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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룩이라는 것을 아주 깨끗하고 사용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육신의 행실이 성경에서 하지 말라고 한 것은 한 적도 없는 순결한 상태와 같은 것을 거룩함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무엇에 깨끗해야 하고, 어떤 것을 오염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행위를 기반으로 한다면, 그러니까 행위로 하나님께 의로워지려는 생각과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행위를 오염된 행위로 보고 그런 행위는 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여길 것이며, 소유한 어떤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느냐를 신앙의 근간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또 무엇을 드리는 것이 거룩한 것인지를 목숨 같이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어떤 기준에 따라서 있어야 할 것과 없어야 할 것을 구분하고 그 구분된 상태가 되는 것이 거룩입니다. 다른 것과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염된 어떤 것 하나라도 묻어 있는 것과 묻어 있지 않는 것이 구분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렇듯 거룩함이란 구분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다만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구분될 것인지가 핵심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를 부르신 자의 거룩함과 같이 우리도 거룩하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 1:15) 그러려면 우리를 부르신 자는 어떻게 거룩한 것인지, 어떤 것과 구분되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부르신 자와 같이 거룩해야 하는데 부르신 자가 어떤 거룩함, 어떤 구분됨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이 말씀을 자신 것으로 받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르신 자는 당연히 하나님이시고, 또한 예수님이십니다. 부르시고자 하신 뜻과 부르신 내용은 하나님이시고 그 부르심을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의와 뜻을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을 가진 인생들이 그 부르신 뜻을 알게 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렇듯 부르신 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구분되는지, 어떻게 구분되기에 거룩하신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우리에게 어떻게 행하시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는지는 그 본성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행위가 그 속에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면 그 행위가 본성을 대변하는 것임도 아는 것입니다. 물론 행위로 속을 바꾸려는 반대 방향의 어리석은 신앙을 가진 이들을 이 비밀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하신 질문은 아마 “네가 어디에 있느냐?‘일 것입니다. 아담을 만드시고 이런 저런 말씀을 하셨지만 질문은 그것이 처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질문을 하셨다는 것은 그 답을 통하여 그가 질문하신 이의 생각과 같은 생각을 가졌는지, 질문하는 의도를 알고 있는지를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질문하신 상황이 좀 특이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아담이 그것을 먹었습니다. 먹고 보니 자신이 부끄럽게 여겨져서 숨었습니다.(부끄러워진 이유는 다른 글에서 보시면 됩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잘못된 행동(Do)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질문을 하십니다. 그런데 질문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Do)’라고 물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질문은 ‘네가 어디에 있느냐?(Be)’에 관하여 물으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이 ‘여호와’입니다. 이 이름의 뜻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해 주시는 분이라든가? 무엇을 하는 자라든가? 천둥을 다스린다거나 생명을 주관하는 자와 같이 어떤 행위로 그 정체성을 메김 하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름은 정체성이니 이름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은 무엇을 해 주시는 신이나, 어떤 것을 행하는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신과 종교, 사람들이 믿거나 만든 신과 종교는 모두 하나 같이 사람이 그 신께 무엇을 하면 그 신이 사람에게 무엇을 해 준다는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알에서부터 부처나 산신령이나 무당이나 모든 종교와 신앙이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제외하고 모든 신과 종교는 이미 존재하게 된 이 인생이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해야 의미가 있을 것이며, 무엇을 해야 바라는 바를 얻을 것이며, 무엇을 해야 선할 것인지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고 그것이 사람들이 신앙하는 신의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늘 스스로를 거룩하다고 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만들고 믿는 신은 모두 사람의 행위의 공로와 소유의 드림에 반응하며 의롭게 여기고 그것을 선히 여겨 인생이 바라는 육신의 복을 주신다고 하는 신인 것에 반해 하나님은 사람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 즉 ‘너의 정체성이 무엇이냐?’를 물으시고 또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를 물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사람이 그 행위의 공로와 소유의 드림을 보고 의롭게 여기시는 분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게 또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안에 있는 존재 정체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즉 Do와 Have가 아니라 어떤 Be(존재)인지를 고백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답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스스로 인생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서 스스로 그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하는데 하나님께서 그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 그래서 그것을 고백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주가 되심을 고백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가 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내가 무엇을 할 것이며, 그러면 하나님은 내게 무엇을 해 주시는지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와 가치관은 어떤 행동과 어떤 소유를 드리는지에 따라 그 결과가 종속되는 투자의 개념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비해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마치 부부와 같이, 부자와 같이 무엇을 해서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서 관계를 바라시는 분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인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시기에, 그 하나님의 가지신 뜻 역시 사람이 무엇을 할 것을 바라심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어떤 존재인지를 고백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우리 인생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존재인 것을 고백하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뜻을, 또한 우리를 만드신 뜻을 깨닫고 순종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관, 무엇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의로워진다는 율법을 가진 자들의 가치관으로 볼 때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데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을 죄로 여겨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을 보고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자, 곧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뜻을 아는 모든 자들 역시 그 자신의 운명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된다는 것을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도 그런 가치관을 가졌기에 백부장과 같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 자신도 행위의 공로와 소유를 드림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진다고 여기는 가치관을 가졌기에 뭔가 하지 않는 이들을 심판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과 같이 그것을 정죄하고 자신도 그 법으로 정죄하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백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하고, 이제 더 이상의 세상의 가치관과 같이 하나님께 공로나 소유를 드려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사람으로서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를 순종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행위의 공로와 소유의 드림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이 어떤 관계인지를 고백하는 것이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관계가 정리되면 그 관계에 기인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인데 그것이 바로 모든 행실이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마치 결혼하면 부부가 서로 결혼한 관계로서 살아가는 것 그러면 그 결혼은 거룩하고 온전하게 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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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 이런 말씀을 대하면 자연스럽게 ‘행동이 거룩하고 경건해야 한다.’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어떻게 거룩하게 될 것인가?’입니다. 행실이 거룩하게 되라고 했지 행실로서 거룩하게 되라는 것은 분명히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실을 거룩하게 하는 것과 행실이 거룩한 것은 말은 비슷하지만 아주 다른 것입니다.


