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0

베드로 사도가 영혼을 거스르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한 상대, 곧 수신자이자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사람들은 베드로 사도가 성도로 인정하는 이들입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순종하므로 시작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피차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이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성도들을 일컬어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하면 어떤 땅을 밟고 지나가고 있어 그 땅 위에 있지만 그 땅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상황이나 형식이나 상태가 본질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우리를 나그네와 같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그네라는 것과 육신의 정욕은 어떤 관계일까? 베드로 사도는 나그네들에게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는 앞서 포스팅한 것과 같이 육신의 정욕이란 성욕이나 욕망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생을 부정하게 보는 것에서 비롯된 욕망입니다. 이는 육체의 정욕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육체가 바라는 것, 곧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요 껍데기가 바라는 것이 육체의 정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은 다 보이는 것인데 이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히 11장) 우리 육신의 삶은 나그네와 같이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형식, 이 육신이 바라는 바 육신의 정욕은 이 세상을 나그네와 같이 살아가는 인생들이 육신을 본질로 알고서 바라는 모든 것이 바로 육체의 정욕인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육신에 거하며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는 한 마디로 육신의 평안과 보존입니다. 신화, 영화, 만화와 같은 곳에서 끊임없이 사람이 영원히 사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바람의 하나입니다. 육신은 언제나 육신이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육신은 늘 육신이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육신이 평안하면 성공이라 말하고, 신을 믿고 있으면 육신의 평안은 곧 신의 축복이라 여깁니다.


또한 사람들은 육신을 움직이지 않고서 무엇인가를 해 낼수록 능력자가 됩니다. 오랫동안 걷지 않고서 순간 이동을 하거나 날거나 바다 위나 물속으로 속히 갈 수 있으면 능력자며 영웅이 됩니다. 영웅 곧 메시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를 영웅으로 안다는 것은 모든 이들이 그것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을 행하면 신의 능력을 입은 사람이라고 숭배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그 육신이 바라는 바가 있습니다. 육신이 영원하고 평안하며 육신을 사용하지 않아도 뜻하는 것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이 내용을 바꾸려는 그릇된 의도입니다. 육신은 내용을 인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내용이 원하는 것을 위하여 소비되는 것이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육신을 주신, 육신 안에 있는 의를 위하여, 또한 그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육신은 사용되고 소비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소비되어야 할 육신이 소비되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모든 것, 또 육신이 소비되지 않고 평안한 것을 하나님의 복으로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인 것입니다. 육신이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에게 너희는 나그네요 행인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분명하게 정의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나그네가 밟고 있는 땅이 자기 땅이 아니며, 자기와 의가 같은 나라가 아니듯 이 육신을 입고 있다고 육신의 바라는 바가 우리가 바라야 할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육신이 바라는 바, 나그네가 그 지나는 땅의 주인과 같이 행세하려는 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이란 그런 정체성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같이 신을 통하여 육신의 삶을 개선하고 육신이 평안해지고 성공하는 복을 받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것을 바라고 빌며 기도하고 믿는 곳이 십자가 걸어 놓은 교회가 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교회에 가서 육신의 복이나 세상의 성공과 같은 육신의 정욕을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해도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이 가진 정체성과 맞지 않기 때문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간혹 되는 것은 되지도 않는 것을 떼 쓸 정도의 열심을 인한 탓이거나, 하나님께서 아직 기회를 주셨기 때문일 뿐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교회에 가서 육신의 정욕을 구하니 거룩한 것을 더럽게 하는 짓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아니 성경이 말씀하시는 육체의 정욕을 온전히 알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육신이 바라는 바를 기도하고 바라는 것, 그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입니다. 육신의 본능이 아니라 육신이라는 이 형식이 가진 것, 이 형식을 보존하고 돋보이게 하려는 그것이 육신의 정욕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이 세상의 삶이라는 것이 나그네의 여정과 같이 본질이 아니기에 이것을 바라는 것과 늘 이겨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기려면 이길 수 있는 이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길 수밖에 없는 본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시는 것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베드로전서 2:11-12) 육신의 정욕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2. 27. 08:35 Writer : 김홍덕

