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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를 통해서 성도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도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성도(너희)들은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사람’이고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져 거룩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 그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만 그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1장 21일절에서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말하는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지금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인가?’라는 반문을 작면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고 교회에 다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과 큰 교회(교회의 크기에 무관하게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는 교회)에 다니는 것은 좀 다른 문제입니다. 교회를 다니기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건물 지어 놓고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 있어야 교회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서로 위로하기 위하여 하나씩 모이다보니 교회가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교회입니다.


또 크게 다른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과 소망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미묘한 것 같지만 근본이 다른 것인데, 하나님이 믿음과 소망인 것과,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는 희망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은 아주 다른 것입니다. 마치 한국 전래 동화에 나오는 도끼를 잃어버린 착한 나무꾼의 이야기와 같은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소망이 되는 것, 결국 하나님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것을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야구 선수가 꿈(소망)이라는 아이의 마음은 자신이 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것인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이 소망이라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을 바라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같은 개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같은 능력을 가진 개체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용이 되고 자신은 형식이 되어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 그것이고, 아버지가 일하시니 예수님도 일하신다는 것은 그것입니다. 아버지의 의와 뜻과 영이 예수님의 내용이기에 그 영이 일하시니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소망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내용이 되고 자신은 그 내용을 표현하는 형식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삶이 되는 것을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없는 것을 바라는 소망도 아닙니다. 사람이 원래 그것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으니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는 순종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나, 아직은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게 된다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자기 운명이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당연히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내용은 이미 창세전에 뜻하신 것이므로 우리가 순종하여 받을 것인지 아닌지의 문제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고 제사보다 순종이 나은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큰 교회들 안에 속한 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고 소망하는 것이 이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소망이라는 것도 자신의 바라는 것을 이루어줄 수 있는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마치 구출을 기다리는 포로들에게 자국의 특수부대가 소망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들이 특수부대와 같은 전투력을 가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너희’라고 말하는 성도들은 위에 이야기한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하나가 되는 소망을 믿는 이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야 이 성경이 앞뒤가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이 그것이고, 예수님의 기도가 그래야 의미가 있으며, 주기도문도 그래야 의미가 있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17장에 말씀하신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단지 육신이 바라는 바를 이루어주시는 분으로 성경을 읽고 믿으며 행하려고 하면 우리가 오랫동안 겪고 있는 문제, 성경이 어렵고 이해되지 않으며 수고해도 얻지 못하는 것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이 하나님과 사도들이 말하는 성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무엇을 믿고 소망하는지가 이렇듯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은 그것을 가진 존재의 정체성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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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1:13-25) 창세전부터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2. 2. 09:56 Writer : 김홍덕

요한복음 8장에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아직 오십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는 질문을 했고 예수님은 자신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말씀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당연히 격분했고 예수님을 돌로 치려해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께 ‘창세전부터’ 함께 하였던 뜻을 이루신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알려지신 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간 개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시간 개념과는 다릅니다. 시계와 달력이 알려주는 객관적인 시간(이것을 크로노스라고 합니다.)이 아니라, 주관적인 시간(이것을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안에서 선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객관적 시간으로 본다고 해도 목적을 기준으로 보면 당연히 목적이 먼저지 목적이 나타난 바가 먼저는 아닙니다.


휴대전화는 만들어진 제품보다 전화기의 기능을 설계한 설계가 먼저이고 그 설계보다는 전화기의 목적 곧 전화를 하겠다는 요구사항이 먼저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이 이 법 아래에 있는 것은 이 세상이 바로 이 법(목적이 형식으로 나타나는 법)에 의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용하는 모든 것 역시 그 사용 목적이 먼저 정해지고 그에 따라 만들어집니다. 사람도 그런 본성을 가졌고, 그 본성에 따라 목적이 상실되면 폐기합니다. 목적이 먼저 있었고 그것이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계셨다는 것은 예수님은 세상이 창조되고 존재하는 목적이기도 하고 또한 그 목적과 뜻을 가지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뜻과 생각이 형식과 행동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그 성품과 존재를 표현하시겠다는 의와 뜻이 있었고 그것이 세상과 또 사람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창조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이 가장 온전하게 표현된 표상이자 기준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를 예수님은 첫 열매라고도 하고, 맏아들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바로 우리 모든 인생의 설계도라는 것입니다. 이를 알면 당연히 예수님이 창세전부터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다시 정리해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의와 뜻이 나타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비록 육신은 2,000여 년 전에 이 땅에 오셨지만 그것은 나타나신 것이 그 시점인 것이지 예수님이 가지신 정체성은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정체성으로 인하여 이 세상이 비롯되어진(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창세전부터 예수님이 계셨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우선 시간이라는 것을 항상 순차적이고 객관적으로만 보기 때문에 이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돌로 치려한 유대인이 그렇고, 오늘 대부분의 기성교회가 그렇습니다. 시간을 그렇게 본다는 것은 단지 시간만 그렇게 보는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시각과 안목의 본질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것에 기인합니다. 즉 형식으로 나타나는 내용을 본질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시간을 그렇게 순차적이고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을 가졌기에 나타난 것을 본질로 봅니다. 12시가 점심시간이 된 것은 점심을 먹어야 하는 명제가 12시로 표현된 것이지 12시 자체가 점심시간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렇듯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면 본질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존재의 목적을 보는 안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이 가장 사람에게 진노하시는 부분입니다. 목적을 보지 못하면 형식을 본질로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시간도 객관적인 것을 기준으로 보게 되고, 성경을 볼 때도 문자와 문장 그대로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하는 말로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이 같이 죽자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들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목적과 생각과 무엇보다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자면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어두움에 있는 것이고 맹인이며 사망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창세전부터 계셨다는 것, 이 하나를 믿는 것이 이만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막연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전능하고 능력이 있으며 영원한 분이니 그렇겠지 생각하면서 어물쩍 넘어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께서 창세전부터 계셨다는 말은 상식을 벗어난 말인데 이것을 아무런 이해 없이 그냥 믿으려고만 하면 그것이 맹신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맹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깨닫지 못하는 무지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창세전부터 계셨다는 것을 이해하고 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창조 이유이자 목적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창세전부터 계셨다는 것이나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다는 것과 같은 말씀을 이해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단지 격분할 뿐.


