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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가장 큰 견해의 차이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가 가진 이 육신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큽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도구로서 사람의 육신을 주셨는데 사람들은 육신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행동을 하는 도구로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을 소모품으로 주셨는데 사람들은 보존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 같이 다 늙고 약해져서 죽게 되는 소모품으로 지으셨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이 육신이 평안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모품으로 지으신 이가 그 소모품을 보존하는 것을 가치로 여길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사람과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을 보는 안목과 견해가 다릅니다. 그것은 사람이 육신을 보는 관점이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의미입니다.


이 문제는 신앙 안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벧전 1:24)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앞서 베드로 사도는 썩어질 것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말씀하고 있는데, 이어서 ‘그러므로’라고 이어서 육신은 풀과 같고 영광이 풀의 꽃과 같다고 하는 것은 육신은 곧 썩어질 것이요, 그것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거듭나지 않는다는 것은 육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육신이 소모품이라는 것만 알아도 많은 것을 달리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육신은 늙고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지 않습니다. 육신이 늙고 죽도록 지으신 이가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육신이 왜 그런 것인지에 대하여 “Why?‘ 라고 생각도 해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단지 ’삶이 그렇다.‘고 고착화 시키고 넘어가기만 합니다.


반대로 육신의 삶이란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을 무정의 용어처럼 여기는 인생들이 어이없게도 그 육신을 잘 보전하려고 갖은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 육신이 평안할수록 하나님께 또 자신이 믿는 신이 자신을 축복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늙고 병들어 죽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육신에 대하여 그렇게 여기는 그 자체가 어두움이고 성경이 말하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러 어두움과 어리석음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 육신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합니다. 육신의 복락이 하나님의 복이라 여기기에 육신의 수고를 드려 그 반대급부로서 육신의 평안을 얻으려고 신을 믿습니다. 그게 다른 신에게는 통할지 모릅니다. 그런 신이 없지만 가령 있다고 하면 사람을 자신이 만들지 않았는데 그 사람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드리려 하니 그것은 불로소득이 될 것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다릅니다. 그런 잡신들과는 완전히 구분되는 거룩함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거룩함의 근원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만드셨다는 것은 그 존재의 목적을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육신이란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무언가를 하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도루로서 지으셨는데 그것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의도와 다르게 인식하고 사용하며 목적과 다른 제사를 드리는데 하나님이 그것이 기쁘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복창 터질 일일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이 육신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신앙의 근간에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이 육신이 평안하게 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아는 이들은 육신의 평안을 위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것인지를 고민합니다. 그 고민과 노력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얻고 그 반대급부로서 육신의 삶에 대한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 바람이 이루어지면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여깁니다. 거듭난 생명을 하나님께서 돌보신다고 여깁니다. 즉 육신의 수고가 거듭남을 가져온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이 풀의 꽃과 같은 육신은 썩어질 것이며 그러하기에 이 육신으로는 거듭남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육신은 꽃이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그 식물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시들어지듯 이 육신도 하나님이 표현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에 살 동안 소비되고 쇠약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이 이 소비재인 육신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이란 앞선 글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예수님을 보고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본성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이 바로 거듭남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 온전한 거듭남을 받은 사람은 육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도 온전히 알아서 이 썩어질 육신은 우리에게 거듭남을 주는 도구가 아니라, 거듭난 생명을 표현하는 소비적 도구라는 것까지 온전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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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사도는 서신의 시작 부분에서 성도가 하나님의 택하심에 순종하여 부르심을 받아서 형제를 피차 사랑하게 되기까지의 생명의 단계를 설명함으로 성도들에게 문안하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여정이 참 그리스도의 생명이고, 그의 편지를 수신하는 이들은 그 여정에 합당한 사람이라는 것이기에 ‘너희’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너희’라는 것은 베드로 사도가 가진 의 안에서 <너와 나>의 관계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이러함을 거듭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벧전 1:23) 그리고 이 거듭남의 본질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거듭남은 썩어질 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거듭남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고, 말씀이 우리의 새 생명이 되는 거듭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이 거듭남은 재론의 여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면 우리가 거듭난 존재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성령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 정체성을 설명하고 있기에 성경이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성경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어떻게 나타난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생명이 되는 법(Do)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금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의 거듭남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고 하는 말씀의 뿌리와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 거듭남이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듭난다는 것은 단지 교회에 가서 세례문답에 요구된 답을 하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육신이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거듭남을 이야기하면서 이 거듭남이 썩어질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말씀하고 있는 이 ‘썩어질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이 육신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 썩어질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반대로 또 썩어질 육신으로는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모순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방향의 문제입니다.


