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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보다 세상에서 더 잘사는 것을 볼 때 ‘그래도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까?’라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곤 합니다. 상대적인 즐거움이나 부유함의 부족에 대한 반대급부 혹은 보상으로서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의 상급으로 죽어서 천국에 가면 상황이 역전될 것이라는 것에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블로그에서 늘 언급하는 바와 같이 이 세상의 삶은 우리 영혼의 영원한 삶의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왜곡되기는 하지만 다르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칼의 그림자가 돋보기처럼 나오지는 않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즐겁고 행복하고 만족하며 이 육신을 가진 삶을 영광스럽게 여기지 않았는데 영광스런 천국에 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이 세상의 성과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대로 산 사람들이 그 육신의 장막을 벗고 하나님 의의 세계로 흡수되듯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삶이 영광스러워야 영광스런 천국에 갈 수 있고, 이 세상의 삶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워야 모든 것이 만족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흔히들 이야기하듯, 이 세상은 곤고하나 천국에 가면 편히 쉴 것이라는 것은 다 세상적인 프레임입니다. 세상에서 육신의 수고 다음에 육신의 평안이 주어지고 한편으로는 편히 쉬고자 하여 열심히 일하는 그 프레임에 천국을 각색한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편지를 수신하는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성도들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으로 즐거워한다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히 베드로 사도 안에도 예수를 사랑하는 것으로 인한 영광스러운 즐거움이 있는데 베드로 사도도 그것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듯 성도들 역시 분명히 자신의 마음과 같이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의 영광스러움과 즐거움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즐거우면 미친 사람이라고 합니다. 괜히 히죽거리며 다니고 난데 없이 큰 소리로 웃는 사람들은 대게 정신적인 질환이나 장애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즐거움은 다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는 즐거움, 그것도 말로도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 역시 그럴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도 없이 즐거워하고 있으면 미친 사람 곧 성경이 말하는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이유는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잘 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 요한3서에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원한다.’ 하니 모든 일이 잘 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만 그게 바로 이유 없이 기뻐하는 정신나간 행동입니다. 영혼이 잘 됨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육신처럼 먹고 마시고 입고 성공하는 것이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은 단지 하나님의 의를 바라는 것을 위하여 있기에 영혼은 오직 하나님의 의와 같아지는 그 하나가 잘 되는 것이고 존재의 이유입니다. 따라서 영혼이 잘 됨과 같이 범사가 잘 된다는 것은 내 영이 하나님의 의와 하나가 되어 범사가 다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는 즐거움은 육신의 어떠함이 세상의 기준으로 잘 되어 즐겁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또 성경이 말씀하시는 이 영광스런 즐거움의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를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로서 자신의 의미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세상 나 아닌 다른 사람 중의 반이 나와 다른 이성인데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와 결혼하고 사랑하는 것은 그 상대가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고 그로 인하여 나 또한 남자로서 또 여자로서 온전한 의미가 생성되는 것이 사랑이듯,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에게 의미가 있고, 나의 어떠함이 예수님께 의미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의미가 있어지는 것을 예수님께 기도하면 육신의 일이 잘 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으로 회귀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완전하게 실패한 분입니다. 세상에 사형수로 처형 당하는 사람보다 더 실패하고 몰락하며 부질없는 인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개똥 밭에 뒹굴어도 이 세상이 낫다고들 하는데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자기 목숨을 빼앗기는 사람보다 더한 실패자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도 잘못한 것도 없이 죽임을 당했으니 실패했을 뿐 아니라 억울함도 말할 것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육신의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어디서 그런 용감 무식한 믿음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믿음이라고 가르치고 신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렇게 어리석고 답답한 일이 즐겁고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자기 최면에 빠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다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 예수님이 자기 인생의 의미가 된다는 것은 단 1%도 세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육신의 평안과 복락이 예수를 믿어 된다는 신앙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치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믿음을 가지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귀신 들린 바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말할 수 없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 정도의 기쁨은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런 즐거움은 아닙니다. 그러니 그런 마음은 천국에 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인생의 운명을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서 자신의 존재 의미와 운명으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면서 ‘저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성공하겠구나!’라고 여기면 그건 더할 나위 없는 바보 멍청이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를 보고 그 예수를 사랑하여 예수님을 자신에게 절대적인 의미로 순종하는 사람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런 즐거움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즐거움은 당연히 세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시험에 합격해서, 사업에 성공해서, 큰 병이 기적적으로 나아서 느끼는 즐거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을 세상이 주는 기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베드로 사도가 말할 수 없는 세계라고 했듯, 또 예수님께서 이것은 세상에 없기에 비유로 밖에 말 할 수 없다고 하심과 같이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경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즐거움과 영광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즐거움과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았을 뿐인데 그것이 속 심령에서 생명이 되어 그 생명으로 인하여 넘쳐나는 생수,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기쁨이 넘쳐나는 존재가 되어 항상 기뻐하는 존재가 되는 법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듯 말로 할 수도 없는 즐거움과 영광인데 그 이유를 가진 사람은 서로를 보면 서로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에게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멀리 있어도 알 수 있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생명의 세계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보고 사람에게 위로를 얻는 것은 배워서가 아니라 본성이 그런 이유이듯,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본성 역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사람은 인생이 존재했다는 것, 그 자체가 감사한 사람입니다. 