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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은 구원을 얻은 성도들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그 편지의 수신자들이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나 세상의 지식이나 학문이나 이방 신을 믿는 이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하여 그들을 위로하면서 한편으로 그들에게 구언에 이르라, 푯대를 향하여 가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사도들이 그렇게 권면한 대상들은 로마 교회에 들어와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며 물을 흐린 자들이나, 골로새 교회에 가서 세상 학문이 있는 사람이 교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과 같은 이들이 아닙니다. 사도들이 그런 자들을 위로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는 성도들에게 왜 구원을 이루어가라고 했을까요? 바울 사도는 아직 잡은 줄로 생각지 않는다고까지 했을까요? 이것은 단지 신앙은 노력하는 것이라는 말로 치부한다면 교회가 세례 문답 때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 되지 않을까요? 믿었으면 되었지, 그러면 구원을 받는 것이지,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일까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정의가 사실 모호합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다시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들을 하면서 실상은 늘 죄를 짓는 자신들의 모습이 상충되는 것에 대한 답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족의식 때에 손만 씻으면 된다고 하신 말씀과 같이 구원을 받았더라고 일상 속에서 지은 죄는 회개하여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점이 또 문제가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일생일대의 목표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인데 여기에 차질이 생긴 것입니다.(사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목적은 하나님을 빌어 세상에서 자기 하는 일과 자기 바람이 이루어지는 것에 있습니다만) 


이러한 문제는 돌고 돕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처럼 이야기하기를 인간은 연약하니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할 뿐이라고, 그래서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라고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했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거룩하고 온전하라고 하셨다는 것이 또 문제가 됩니다.


다행히(?) 이런 문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어서 당연히 의문이 들고 해결하여야 하는 문제임도 시간을 끌 수 있고 각종 변명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는 아닙니다. 교회에 가서 조금만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진정한 믿음과 신앙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런 허술함은 곧장 들통이 납니다. 그래서 질문하면 돌아오는 답은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대답이나 하려고 몇 년간 신학을 하는 것도 아주 웃기지만 문제는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임에도 무감각하다는 것입니다. 문둥병에 걸린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예외 없이 육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는 신앙으로 연결됩니다. 아니 사실 뿌리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으로 성경을 지켜내어 의롭게 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보니 구원과 죄의 문제에 있어 혼돈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을 받고 의로워졌는데 자기 육신은 여전히 죄를 짓고 있음을 보자니 혼돈스럽다는 것입니다. 의로움이란 행위의 깨끗함이라 생각하는 탓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썩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았다고 볼 수 없는 사도들 서신의 수신자인 온전한 성도들에게 구원을 이루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구원은 반복적으로 이루어가는 사건일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언젠가는 자기 구원의 확신에 금이 갈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해결하고 알아야 할 중요한 신앙의 이슈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신앙의 근간이 무엇이냐에 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고 이 블로그 전체를 통하여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경대로 행하지 못했던 죄를 용서받고 이제는 성경대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이 육신을 가진 존재는 하나님의 의와 뜻과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정체성이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 그것이 구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에 그 만든 자리로 회복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정체성의 문제이기에 그 정체성에 맞는 삶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나서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사도들이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난 자들이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일에 관하여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자기 삶의 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 시작이 있으려면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야 합니다. 결혼을 하면 아내의 몸속에 남편의 유전자가 들어가듯이.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장가드신다는 표현을 하시고 우리를 신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보이신 모습과 전하신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과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눈과 귀를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이는 씨가 뿌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씨를 자신의 운명으로 잘 받아들이면 생명이 싹트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잉태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에 우리 안에 거하시려고, 우리의 본성이 되시려고 만드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면 확실히 우리가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경을 보고서 자신의 존재 목적이 이 땅에서 평안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육신을 소비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인ㄴ정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행위가 끼어들 여지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나면 이제 그 생명이 육신을 통하여 표현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받은 구원, 곧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들이 말씀하시는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구원을 만들어 내거나 구원이 부족한 부분이 있으니 완성하라는 것이 아니라 회복된 정체성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아도 죄를 지으니 회개하면서 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데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웃기는 것이지.