이런 미묘한 차이는 13절에도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속심령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동이라고 했지, 마음만 동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마음이 정해지면 행실은 그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베드로 사도가 공부를 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기본 섭리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절대적으로 속에 있는 것이 겉으로 표현되는 존재입니다. 절대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역방향은 유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겉사람을 바꾼다고 속이 바꾸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군인이라 군복을 입는 것이지 군복을 입는다고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사람이 그 행동을 바꾼다고 그 정체성이 바뀌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그 정체성의 거듭남 없이 행동만 성경을 지킨다고 의로워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3-15)


베드로 사도의 이런 말씀은 우리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이 지으실 때부터 그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표현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에 그 속에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그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기반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실을 거룩하게 하라고 하신 것은 행동을 거룩하게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속 심령이 거룩하여지면 그 모든 행실이 거룩하게 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존재의 신앙이고 존재의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존재가 바뀌면 모든 것이 다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바꾸지는 않고 자꾸 자기 행실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렇다보니 예수님을 믿는 것에 있어서도 믿기만 하면 되는데 자꾸 뭔가를 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 하려는 무언가는 성경대로 행동하는 것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존재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존재가 되지 않았는데 행동만 그렇게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당연히 그 행동을 거룩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아주 바보 같은 생각이 있는데 “예수만 믿으면 행동이 거룩하여 지는가? 그러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믿는다고만 하면 되는가?”라는 아주 보편화되었지만 너무나 바보 같은 질문들을 마치 자신이 신앙적 투사라도 된 듯이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바보 같은 질문입니다. 정확히는 하나님도 신앙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고백입니다.