육신의 정욕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육신이 가진 성적인 욕망, 그리고 육신이 가진 각종 욕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욕망들은 이기적인 행위로 나타나서 세상이 흔히 말하는 죄를 범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람이 가진 욕망을 부정한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욕망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절대적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생각과 판단에서 절대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떨어진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물을 위로 올리는 펌프의 존재도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때로 물이 자연적으로 위로 흐른다면 굳이 펌프가 필요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선하심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절대적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과 근원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 인간보다 선하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신(다른 신도 없지만)보다 선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결정, 모든 판단, 모든 이해에 앞서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은 절대적 명제로 놓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절대적으로 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 안에 주신 욕망과 본성들은 악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니 선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모두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이 가진 본성과 욕망을 부정한 것으로 보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게 여기고 믿지 않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사람이 가진 욕망이 선하니 그것을 맘대로 표현하고 살라고 말씀한다는 것인가?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욕망을 주셨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가 있는 것일 텐데 그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 하나님이 주신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욕망대로 아무 이성과 가리지 않고 잠자리를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주 제대로 하나님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 단지 우리 인생들 보다 더 선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가 곧 선이라는 이 절대적인 가이드를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가지고 있고,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성경에 기록한 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안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각종 본능 역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을 위함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어야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어디서 하나님이 주신 본성으로 자신이 가진 의를 이루려고 살다가 그 모습을 보고서 인생이 가진 본능을 부정하게 여기는 패역한 생각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욕망은 하나의 수단이고 표현 방법입니다. 욕망이라는 것 자체가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 욕망으로 무엇을 바라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욕망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라는 것이 있고, 그 바라는 것에 대한 욕망이 그것입니다. 욕망은 대상이 있는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성욕이 없다는 것은 이성을 봐도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것이지 이성에게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중이나 신부나 수녀는 사람에게 정욕이 있다는 것을 증거 할 뿐 자신들이 정욕을 이긴 성스러운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정말로 성욕이 없다면 사회 속에 같이 살아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고 그래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진 어떤 욕망은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 욕망이 우리 존재의 목적을 벗어날 때 부정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날카로운 칼이 부엌에서 요리하는데 사용하지 않고 범죄에 사용되는 것이 바로 부정한 것입니다. 칼이 날카롭다는 것 자체는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가진 성욕이나 욕심이나 열정도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 안에서, 목적대로 사용되면 그것은 선한 것입니다.


인생이 가진 욕심을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에 사용하면 선한 것이나 하나님을 표현하느라 소비하라고 주신 육신의 평안을 얻는 것을 욕심낼 때 부정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욕도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자로서 그 성품을 표현하는 것을 이어갈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과 같은 육신을 가진 사람을 낳기 위한 것을 위함이라면 선한 것이나, 자기 눈에 보이는 예쁜 여자를 취했으면 하는 욕심으로 사용하면 부정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나 성욕이나 그렇듯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용하면 선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과 다르게 사용하게 될 때 부정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바 영혼을 거스르는 육신의 정욕이 바로 이것입니다. 영혼을 거스른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라는 것은 본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의로움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선한 영혼, 정욕에 맞서고 세상과 맞서며 갈등하는 영혼은 바로 그런 영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영혼’ 역시 같은 것입니다. 즉 여기에 나오는 육신의 정욕 역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의로움에 맞서는 욕망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앞선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사람이 인생을 가지지 못한 부정한 존재로 보고서 그 가지지 못한 것을 채우려는 욕망으로 살 때 이를 육신의 정욕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잉ㄹ회용 육신을 주신 것은 이를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수고하고 소비하라고 주신 것인데 사람들은 육신을 평안하게 하고 남들보다 육신을 덜 사용하며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을 복이라 여기고 이를 추구하는 그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세계는 본질이 아니라고, 나타난 것은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육신의 눈이, 세상의 가치 기준에 의한 안목이 본질로 보고 귀하게 여기는 각양의 세상 가치, 물질과 권력과 같은 것을 가지는 것이 곧 영광이라고 여기는 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인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런 육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노라 하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어떻게 행동하면 될까 고민하고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김이 극에 달한 패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 신앙과 교회가 이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놀랍고도 심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거룩하다 여기는데 이것이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있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인생이 가진 육신의 본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본능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지으신 뜻대로 사용되면 선하고 선한 것입니다. 감사하고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주신 본능, 무엇보다 이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에 사용하지도 않고, 육신을 소비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을 가치고 여겨 탐하고 추구하며, 육신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보존하고 안락하게 하는 것을 복으로 여기고 성공이라 여기는 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인 것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이제 베드로 사도는 좀 실질적인 삶의 권면을 이어갑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분명한 안목이 없으면 사람들은 쉽게 성경이 권면하고 있는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것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물론 그 속 심령의 본성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 생명의 본성이 삶으로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무관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 생명의 장성함에 따라서는 장성함에 이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에게 이를 권면하는 이유도 그와 같습니다.


