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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이야기하는 ‘선한 행실’은 당연히 하나님이 보실 때 선한 것이고 선한 행동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선의 기준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고, 행동이 수반된다는 것은 살았다는 것인데 그 살았다는 것의 개념 역시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이 의학적으로 살았다고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목적하신 상태일 때 산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지 않는 시계를 죽었다고 하는 것과 같이.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선한 선생이여~’라고 불렀다고 혼났습니다. 우리가 누구나 다 선하다고 여기는 예수님을 선하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고 반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한 분만 선하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건은 예수님은 선하지 않다는 것이냐? 그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에게 네가 어찌하여 무엇을 보고 선하다 악하다 말할 수 있는 기준을 가졌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한 분만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숨은 아담을 찾은 하나님과 아담의 대화 복제품인 사건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하나님의 기준 위에 있습니다. 그 기준은 목적에서 비롯됩니다. 제조 공장에서 생산되는 모든 제품은 규격을 가지고 있어 그 규격에 따라 생산되고 검사가 이루어지는데 그 규격은 설계 때 규정됩니다. 설계는 바로 목적한 바를 구현하는 과정입니다. 그와 같이 기준은 언제나 목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선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계시다면 그것은 오직 사람을 만드신 목적,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목적하심과 의로 인하여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 만드심이 어떠한지는 우리가 다 압니다. 누구나 사람은 죽을 것이며, 누구나 생각하는 것을 따르지 못하는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에서 벗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전에도 또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일면 참 부족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사람이 이런 모습이어야 하나님의 목적이 달성된다고 설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을 값이라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하나님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육신이 가진 큰 특징은 유한하다는 것과 약하다는 것입니다. 유한하다는 것은 1회용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소비재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목적을 위하여 소비되기 위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소비재는 사용될수록 약해지고 보잘 것 없어집니다. 그게 육신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것이 선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약해지는 것, 약하다는 것을 한 없이 감추고 극복하려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이길 수 없음에도 지으신 뜻과 반대로 향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소비하고 사용하라고 주신 육신을 보존하려고 부단히도 애를 씁니다. 그래서 몸이 편할수록 복을 받은 인생이라고 여깁니다. 몸을 덜 사용하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자리에 이른 것을 성공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악이라 하고 또 육신의 정욕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심과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모습이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가장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라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의 의가 형식으로 나타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아들 삼으시려 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에게 육신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표현할 형식으로 사용하라는 의미기 때문에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롬 8장) 


그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모습은 모든 인생의 본질적 존재 목적인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서 그 모습이 자기 정체성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고 순종하는 사람이 바로 선한 사람이 되고 그렇지 못한 모든 사람은 바로 육신의 정욕으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악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 아들이신 분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려 주었더니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힌 자들이 자신이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은 도무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없기에 하나님을 모독한다며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순종하셨습니다. 내려올 능력이 있는데 사명감 때문에 참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의 본성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그래서 그렇게 순종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아들이란 정체성은, 분명 자신이 의인인데 자기 선악의 기준으로 악인이라고 심판하는 자들의 심판 앞에서 순종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함이라고 또 선한 행실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더 가진 자들 곧 어떤 세계의 의인들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자기 가진 것을 기준으로 높아져 있는 것에 교훈이 됩니다.