태어나 보니 인생이고, 인생은 고난이기에 하나님께 위로를 받자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를 알고 봤더니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너무 감사하고 영광스럽게 여겨지는 사람,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쩔 뻔 했을까 싶은 마음이 충만할 정도로 하나님께 감사가 있는 사람들 만이 알 수 있는 세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비밀인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태어나고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그렇게 감사하고 영광스러우며, 어떻게든 예수를 부인하려 해도 안 되고, 어떻게 성경을 의심하려 해도 도무지 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면 당신은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의미가 아닐 것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도깨비 방망이일 수는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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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던 제자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교회에서 아주 널리 사용되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때 소위 말하는 교역자들에게 질문을 하면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그렇다면 그렇다’는 색이 살짝 입혀진 체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그와 유사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의 말은 신학교를 나온 삯꾼 목자들의 ‘닥치고 믿어라’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전하는 사람이 보지않고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황이 아니라, 듣는 이들, 사도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사도들이 ‘보지 않아도 믿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사람들, 곧 성도들을 보니 그들이 예수를 보지 않았는데 믿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보지 않았는데, 예수님을 직접 봤을 뿐 아니라 제자로서 살았던 베드로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니 자기 자신의 마음과 같았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보니 예수님을 사랑한 자신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그런 칭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너를 보니 어떻구나’ 이야기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 자기에게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소위 말하는 ‘말 안해도 알지?’라고 했을 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는 것은 서로가 그것에 대하여 알고 서로를 보니 동일한 것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상황입니다.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 여자들의 출산 이야기와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베드로 사도에게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사랑이 처음에는 아가페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고 믈으실 때에 ‘내가 주님을 필로애(우정 같은 사랑)한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육신의 세계에 관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고백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고백한다는 것은 아가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뭔지 알았고, 알고 보니 자기가 가진 사랑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 사도가 이제 성도들에게 ‘너희가 예수를 사랑하는도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자신 안에 있는 아가페 사랑 곧 하나님의 마음이 성도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 사도 마음에 다른 사람을 볼 때 그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인지 아니면 자신이 예수님께 고백했듯 육신에 기인한 사랑인지를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 그가 볼 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보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이는 본성에 관한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본능적으로 자기와 동일한 본성을 가진 존재를 알아봅니다. 그러므로 이 베드로 사도의 말은 서로가 동일한 생명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고, 베드로 사도의 위로를 받는 성도들 역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신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면 살아가는 일을 의논하지 않습니다. 교회 행사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돈(사실 교회가 큰 돈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지만)을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도 서로가 같은 본성을 가졌으니 그가 쓰는 것은 나도 그렇게 쓸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다면 서로가 상대가 무엇을 하든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것을 이야기할 것이며, 그리스의 본성을 표현하는 삶의 모양과 행동은 서로에게 감동이 될 뿐 다툼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지금의 교회들도 다들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 그래서 다툼이 많습니다. 상대나 자신이나 다 온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재정을 사용함에 있어 ‘어떻게 하면 청렴하게 할까?’ 고민합니다. 그것을 고민한다는 것은 자신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서로 알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을 믿는 것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사람이나 그것을 듣고서 헌금하는 사람이나 서로 그것에 대하여 인정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생명의 법, 본성이 가진 법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베드로 사도가 위로하는 성도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성도들은 베드로의 권면을 듣고, 그것이 위로가 되면 힘이 되고,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을 볼 때는 자기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그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것과 같기에 그들을 향해서 예수를 보지 않았지만 자신과 같이 사랑 한다는 것을 알고 보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은 자기 안에 본성이 있기에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 보이지 않아 잘 믿어지지 않는데, 보지 않고 믿어야 한다니까 신념을 가지고 억지로 믿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노릇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늘날 좋은 믿음으로 둔갑해 있는 현실입니다.