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행위에 대한 죄의식은 사람들이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생각 위에 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하나님 믿으면 행동은 아무렇게나 해도 되냐고 묻는 무식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속사람으로 있어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령이 속사람으로 있는데 그것이 표현되니 죄가 되더라는 말이 아니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간간이 성경은 예수님과 같이 되는 행동 매뉴얼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살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설명한 책이라고 이 블로그에서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구원의 섭리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순종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 정체성이 속사람의 생명이 되면 그 생명의 본성은 육신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생명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표현된 모습, 그것을 기록한 것이 바로 성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경을 보고서 그대로 행동해서 성경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 곧 인생의 본질을 자신의 것으로 순종하면 그것이 삶으로 표현될 때 어떤 모습인지를 보이신 책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고서 자기 인생의 본질을 알게 되는 것이 구원이고, 그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살아가게 되므로 그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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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2장에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십니다. 맥락은 간결하고 굵직굵직합니다. 그 말씀들의 내용을 아마도 ‘세상에서의 성도의 삶’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백성들이 세상에서 어떤 모양, 어떤 처우, 어떤 정체성을 받게 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부분이 많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는 이런 세상 속에 살아가는 육신을 가진 성도들에게 그런 모든 불의한 것을 버린 사람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세상과 구분되는 삶의 경계를 정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구분이 된다는 것이 곧 거룩함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을 금할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금하는 것은 노력하는 중에 어떤 때는 되고 어떤 때는 실패하는 그런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을 금한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삶이 아직 노력하는 삶이라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본 자로서 살아가는 것은 세상이 볼 때는 버린 돌과 같은 모습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면서 예수님도 그러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버린 돌이라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을 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서 볼 때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이 세상의 주요 성품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또한 세상을 그렇듯 경쟁에서 이겨내어야 선하고 의롭고 영광스런 존재가 되는 것인데,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을 하지 않는 것은 세상이 의로 여기는 경쟁을 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과 같이 성경이 금하는 것이나 또 마음으로 무엇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일이 많습니다. 살을 빼기 위하여 음식을 줄이려고 하는 것, 공부하기 위하여 잠을 줄이는 것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경험한 바와 같이 그런 것을 금하고 제어하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유일하다시피 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속사람 안에 이유가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본성은 경쟁하여 이겨 높은 곳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서로 시기하고 비방하고 없는데 있는 척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이 가진 본성입니다. 애굽의 피라미드가 그것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낮아져서 영광을 얻는 곳입니다. 그런 하나님 나라의 의가 자기 안에 있는데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을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을 그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 곧 세상과 다르게 낮아지는 법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경쟁의 이유가 없으므로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을 할 이유가 없으니 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을 금하려 노력하거나 기도하거나 각오를 다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세상 사람들이 경쟁하여 성공하려는 마음 대신에 속 심령으로 자리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맛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몸으로 지켜내려면 우리 안에 그럴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성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그런 본성이 자리하려면 무언가가 우리 안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남자의 유전자를 받아들이지 않은 처녀가 노력한다고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듯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에 들어오면 그것이 이 생명의 법에 의하여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본다는 것이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 안에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을 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경쟁할 이유가 없고 낮아지려는 마음이 본성이 되었는데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속심령이 바뀌면 사람들이 이를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알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본성으로 자리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눈에 띠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본성이 들어오는 주된 목적이고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자신들은 모두 위를 향하여 가는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들은 낮아지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니 이를 조롱하게 됩니다. 그리고 원치 않는 곳으로 끌고 갑니다. 조롱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이미 가치가 없다는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자기들 맘대로 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세상 사람들이 조롱하고 세상이 맘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 십자가에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아 놓고서는 ‘그렇게 세상의 경쟁을 하지 않고 역방향으로 낮아져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럼 하나님의 아들이니 우리가 주는 형벌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건축자가 볼 때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을 것 같아 보여서 하나님께서 성전의 모퉁이 돌로 쓸 돌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기에 낮은 자리로 가려는 본성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피라미드의 높은 곳으로 가는 것이 의로운 것이고 영광스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인하여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와 같이 그 본성이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면 그것을 자기 존재의 이유로 삼고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원래 만든 목적대로이므로 온전하고 의로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과 다른 방향으로 살게 됩니다. 