게 기대하는 바 목적이 성취되지 않으면 버리거나 중고로 팔아버립니다. 물론 때로는 그 물건이 가진 목적보다 더 중요한 목적(현금 확보) 때문에도 팔아 버립니다. 그러니까 모든 물건은 그 형상이나 기능이 본질이 아니라 기대하는 바 목적이 본질입니다.


사람들은 자동차를 주기적으로 바꿉니다. 핸드폰도 바꿉니다. 그 주기야 사람마다 다르지만 한 가지 바뀌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동차나 휴대폰의 용도입니다. 즉 목적은 영원하지만 그 물건은 계속 새것으로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모양이나 형식은 다 썩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 육신도 같은 법 아래 있습니다. 이 육신도 영원하지 않고 썩어질 자리로 가는 것은 이 육신은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썩어질 것’이 무엇인지를 봐야 합니다. 즉 우리가 썩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은 그 존재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휴대폰은 중고가 되어 썩어져도 그 목적하는 바는 항상 동일한 것과 같이 세상도, 육신도 다 썩어지나 그 이면에는 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라고 하고, 특히 사람에 대하여 창세기에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곧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소망이나 썩지 않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사람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있는데 이는 우리가 휴대폰에 기대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법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존재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 주관자라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는 존재 목적에 관한 것이므로 우리가 이 존재 목적에 순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지 아닌지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 순종이 있으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행위 규범은 자연적으로 지켜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을 순종으로 알면 이는 휴대폰이 전원은 오고 불도 인터넷 검색도 되고 전화도 되지만 내가 원하는데 전화되지 않고, 원하는 검색을 제공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전화나 검색은 잘 되지만 주인이 원하는 것이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에 대하여 사람이 그 몸을 남을 위하여 불사르게 내어 준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람이 성경에 나오는 문자를 제 아무리 잘 지켰다고 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에 순종한 것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이라는 것은 이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생이 존재하는 목적에 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에 있어 아주 핵심적인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이것에 관한 것을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 달라고, 밥 달라고, 배우자 달라고, 합격 달라고, 사업 성공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덧붙여서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할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다 썩어질 것이요,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것이며 당연히 쇠약해지는 것입니다.


썩지 않는 소망, 그 산 소망, 생명이 있는 소망은 한 죽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가치관으로 볼 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의를 소망하고 그것을 본질로 여기는 사람의 모습은 실패자고 죄인이며 바보 같아서 그렇게 대접하는 그 대접을 받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대접을 받고, 그런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 곧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사람들의 법으로 볼 때 버릴 돌, 아무 쓸모 없고 그들의 목적으로 볼 때 죽은 것이라는 판정을 받는 죽음을 당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그 의가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본성으로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본성으로 살아 가는 것에는 당연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전하는 말도 하고 삶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자, 곧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여기며 기도할 때 썩어질 것을 구하여 그것을 받으면 세상에서 하나님이 영광이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볼 때 하나님의 본성으로 사는 사람들은 죽어야 할 죄인인 것입니다.


바로 이 사건이 십자가 사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그 말씀의 본성대로 살았을 뿐인데,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자 곧 눈에 보이는 썩어질 것을 본질로 아는 이들이 볼 때 살려 둘 수 없기에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 죽음이 오히려 산 것이고 생명이 있는 것이기에 죽음에 둘 수 없어 살리신 것입니다. 아니 그것 자체가 바로 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치관에 따라 생명 있는 것으로 여기신 사건이 부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 되어 세상에서 쓸모 없는 취급 받는 죽임을 당한 적이 없는 사람은 당연히 부활이 없는 것입니다. 썩지 않는 것에 대한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구하여 그것을 받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는 신앙은 제 아무리 정통이니 나발이니 떠들어도, 제 아무리 신학박사에 수천 명이 모이는 교회의 목사라도, 또 심지어 자기 목숨을 그것을 전하는 것에 바친다고 해도 다 결국은 썩어질 것에 소망을 둔 부활이 없는 신앙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썩지 않을 것을 소망하는 온전한 신앙을 가지려면 눈에 보이는 세상은 목적을 표현하는 형식이라는 것을 깨닫는 안목이 필요한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에는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그 존재 이후의 삶을 풍요하게 하는 것을 위함이 아니라 존재하게 하신 이가 뜻하신 목적에 순종하는 것이 있어야 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썩지 않는 기업을 잇는 신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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