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2

(베드로전서 1:3-12) 시련의 상급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1. 6. 11:57 Writer : 김홍덕

성경에서는 보통 믿음의 시련을 이야기 함에 있어 그 시험을 이겨내면 정금과 같이 나온다는 말씀을 많이 하는데 베드로 사도는 믿음은 금으로 연단해서 나온 금보다 더 귀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로 연단한 금도 언제 가는 다 없어지지만 이 믿음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 믿음이 약해질까 염려한다는 것은 웃기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는 믿음과는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련은 그렇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시련은 육신의 곤고함이 끝나는 것이나,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연예 대상에서 대상을 받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은 그런 것을 영광으로 여기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


신앙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살아 가면서 어려운 일을 잘 이겨내면 좋은 날 맞이한다고들 합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 같은 말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말이지만 결국 세상적인 가치의 세계입니다. 어려운 시절 이겨내고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좋은 시절을 맞이한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신앙인들도 신앙을 그 맥락에서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련을 주시는 이유가 결국 세상적인 영화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시련의 상급은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시련의 상급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 사람들도 다 받고 싶어하는 상을 받아 들고서 ‘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와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칭찬을 들으려면 예수님이 귀하게 여기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받고 싶어 하는 상을 받아 들고서 그것을 영광이랍시고 하나님께 돌린다고 하는 것을 칭찬할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반복된 언급은 이것이 우리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핵심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영광으로 여기는지에 따라 고난의 상급을 대하는 것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고난의 정의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앞선 포스트에서 고난이나 시험의 정의를 언급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보고, 이 세상의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을 얻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의 난관을 고난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가진 가치관이기도 합니다. 그런 가치관은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시련의 상급과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여기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치신 가치관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세상의 왕이 되거나 세상의 가치관이 영광스럽게 여긴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받고 싶은 상을 받는 자리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멍청한 가치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영광을 보겠다고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닌데 왜 기독교인들은 자꾸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하는지 암담한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고 영광스럽게 여기셔서 존귀하게 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는 육신이 더 평안해지고 세상의 가치관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기대하는 가장 큰 가치는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뜻에 순종하고, 그것이 자신의 존재 목적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 달라고 아들을 십자가에 드린 하나님께서 무엇을 귀하게 여기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오히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가치 없는 것입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이들을 조롱한다는 것은 세상의 사람들이 볼 때 전혀 가치 없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을 인함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은 것을 추구하면서 당하는 곤고함이나 경쟁의 비난과 질투와 같은 것은 고난도 시련도 아닙니다. 그냥 죄로 인한 벌과 같은 것일 뿐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공하면 할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련이나 고난을 이야기하고 그 상급을 이야기할 때는 어떤 것을 가치로 여기는지가 먼저 결정되어야 합니다. 아들을 십자가에게 드리면서까지 우리에게 그 가치를 설명하신 하나님과 같은 가치관이 아니라 세상의 사람들이 누구나 가지고 싶은 것을 하나님의 이름(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지만)으로 가졌다고 그것이 영광이라 여기는 가치관으로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고난과 시련의 상급은 절대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베드로전서 1:3-12) 시험과 기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1. 5. 17:26 Writer : 김홍덕

성경에서 시험(Temptation)이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이 가장 먼저 떠 오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정체성을 보이시려 이 땅에 오셨으니 예수님의 시험은 곧 우리의 시험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시험 역시 같은 것입니다.(예수님의 시험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 마태복음과 주기도문을 참조)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단지 마귀의 유혹을 이기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마귀는 시험을 할 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조건을 붙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돌을 떡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기적을 보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그런 것으로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고, 마지막으로 무엇을 경배할 것이냐에 관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본질로 볼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세상의 영광을 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가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은 마귀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이 이런 시험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험을 받으면 잠깐 근심하겠으나 곧 크게 기뻐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말씀이 아닙니다. 단지 어려운 관문을 이겨내었으니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먼저 시험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앞서 포스팅한 바와 같이 고난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먼저 시험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시험을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다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시험, 곧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은 하나님의 아들이 받는 시험이지 하나님의 아들도 아닌 사람들이 받는 시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험을 받으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조건이 붙은 이유가 바로 그것에 기인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에게 시험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은 베드로 사도가 지칭하는 이들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에 대하여 시험을 받을 것이지만 오히려 그 일로 크게 기뻐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그 시험을 받는다는 자체가 이미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만 받는 시험을 받으니 그 시험을 받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것이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뒤에서 베드로 사도가 이들에게 ‘너희가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라고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시험을 받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의 증거이고, 그럴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그 일로 오히려 크게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육신의 일이 잘 풀려서 기뻐하는 것이 아닌, 자기 정체성으로 인하여 기뻐해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주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쁜 사람이라는 것은 정체성 곧 존재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에서의 일과 육신의 평안에 관한 것을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일로 기쁘지 않습니다. 사는 형편과 상황이 달라지지 않아도 자기 정체성이 회복된 것 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면 이 기쁨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소망이 그것에 없기 때문입니다.


앞서 고난이라는 것을 이야기 함에 있어 고난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원하는 바가 얻어지지 않는 것이나, 아니면 평안하게 또 성공한 삶을 살지 못하여 겪는 곤고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고난은 이 육신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고자 살아가면서 육신이 소비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수고 없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낼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을 주신 이유가 그것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육신을 초월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시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에서 평안하게 살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보다 잘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육신의 평안과 복락이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는 시험을 받는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이전에 예수를 믿는 것이 위로는 되지만 만족이 되지 않는 세월이 있었습니다. 아주 길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 사람들보다 인생이 더 효율적이어야 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남들보다 일을 적게 해도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괜찮을 것이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사람이 육신으로 수고하지 않는데 어떻게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을 자기 인생의 운명으로 순종한 사람들도 육신을 가졌기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인하여 좀 더 평안하고 하는 일이 더 잘되는 기적과 같은 일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또 자신 뿐 아니라 세상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그런 것을 보이라고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세상 사람보다 세상적인 기준에서 사는 것이 어렵고 부족해 보이면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핍박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그런 마음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걷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키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라 여겼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대했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다 십자가에 달리게 된 것을 보자 ‘저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활하신 예수님께 고백하고 인정하고 나니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양을 먹이는 일을 대신하는 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그것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이기에 기뻐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는 기쁨, 예수님께서 주신다고 하신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기쁨을 누리려고 한다면 그 일이 자기가 바라고 소망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자기 존재의 의미와 목적이 되는 것을 소망하지 않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은 휴지 조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기뻐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 하나님을 믿기에, 또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세상의 사람들과 달리 하는 일이 더 형통하고 세상에서 잘 나가게 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알고 그런 일들에 기뻐하는 사람은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듯이 시험을 받아서 기쁠 이유가 없고, 고난을 받아 기뻐할 이유는 더더욱 없는 것입니다. 시험과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바라는 바 세상에서 잘 되는 일이 안 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험과 환난과 고난이 기쁜 일이 되려면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실존을 증거하고 그 본성을 드러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이 기쁨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될 때 시험과 고난이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마가복음 27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8. 1. 5. 10:53 Writer : 김홍덕


'미디어 말씀 파일 > 마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29  (2) 2018.01.23
마가복음 28  (0) 2018.01.10
마가복음 26  (0) 2018.01.02
마가복음 25  (0) 2017.12.26
마가복음 24  (0) 2017.12.19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