높아지려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려고 하게 됩니다. 낮아지려는 사람에게 악독과 궤휼과 외식이 있을 리 없고 시기와 비방을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듯 이유가 없어지면 오히려 그러려고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흥미 없는 일을 즐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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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베드로 사도는 그의 첫 번째 서신 1장에서 성도들에게 문안하면서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성령 그리고 거듭남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깊이 있는 글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러한 표현은 믿음 안에서 시련을 겪는 참 성도들(‘너희’라 할 수 있는)에게 문안하고 위로하는 것인 동시에 그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어서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에게 구원에 이르도록 자랄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갓난아이들이 젖을 갈망하듯이 하나님의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듯 간절하게 사모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먼저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뭔가 하라는 의미로 와 닿습니다. 이때까지 육신의 행위로 의로워지려 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과는 뭔가 상이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3절에서 주의 자비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속사람이 바뀌어 거듭나므로 그 거듭난 생명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세계의 말씀입니다.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먹고 마시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거하면 성령께서 그 말씀을 잉태케 하셔서 생명이 되게 하시고 그 생명이 육신으로 표현되면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을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분명 ‘~~하라’는 말씀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그렇게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하나 단 하나의 계명조차도 평생을 온전히 지킨 사례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의 예에서도 그렇고, 예수님께서 형제를 보고 라가라 하는 자마다 살인한 것이라는 말씀이 그러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멈춰서 그 이유를 생각해보아야 정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으니 사람이 가진 능력과 한계와 문제를 다 아실 텐데, 그런 하나님께서 사람이 지키지 못할 것을 지키라고 하시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단지 자신의 노력 부족이라 여기며 끊임없이 노력만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넓은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전지전능하고 사랑이신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그리고 그런 본성을 가지고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이건 우리에게 노력을 요하시는 것이 아니구나!’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 모습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지를 본 사람들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음에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곳에는 구원도 거듭남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령한 젖, 곧 우리를 자라게 하는 신령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앞에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거듭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거듭 났다는 것은 이전과 다른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전에 되지 않던 것이 이제는 되는 세계고, 이전에는 목숨을 걸 정도 가치를 부여하던 것이 이제는 전혀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세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젖, 곧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자라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 아이가 젖을 사모함과 같이 사모하고 먹고 그 맛(가치와 능력과 본성)을 알게 되면 지금 2장 1-2절에서 권면하고 있는 모든 말씀들과 같이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이 없는 생명과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거듭남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도 이 권면을 노력으로 지켜내려고 하는 것도 예외가 아닙니다. 역시 거듭남이나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권면대로 살아갈 본성이 자기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이 권면들을 지켜내며 살아갈 본성이 없다는 것은 이 말씀이 생명으로 살아 있다고 여기는 생명이 그 사람 안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 안에 생명으로 거듭날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속사람을 보시는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여길 것이 없는 죽은 존재일 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주일마다 또 예배 때 마다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있다고. 하지만 저는 반문할 것입니다. ‘당신이 예수를 믿고 성경을 읽는 것이 누구에게 유익이냐?’고. 사람들은 자기가 육신의 삶에서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신다는 말씀을 믿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습니다. 그게 말씀을 위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단지 자기 소원을 위하여 값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그 거래의 값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값으로 성경을 읽고 성경을 지켜내려 하는 것입니다. 그게 공로고 회 칠한 무덤과 같은 노릇입니다.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속과 겉이 다르니 또한 거짓된 것입니다.


그렇듯 자기 행위를 성경이 말하는 대로 단속하고 제어하려는 생각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지 못한 탓입니다. 신령한 젖을 사모한 것이 아니라 자기 육신의 삶이 바라는 것을 사모하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지키는 값을 치르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렇기에 당연하게 성경을 지켜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이 약하여 그러니 노력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넘쳐나는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없다면 그것을 양산하는 존재로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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