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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1:3-12) 하나님의 뜻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1. 19. 13:41 Writer : 김홍덕

앞서 하나님의 뜻은 육신의 일이나 세상의 일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뜻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뜻을 알면 삶의 모든 일을 볼 때 왜 그런 일이 있는지, 또 어느 때인지, 지금 벌어지고 닥친 일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세상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과 그 세상을 온전함으로 다스린다고 믿는다면 속에 하나님의 심령이 있는 사람이 이 세상의 일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오직 인생으로서 자신의 존재 의미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고 그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그 하나인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다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죽하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고 했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뜻을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다가 사람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이 우리와 같은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보내심을 받은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이 예수님의 오심을 예수님께서 우리를 섬기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 1:12)


많은 기독교인들이 크게 오해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할 수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하심을 인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싫었지만 인류의 죄를 구하기 위하여 마음을 굳게 먹고 참고 참으며 십자가를 지신 것이라고 믿는 것이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큰 신념과 각오로 자신을 희생했다고 믿는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은 예수님의 희생을 이렇게 생각해보지 못했겠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각오와 신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모든 믿음과 신앙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마음을 그렇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그렇게 신념과 각오로 억지로 뭔가를 하려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런 존재로 보니까 자신들도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육신의 의지로 뭔가를 하려고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셨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자신들이 예수를 그렇게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셨는가? 굳은 의지로 지신 것이 아니라면 어떤 마음이었는가? 라는 의문이 남게 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우리 삶에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바로 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언제 어떤 고난을 받을 것인지를 지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간단하게 본능이라고 합니다. 생명만이 가진 본능.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의와 뜻이 그 생명의 본성이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은 바로 그 생명의 본성에 이끌림을 받아 사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십일 금식을 마치시고 시험을 받으실 때에 ‘성령에 이끌리어 시험을 받으셨다.’고 하셨는데 이는 예수님의 생명이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육신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시니 그 생명은 성령과 하나님의 의와 뜻이 하나인 온전한 삼위일체로서 그 하나님의 본성에 이끌림을 받아 사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 하나이시며, 하나님이 일하시니 예수님도 일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법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법을 가졌을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살아 있는 존재로 보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별로 관심을 두시지 않는 먹고 사는 것과 세상일에 관한 것을 알고자 하는 생명이 전혀 없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원적인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성령도 계시지 않고 하나님의 의와 뜻도 알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즉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에 알고 한다는 것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생명의 법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법으로 사는 모양이 무엇인지를 성경을 보고서 생명도 없으면서 그것을 지키려고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구원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뭔가 행동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말은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례 받을 때에 예수님이 구주라고, 예수님께서 나의 죄로 인하여 돌아가셨다고 고백하는 것은 행위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마음을 다 잡는 것, 교회 가기 싫은데 마음을 다 잡고 가는 것과 같은 것은 행위로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도 결국 생명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 죽어서 천국을 가겠다는 목적이나, 예수 믿어 세상에서 성공하겠다는 목적을 위하여 억지로 하는 것이고 그래야 하는 것이라서 하는 것이기에 그것도 다 육신의 신념으로 하는 것이기에 그것이 바로 본질적으로 행위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마음도 예수님께서 각오로 신념으로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하신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하신 것이 아니라 육신의 근원인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하셨기에 하신 것인데 이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이 예수님의 생명이기에 그 생명의 본성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어서, 하지 않으려 해도 하나님의 의와 뜻이 그것이고, 그 생명이 육신으로 그렇게 이끌기에 지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노라 한다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의 법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 뜻이 육신의 삶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고 예수를 온전히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과 생명의 법을 가지면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본성이 예수님과 같아서 그 본성대로 살 수밖에 없게 되니 그러니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믿음만 있으면 도둑질해도 되냐?’라고 반문합니다. 그런 질문을 들으면 속이 뒤집어집니다. 예수님이나 하나님은 환장할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의 본성이 도적질을 하는 본성이 있다는 말이라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미칠 지경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말과 혀로 고백하는 것은 행위라고 보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말로 하는 것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믿음이 생명의 본성에 관한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늘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합니다. 그것은 경건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지 못함을 인함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갈림길에서, 또 선택에서 어느 것을 택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내 생명의 본성이 하나님의 의와 뜻인지 아닌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뜻이 내 육신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의요 머리가 되는 삶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믿음이고, 그 믿음만이 구원인 것입니다. 당연히 그것이 십자가면 예수님의 생명의 본성이고, 그것이 예수님의 섬기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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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어떤 결정이나 또 자신은 이해하기 힘든 일 앞에 섰을 때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알려고 합니다. 그러다 생각하기를 ‘아~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고난을 통해서 더 강해지라고 하시는구나!’와 같은 생각으로 위로를 삼기도 합니다. 사람들,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이런 생각은 이런 글 앞에서는 갸우뚱 하면서도 너무나 일상 깊이 있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간결하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 그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처럼 어느 대학을 가야하는지,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는지, 누구와 결혼해야하는지와 같은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 그것 하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40)