썩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말씀에서 거듭남이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거듭남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육신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육신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자신을 거듭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리 문답에서 “YES!”라고 하는 것에서 구원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입으로 시인하면 된다는 말씀을 그렇게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겉모습을 본질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단백질로 변해서 우리 육신을 구성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육신의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즉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한 것이 되고,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이 표현되는 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양이라는 동물은 고양이라는 유전자가 가진 정보(의(義))대로 모양새를 가지게 되고 행동하게 되고 먹게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그런 본성이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라는 것은 단지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게 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가진 그런 생각은 천국에 가게 된 사람이니 그에 맞게 살아야 하는데 그 지침이 성경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동으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사후의 보답을 보전하기 위하여 행동을 성경대로 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우선 확정되지 않은 믿음이요, 방향이 반대인 신앙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이 썩지 않을 것으로 된 거듭남은 우리가 가진 이 썩어질 육신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육신은 다 썩어지는 것입니다. 육신은 풀과 꽃과 같다고 하심이 그것입니다. 육신의 행위로 거듭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세례문답 앞에서 말이라는 육신의 행위로 대답하고 그 대답과 같이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하여 육신으로 노력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바로 썩어질 육신으로 거듭나려는 신앙인 것입니다.


거듭남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정체성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속 심령에 있어 그것이 육신으로 표현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것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 그것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바로 거듭남이고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창세전에 세우신 하나님의 택정하심에 순종함에서 시작하여 형제를 피차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사람들의 정체성이고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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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오는 ‘사랑’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면 떠오르는 남녀 간의 사랑은 알다시피 에로스라고 합니다. 그리고 혈연 특히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범주를 스톨게라하고 친구간의 사랑을 필로에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아가페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앞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사랑 곧 우리가 아가페라고 알고 있는 사랑은 의미를 부여하고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단순하고 쉬운 것 같지만 일반적으로 아는 것과 같이 조건 없이 사랑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존재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존재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에게 어떤 존재라는 것만 정해지고 서로가 그것을 순종하는 관계가 되면 그 존재의 정체성이 자기의 본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유전자와 같이. 그것은 그 본성으로 사는 것을 스스로도 막을 방법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육신이 유전적으로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 태어나는데, 남자로 난 자는 자기가 원치 않아도 남자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처럼,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그 의미는 서로를 향하여 어떤 조건도 없는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내용과 형식>이라는 관점에서 봐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쇠로 만든 자동차의 모습은 사람이 이동하겠다는 목적이 형상화 된 것입니다. 이동이 그 내용이고 우리가 눈으로 보는 자동차가 형식입니다. 이것을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은 서로에게 절대적입니다. 자동차가 가지는 모든 안전 기능, 주행 기능 또 각종 기술은 나날이 발전합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이동’이라는 목적 곧 내용을 위함에서 벗어난 것이 없습니다. 더 안전한 이동, 더 편하고 빠른 이동을 제공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합니다. 그야말로 뜨겁게 사랑합니다. 간음하지도 않습니다. 차가 목적을 벗어나면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또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정한 내용 곧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도 어쩔 수 없게 만듭니다. 사람들에게 그 존재의 목적을 알게 하고 하나님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주시기까지 합니다. 그것은 주실 수밖에 없는 본성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예수님 역시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본성을 인하여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야말로 뜨겁게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어떻게 보면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사랑입니다. 예레미야가 스스로 다시는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고 해도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다고 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서의 관계로 하나가 되었을 때는 그 상호작용인 사랑을 금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위협이나 적신이나 칼이 이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는 그 사랑은 세상의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베드로 사도가 ‘피차 뜨겁게 사랑하라’고 하니 서로 사랑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뜨거움의 동력과 연료를 스스로 쥐어 짜 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얼마간은 가능하고 되는 것 같지만 이내 다 식어버립니다. 그것은 속에서 넘쳐나는 생수와 같이 생명의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얼마 가지 않아서 동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본성은 본성으로부터 안에서 밖으로 나타나기에 생명이 있기만 하면 언제나 발동되고, 언제까지나 나타나지만 자동차의 연료와 같이 밖에서 안으로 주입한 것을 이내 동이 나고 공급해야합니다. 서로 뜨겁게 사랑하기 한다는 것은 결국 사랑할 수밖에 없는 본성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생명의 본성,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사람의 존재 목적에 대한 순종이 있어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본성에서 우러나는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듯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의미가 되고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 삶의 목적과 내용이 되는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께서 그를 또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더할 나위 없는 뜨거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그를 위하여 주시고, 그는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하려고 마음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된 관계로부터 본성이 되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의 삶의 모습,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과 본성을 가진 사람은 형제, 곧 자신과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을 보면 피차 뜨겁게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서로를 볼 때 그 속에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본성을 보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본성이 나오는 것을 보는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음으로 피차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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