보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것은 우선은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생명의 본성이기에 볼 수 없는 것이고, 또 보지 않아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자기 안에 그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되리라 하심 대로 자기 안에서 보지 않아도 믿어지는 사람이어야 성령이 오신 것이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면 그 속에서 생수가 넘쳐나리라 하셨으니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진정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닥치고 믿으라’는 식의 것은 서로 모른다는 것입니다. 알면 잘 설명을 해 주지, 왜 보지 않고 믿어야 믿음이라며 일축하겠습니까? 사람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존재인데. 자기 안에 있으면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고 오히려 잘 설명할 것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믿음이니 쓸데 없는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는 사람은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는 것입니다. 단지 신학이란 학문과 종교적 지위만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게 바리새인입니다. 예수님께 회 칠한 무덤이라 책망 받은.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믿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사람들은 무슨 의미인지 다 아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닥치고 믿으라’가 아니라는 것도 다 아는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 사도가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순종했고, 그리스도의 피 곧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들이어야만 아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면 굳이 볼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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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1:3-12) 시련의 상급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1. 6. 11:57 Writer : 김홍덕

성경에서는 보통 믿음의 시련을 이야기 함에 있어 그 시험을 이겨내면 정금과 같이 나온다는 말씀을 많이 하는데 베드로 사도는 믿음은 금으로 연단해서 나온 금보다 더 귀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로 연단한 금도 언제 가는 다 없어지지만 이 믿음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 믿음이 약해질까 염려한다는 것은 웃기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는 믿음과는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련은 그렇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시련은 육신의 곤고함이 끝나는 것이나,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연예 대상에서 대상을 받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은 그런 것을 영광으로 여기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


신앙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살아 가면서 어려운 일을 잘 이겨내면 좋은 날 맞이한다고들 합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 같은 말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말이지만 결국 세상적인 가치의 세계입니다. 어려운 시절 이겨내고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좋은 시절을 맞이한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신앙인들도 신앙을 그 맥락에서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련을 주시는 이유가 결국 세상적인 영화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시련의 상급은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시련의 상급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 사람들도 다 받고 싶어하는 상을 받아 들고서 ‘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와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칭찬을 들으려면 예수님이 귀하게 여기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받고 싶어 하는 상을 받아 들고서 그것을 영광이랍시고 하나님께 돌린다고 하는 것을 칭찬할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반복된 언급은 이것이 우리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핵심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영광으로 여기는지에 따라 고난의 상급을 대하는 것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고난의 정의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앞선 포스트에서 고난이나 시험의 정의를 언급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보고, 이 세상의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을 얻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의 난관을 고난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가진 가치관이기도 합니다. 그런 가치관은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시련의 상급과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여기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치신 가치관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세상의 왕이 되거나 세상의 가치관이 영광스럽게 여긴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받고 싶은 상을 받는 자리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멍청한 가치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영광을 보겠다고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닌데 왜 기독교인들은 자꾸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하는지 암담한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고 영광스럽게 여기셔서 존귀하게 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는 육신이 더 평안해지고 세상의 가치관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기대하는 가장 큰 가치는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뜻에 순종하고, 그것이 자신의 존재 목적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 달라고 아들을 십자가에 드린 하나님께서 무엇을 귀하게 여기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오히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가치 없는 것입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이들을 조롱한다는 것은 세상의 사람들이 볼 때 전혀 가치 없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을 인함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은 것을 추구하면서 당하는 곤고함이나 경쟁의 비난과 질투와 같은 것은 고난도 시련도 아닙니다. 그냥 죄로 인한 벌과 같은 것일 뿐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공하면 할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련이나 고난을 이야기하고 그 상급을 이야기할 때는 어떤 것을 가치로 여기는지가 먼저 결정되어야 합니다. 아들을 십자가에게 드리면서까지 우리에게 그 가치를 설명하신 하나님과 같은 가치관이 아니라 세상의 사람들이 누구나 가지고 싶은 것을 하나님의 이름(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지만)으로 가졌다고 그것이 영광이라 여기는 가치관으로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고난과 시련의 상급은 절대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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