그런데도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육신의 어떤 결정 앞에 하나님의 뜻을 궁금해 합니다. 하지만 그런 궁금증 앞에 사람들은 좀 솔직해져야 합니다. 그런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냥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자기 육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어떤 직장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궁금해 하는 것은 경건한 것 같지만 어떤 직장에 가는 것이 자신에게 육신의 복락이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더 주시는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육신의 삶을 풍요하게 하시는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기에 더 나은 직장에서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지 하나님께 무엇이 유익인지에 대하여 고민하느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 육신의 일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알려고 하는 것은 단지 그 안에 영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결정을 요구하는 일이나 예상치 못한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생각이 다르다는 증거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 경영하시는 세상에 뭐가 궁금하겠습니까? 


그것이 궁금하다는 것은 단지 그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대단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궁금해 한다고 해도 같습니다. 자기 안에 바울 사도가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다면 뭐가 궁금하겠습니까? 그것은 작은 일도 하나님께 묻고 하는 경건한 신앙이 아니라 그냥 영생이 없는 존재의 가식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은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하셨고, 영생은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성경을 믿노라 하면서 어디서 어떤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인지 어이없는 일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기도원에 가서 기도 받는다고 하질 않나, 목사에게 가서 묻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복이라고 높은 자리에서 외치는 자에게 가서 묻는다는 것 자체가 알고자 하는 것이 육신의 일과 세상의 일이라는 것을 자인하는 것입니다. 기도원에 가서 기도 받는다는 것? 그것은 무당에게 가서 굿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베드로 사도가 그리스도의 뜻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무엇이 고난인지, 어느 때가 그의 때인지, 무엇이 영광인지를 알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영은 자기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전한 선지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그것을 알게 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고난인지, 무엇이 영광인지, 그리고 그 때가 언제인지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 역시 그것은 영생에 관한 것, 영혼의 구원과 믿음에 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생과 구원과 믿음에 관한 것 이외에 하나님의 뜻은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서 ‘예수 믿는 믿음이면 어떤 직장을 갈지 다 알게 된다는 거야?’라고 하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의 믿음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요과 이생의 자랑 위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것에 대하여 우리에게 감추고 마치 가상 화폐 채굴해야 하듯, 우리가 행위로 성경을 지켜서 하나님께서 조금씩 알려주는 육신의 삶의 일을 조금씩 알려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데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그게 멸망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궁금한 것이 있다면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없기에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일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은 경건한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없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영생은 구원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이니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제야 살아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향한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뜻 안에 들어가는 것이기에 그것이 영생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생, 그 하나님의 뜻을 알고,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을 아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목적을 아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할 것인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해야 할 것이 있다면 자신이 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에 대하여 고백하는 것 그 하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신 뜻, 그것을 아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의 뜻은 그릇인 우리 인생에 담기기로 예정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예정입니다. 그리고 아주 아주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뜻도, 이 세상을 경영하시는 목적도, 사람과 이 세상에서 바라는 것도 단 하나인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자기 존재의 목적으로, 인생이란 그릇에 담은 그 사람,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시는 그 사람이 나오는 것 그 하나입니다. 그것 외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먹고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때로 공급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주시는 것일 뿐입니다. 자동차로 이동하기 위하여 기름을 넣는 것 같이. 