아울러 예수님께서 자신의 존재 목적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예수님을 빌어 이 세상에서 육신의 성공을 바라거나, 육신이 평안할수록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이 육신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되는 일에 사용되는 수고로움이 있을수록 감사하고 그런 수고로 인하여 인생이 쇠잔하여 지는 것을 감사와 영광으로 여기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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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구속할 수 있는 것은 점이 없고 흠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점과 흠은 외모나 삶의 모습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점이야 그렇다 치고 흠은 기준이 아주 모호합니다. 예를 들어 키(신장)가 얼마여야 육신적으로 최적이며, 몸무게는 어떠며 생긴 것은 또 어떻게 해야 흠이 없는 상태인지 정의 내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육신의 모양이나 행실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사람마다 모두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점과 흠이 없다고 표현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이 가진 기준으로 볼 때 점과 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에 대한 기준입니다. 종합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은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고도 오래 전에 이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다름이 아니라 처음 만드신 상태의 아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심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기로 하시고 만드신 사람이 아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바로 하나님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람이란 존재를 보면 하나님을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보면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목적이었습니다. 그 목적으로 만드신 아담을 보니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사람의 모습이 온전하고 온전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사람이 창조된 이후에 어떤 업그레이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그런 말씀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의 관점에서는 다르겠지만, 진화는 그 목적이 없는 일입니다. 목적을 가지고 진화했다면 적어도 사람은 존재하는 이유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존재의 목적과 의미도 없는 진화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여튼 우리 인생들은 창세기에서 창조된 모습이나 예수님의 오신 모습이나 오늘 우리의 모습이나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게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보시고 만족하심은 육신의 어떠함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온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에 아주 온전한 존재라는 것, 그러니까 이 육신은 점과 흠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물학적 육신은 물론이고 그 안에 있는 본성도. 


그리고 다음으로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육신이 하나님의 목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 그것이 육신으로 나오는 상태일 때 점과 흠이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하셨는데,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 곧 뜻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존재가 바로 점과 흠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육신을 부정하게 여깁니다. 외모도 외모지만 무엇보다 그 마음의 본성을 부정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그 둘은 모두 사람입니다. 어느 것도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콜라가 없는 병은 그냥 빈병이고, 콜라병에서 쏟아진 콜라는 먹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본성과 육신은 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육신을 부정하게 여기기 때문에 자꾸 뭔가를 합니다. 마음을 수련한다느니 명상을 해야 한다느니 참선을 해야 한다는 등이 다 그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이 가지신 뜻을 표현하기에 너무 온전한 우리 육신을 자기가 인생을 선택하지도 않은 주제에 그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흠과 점을 생각합니다. 그렇다보니 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인생의 본성이 없는 것이 점과 흠이 없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예수님은 점과 흠이 넘치는 분입니다. 넘치다 못해 죽임을 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점과 흠이 없다고 하셨다면 당연히 육신에 대한 기준, 세상이 사람에게 기대하는 기준, 사람의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기준과 안목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논리 같지만 이것은 육신인 자신에 대하여 이전과 전혀 다른 생명으로 보지 않는다면 절대로 동의될 수 없는 것입니다. 동의되고 순종되면 그렇게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점과 흠은 한 마디로 부정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예수님을 부정하게 여겼기에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부정하고 악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어린 양이라고 했고, 그 어린 양의 피 곧 희생이 하나님께서 무엇을 점 없고 흠 없는 것으로 여기시는지를 보인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신앙, 어떤 학문, 어떤 노력, 어떤 수련, 어떤 다짐이나 신념이 우리가 가진 인생의 본성을 억제하고 고치려는 노력이라면 참 가상하고 경건한 것 같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과 같은 가치관을 가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노력과 가치관은 육신을 가진 인생을 보는 관점에서 하나님과 절대적인 적대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절대적인 악입니다.


예수님께서 점과 흠이 없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목적과 뜻에 관해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육신을 부정하게 여길 수 없습니다. 육신의 본성을 이기려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행위와 외모가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그것으로 인하여 부정함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을 안다면 이 육신이 그 목적에 얼마나 온전한지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육신을 드려 보이셨습니다.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을 위하여 소비하는 것이지 보존하고 안위케 하는 것이 아니며, 이 육신은 강해지고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해져 가는 것으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수고를 하기에 너무 적합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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