우선 사람이 사람이라는 존재를 어떤 존재로 보느냐의 문제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사람을 악하게 보는 사람들은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사람이란 부정한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절제하고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는 말 그대로 계속 노력한다는 것인데, 노력한다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이고 무엇보다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을 가졌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먼저 성경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지음 받은 목적을 떠났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의와 뜻을 다시 보이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인생이 가진 원래의 존재 목적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즉 정체성이 변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사람이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정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만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우리의 영혼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속 심령 곧 영혼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목적대로 회복된 영혼이라면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과 같이 온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것만이 온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거역하고 대적한다고 한다면 바로 이것에 대한 거역이고 대적인 것입니다. 사람 안에 있는 본성에 대한 대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진 본성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또한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인생을 만드신 목적과 의가 없으면 우리의 육신을 부정하게 보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의, 내용, 본질이 보이지 않는 안목을 가졌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게 됩니다. 그러면 그 눈에는 세상의 가치관, 문자로 된 법과 같은 것이 본질로 보이게 되기 때문에 도덕과 세상의 법과 무엇보다 세상의 가치를 본질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의 법과 가치는 모두 육신의 잘못을 제어하는 것을 중심으로 되어 있고, 사람들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들은 사람들이 원래 가지지 못한 것이라서 투쟁해서 가져야 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가지지 않는 자신을 패자로 죄인으로 부족한 것으로 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은 ‘금수저’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금수저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의와 본성을 가진 것임에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성경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 자신이 아직 가지지 못한 것, 또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가질 수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렇다는 것은 가지지 못한 죄인이라는 것이며 가지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으로 인지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하고 그렇게 되면 성경이 말하는 것이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으로 설명되는 관점을 가진 사람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신의 정욕이라는 것을 육신이 가진 본성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본성은 원래 가진 것인데 그 원래 상태로 보니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이 없고,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것도 없으니 그 본성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성경이 말씀하시는 본성은 다름 아니 그렇게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그 마음과 가치관과 안목인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를 부정하게 여기는 그 안목은 제법 심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볼 때 귀하게 여길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가지지 못한 사람의 모습, 가난한 목수의 아들 주제에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한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삶을 산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을 용서하지 못한 그 안목과 가치관이 바로 인생을 부정하게 보는 안목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육신의 부정함을 이기고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과 자신에게 없는 것을 취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심지어 하나님께 가서 그것을 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이란 것의 본질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인생이 가진 본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 영혼과 싸우거나 부정하게 한다면 그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듯 우리의 본성 역시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 출발이 잘못되면 성경의 모든 말씀을 행위 규범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싸우는 대상도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싸울 것은 우리 육신을 부정하게 보고, 육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져야하기에 없는 육신의 상황을 죄인으로 여기고 노력해야 하는 것으로 보는 그 본성, 그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인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것이 같이 붙어 있기도 한 것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