그 맥락을 알면 세상이 언제 망할 것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때에 소돔과 고모라의 일에서 보듯,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는 때,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의를 자기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로 삼지 않는 때가 세상이 망하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전혀 달성되지 않는 때이니 말입니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아직 세상이 시끄러운 중에도 돌아가는 것은 그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아직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보면 세상은 아직 온전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렇듯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우리 안에 있으면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하여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경영하시는 목적과 의미가 그 속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을 살면서 뭐가 궁금하겠습니까? 우리 안에 영어가 있으면 영어가 들리고, 우리 안에 배구가 있으면 배구 경기를 보면서 해설자가 말하는 것이 이해가 되고, 아이 낳아 본 여자가 출산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하듯, 군필자에게 군대가 이해되듯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자기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도무지 뭐가 궁금하겠습니까? 그게 영생과 믿음과 구원의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다 열려져야 비로소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구원을 얻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면서 겪는 일이 고난인지, 영광인지, 지금의 때가 어떤 때인지, 그렇게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우리 안에 영생이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인 것입니다. 영생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고, 우리가 영원하신 하나님이 가지신 사람을 향한 영원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아는 것이며, 이 세상을 경영하시는 온전하신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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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우리를 그릇, 또 성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 인생이란 그 안에 무엇을 담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담는다는 것은 그 담기는 것의 이름에 따릅니다. 콜라를 담는 병은 콜라병이 되고, 간장을 담는 작은 접시는 간장종지가 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같은 선생이라도 수학이 담겨 있으면 수학선생이 되고, 영어가 담겨 있으면 영어선생이 됩니다. 그게 그릇이고 사람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려 하실 뜻을 가지고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하니 귀신의 빙의와 같이 거한다고 생각하기도 하나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뜻이 거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뜻이 거하면 콜라 담는 병이 콜라병이 되듯, 하나님의 의가 거하면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계신데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육신 안에 거하시니 그 육신이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아들이 있다면 그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증거하게 됩니다. 아들은 그 성씨로 아버지의 혈통임을 증명하고, 아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얻고자 한 의, 자신의 본성을 이어가고자 한 의가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아버지의 혈통과 아버지의 의도가 아들이라는 육신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게 아들이고 그것이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의 의를 담을 때 그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이 주신 육신으로 표현되므로 그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 아들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 있어 가장 먼저 있어야 하고,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담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이고,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육신 가진 존재로 만드신 이유고 의며 뜻인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읽고 듣고 묵상하며 지키고자 하는 성경의 모든 말씀을 어떻게 받고 어떻게 지킬 것인지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되는 법에 관한 책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렇다.’는 것을 설명하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성경과 자신의 삶이 같으면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사는 것이고, 성경과 자신의 삶이 다르기에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성경을 그리스도가 되는 매뉴얼로 보는 것입니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설명한다는 것은, ‘하나님 아들의 삶이란 이런 모양이야!’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니 ‘어? 이거 내 삶이네?’라고 이야기 되는 것이 바로 성경대로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직 그렇지 않기에 육신으로 노력하는 것은 한 마디로 그 안에 하나님의 의와 뜻과 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어떤 사람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같은 삶이 되는지를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그 육신의 모든 삶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을 지키고 성경대로 사는 삶의 본질입니다. 그 예수님은 지금 많은 신앙인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성경에 있는 말씀을 육신으로 지켜서 그리스도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신(Born) 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가 되는 매뉴얼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하셨고, ‘내가 누구인지 알면 네 속에서 생수가 넘치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으면 성령이 오셔서 그것이 우리의 본성과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란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내가 한 말이 기억나고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만들어지는 것이나 노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온전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a christ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물(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거듭 났다는(Born)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났다면 당연히 사나 죽으나 늘 그리스도(a christ)인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성경대로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고 신앙이며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그릇과 같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이 있어 가능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베드로전서 1장 11절에서 <말씀하시는 바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고난으로 여길 것인지, 우리에게 어떤 때가 임하였는지에 대하여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이 우리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 영이 아브라함을 지시할 땅으로 가게 했고, 예레미아로 하여금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했으며,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끌었고, 제자와 사도들이 그것을 전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은 우리 역시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밝히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살며 겪는 일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또 때가 어느 때인지, 그것이 무엇이든지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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