사람들의 그런 생각이 얼마나 바보 같은 이야기인지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우선은 기독교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말은 행위에서 제외합니다. 분명히 말과 행동은 그 구분점이 명확한 것이기는 하지만 믿는다고 ‘말만 하고 행동은 하지 않아도 되느냐?’라는 질문은 마치 말은 행위가 아닌 듯 말하는 것입니다. 말도 육신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세례문답이나 교회에 왔을 때 그 마음속에 믿지 않을 수 없는 분명한 고백이 없음에도 세례 문답에서 또 교회에서 그래야 한다고 하니 ‘예수님은 나의 구주’, ‘나는 죄인’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는 그것이 명철이나 되는 양 입에 붙이고 다니고 대표기도라도 하게 되면 그것을 수식어처럼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로마서에서 말씀하시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라고 크게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건 눈감고 아웅 하는 것입니다.


이는 ‘의(믿음)=말’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무도 이것에 대하여 또 생각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의는 근원과 같은 것이라서 말과 행동이 다 의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의가 거룩해야 말과 행동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은 행동이 아니라는 생각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 믿기만 하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기만 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느냐?’를 ‘말로만 믿는다고 하고 아무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되느냐?’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큰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우습게 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된다고 말하면, ‘예수를 믿기만 하고 아무 것도 행하지 않아도 되느냐?’고 묻는 것은 예수님은 행동이 없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하니 그것을 내 행동으로 보충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이 되신다고 믿는데 왜 <예수 + Something>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능력과 정체성을 믿지 않기에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그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시면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신 분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만으로 다 된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행동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고 주장하는 바보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 그것이 더 답답한 것입니다. 그럴 값이면 예수는 왜 믿는 것일까요? 그 무능한 예수를, 믿는데 아무런 행동도 자아내지 못하고 변화시키지 못하는 예수를 왜 믿는다고 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가진 이러한 어리석음과 어두움이 믿음과 행함에 대하여 오해하게 만듭니다. 베드로 사도가 거룩하여 지라고 말씀하셨는데 거룩하게 행동하려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어두움 때문입니다.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라고 하니 자기 행동 하나 하나를 거룩하게 채워가려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너나 나나 다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협하기를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무슨 궤변입니까?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구원 받지 못했다는 자백인 것입니다.


모든 것에 거룩하여 지는 유일한 방법은 그 존재 자체가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개가 아무리 사람 같아지려고 노력해도 안 됩니다. 남자가 여장을 하고 여자 노릇을 하거나 그 반대 역시 아무리 노력해도 결정적으로 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체성이 가진 본성을 넘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행위를 하나씩 거룩하게 하려면 평생을 다 해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존재가 거룩해지면 오히려 무슨 짓을 해도 거룩한 것입니다. 남자는 어떤 꼴로 살아도 항상 남자고, 여자는 어떤 모습으로 있어도 여자면 개는 어떤 순간도 항상 개인 것입니다.


이렇듯 존재가 거룩해지는 것은 그 마음, 곧 속사람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의로 의롭게 되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마음에 있는 의가 행위와 소유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존재, 곧 하나님이 내용이시고 자신은 형식이라는 이 정체성에 순종되어지면 소유와 행위를 드려 의롭게 되려는 모든 사람과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입니다.


그런 거룩함을 가진 사람은 그 행위가 모두 거룩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행위와 소유를 드려 의롭게 되려는 사람과 살아가는 모양이 동일해도 거룩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먹고 자고 일하면 때로 욕하고 싸우고 화를 내어도 거룩한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 화장실에 실수로 들어  갔다고 여자가 되지 않듯이, 속 심령이 거룩한 사람의 삶의 모양으로 인하여 그 속사람의 거룩함이 훼손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속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 속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리스도가 그 육신으로 표현되는데 세상 사람들이 우려하는 그런 모습으로 행하고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또 하나님의 의가 그렇게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가 속 심령이 되어 그 심령의 의로움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사람이 육신으로 부정한 짓을 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사람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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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은혜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능력으로 하지 못하는 것이 이루어지거나 얻어진 것, 또는 자신이 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에게 유익이 된 일과 같은 일들을 말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은혜도 같은 맥락입니다. 다만 그 얻어진 것, 수고하지 않고 얻어진 것이 어떤 범주이냐는 천지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며 바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입니다. 그런 생각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사업이 잘 되는 것이나 시험에 합격하는 것 그리고 일터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그것을 바라는 사람들은 그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성경을 행위로 지켜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열심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얻기 위하여 형식인 육신의 수고를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자신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면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이 블로그에서 끊임없이 경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은혜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여기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 세상과 육신과 그에 속한 일은 그렇게 표현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혜도 당연히 이에 관한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신과는 다른 거룩(구분된)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구분됨은 그 정체성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눈에 보이는 세계의 일을 자신들의 신께 구합니다. 설사 그 신의 이름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부른다고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호박에 줄 쳐서 수박이 되지 않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행위나 소유의 드림에 감동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오히려 화를 내시는 분이십니다. 남자가 비키니 선물을 받으면 좋아하겠습니까? 정체성에 맞는 대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그 뜻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하는 분이라는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는 어떤 행위에 관한 것이나, 눈에 보이는 세계인 육신과 세상의 일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는 우리의 존재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시는 것,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특히나 사람이란 존재는 그 스스로가 왜 존재하는지 알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자기 힘으로 인생을 얻은 것도 아닙니다. 부모로 인해 났으니 그것이 부모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부모는 어디 스스로 났습니까? 그렇듯 사람은 스스로 나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 존재의 의미도 스스로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 존재의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철학이다 과학이다 하는 것들이 다 그런 이유 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있어 가장 절실한 문제는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하지 않고 감추인 것이기에 사람들은 자기가 옳은 대로 그 의미를 정합니다. 인생을 돈에서 의미를 찾기도 하고, 가족에게서 찾기도 하고 사랑이나 성공에서 찾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 중에서 대부분의 사람에게 공감을 받는 것도 더러 있으나 대부분이 공감하는 것을 포함해서 그런 모든 것은 모두 존재하고 난 다음에 살면서 정한 것이지 존재하기 전제 존재하도록 한 목적은 아닌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은혜는 바로 이것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이 존재하기 전에 계획되고 정해진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알게 하는 것을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은혜의 근본적인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라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얻은 것이기에 자기 힘으로 인생에 들어 온 것이 아닌 사람으로서는 자신이 살게 된 이유를 스스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데 그것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야말로 은혜 중의 은혜이며 은혜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것을 설명하신 책이 성경이니 성경이 말씀하시는 은혜는 그것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성경은 우리가 널리 아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참고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법을 설명한 매뉴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설명한 책입니다. 이렇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이 되는 것을 설명한 책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난 사람은 이러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책이 성경입니다.


이 모든 것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한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결국 우리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말씀하시는 책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이 바로 우리 인생의 존재 목적이고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 인하여 알게 하셨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가져올 은혜(벧전 1:1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2,000년 전에 나타나셨는데, 베드로 사도의 때에도 이미 예수님께서 오셨다가 부활 승천 하셨는데 왜 새삼스레 ‘나타나실 때에’라는 가정 혹은 미래적인 표현을 하였을까? 이는 다시 생각해보면 아직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인지하고 깨닫는 그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고에 무엇을 찾으러 가서 쉽게 찾지 못하다가 나중에서야 찾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상황을 보면 창고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그 물건은 창고에 있었지만 찾는 이가 그것을 제대로 인지할 때 비로소 나타났다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세상을 만드시기 전부터 계셨지만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바로 인지할 때 그 때가 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바로 인지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는 우리가 육신의 유전으로 전해 받은 신앙, 곧 눈에 보이는 이 세계의 일에 관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눈에 보이는 이 세계를 나타나게 하신 이의 의를 아는 신앙으로 바뀌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작용하시는 이가 성령이고, 이 계획을 세우신 이가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도록 보이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자기 행위로 지켜내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 하고 그 의로움의 대가로 이 세상에서의 육신의 삶의 평안과 성공을 담보 받으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존재의 정체성을 보이신 분으로 만나는 그 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때인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을 만나는 때가 그 때라고 순종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나타나심이 예수님의 정체성으로 인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 자신에게 자신 스스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자기 존재의 의미로 다가 오는 그 때가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때이고 그것을 예수님이 나타나심으로 안다면 그 예수님의 나타나심이 자신에게 절대적인 은혜가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와 은혜의 때의 본질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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