교회에 가면 성경에 대하여 더 안다는 사람들, 영적으로 더 밝다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말로 가르치고 신분을 앞세워 리더가 되려 합니다.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삶을 사는 것에 육신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대접받고 보존 받는 것에 자신이 더 가진 것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들의 행태가 그렇고 금식기도 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세상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모습을 바로 육신의 정욕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한 행실이라는 것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자기 속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 말씀을 자기 육신을 소비해가며 표현하는 삶을 살아서 그것을 보는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서 자신을 반추하게 하고 돌이키게 하며, 그 모습에서 자기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삶을 살아내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육신을 소비해가는 것이 선한 행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들이라는 본성을 인하여 그렇게 하심과 같이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생명이 되었기에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게 되는 삶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어리석은 자들과 체휼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억지와 같이 보이지만 이것은 진정한 기쁨과 안식입니다. 존재가 존재의 목적대로 사는 것 이상의 평안과 영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렇게 살아보지 못했으면 말이라도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래 빈 깡통이 요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능력을 압니다. 예레미야가 더 이상을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 해도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 어쩔 수 없다고 한 것도 자기 안에 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심도 사명감이 아니라 생명이 이끄는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같은 영이 있으니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억지로, 마음먹고, 사명감으로 하는 이들은 다 노릇하는 자들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하심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심은 우리 육신 안에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육신을 소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온전한 의인이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과 같이 더 가지고 더 의로운 자가 그렇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그 육신을 수고하고 소비하므로 그 모습을 보는 이들이 수고하는 이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의로우심을 발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로 사람을 훈계하고, 자리와 권력으로 이끌려하고, 육신이 평안해지는 것을 사람들이 추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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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행실이라는 단어는 그리 어려운 단어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안에는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하지만 숨기려고 해서 비밀이 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니 비밀이 된 것입니다.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선한 것에 대한 기준이 어둡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대한 선의 기준은 당연히 하나님의 기준인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선하다는 기준으로 선한 행실을 정의하기 때문에 어두운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영화 속에서 악당들이 자기들의 일을 잘한 동료나 부하에게 잘했다고 하거나 착하다고 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들의 기준으로 볼 때 그런 것입니다. 그 세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선한 일은 당연히 하나님의 의와 세계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세계와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신 것으로, 또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기에 이것이 하나님의 기준에 의한 선한 행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비밀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진 선의 기준은 다양합니다. 도덕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과 같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 것은 대부분 하나님의 선한 행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선한 행실은 아닙니다. 오히려 착하게 보이나 악한 행동입니다. 간첩이 선한 일 한다고 선한 일이 아니듯, 하나님 만든 세상에서 사람들이 성경을 기웃거리고 또 서로 협의하였다고 착한 행실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한 행실은 선한 존재에게서 비롯될 때 선하게 보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한 존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존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존재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존재는 그 존재의 정체성에 맞는 형식과 행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한 행실이란 선한 존재에서 비롯된 행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이기 때문에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목적대로 사는 존재입니다. 정확히는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뜻하신 것은 자기 인생의 목적과 삶의 의미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살아 있다고 여기시고, 그런 존재를 선한 존재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한 존재의 모든 행실을 선한 행실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성경을 잘 지켜내면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 성경에서 이를 지키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지켜내는 방향성입니다. 성경을 읽고서 그것을 행위로 지켜내려고 하는 것은 밖에서 안을 바꾸어 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람의 육신도 안에서 밖으로 자라지 밖에서 당기거나 붙여서 자라는 것이 아니듯 생명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안에서 밖으로 자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겠다는 뜻으로 지으셨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자기 가진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육신과 삶을 소비하는 것이 자기 존재의 의미라는 것을 순종하고 감사하는 존재가 바로 선한 존재입니다. 이는 육신을 소비하고 수고하느라 종과 같이 낮아지는 존재입니다. 앞서 설명한 육신의 평안과 육신이 속한 세계에서의 성공을 추구하는 육신의 정욕과 맞서는 것이고 방향이 반대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한 행실이라는 것은 종과 같이 수고하고 육신을 소비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말로 사람을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감동시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사람에게 성경을 가지고 훈계하는 것이나, 설교로 사람을 가르치려들거나 심판하는 것은 육신의 정욕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니 교회나 사람이나 이 비밀을 알아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권면하는 성도들, 그들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예정하신 뜻을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깨끗한 영혼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에 순종하는 속 심령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선한 행실을 당부한다는 것은 행위로 선한 행동을 하라는 것이나, 성경을 행위로 지켜내라는 것이 아닌 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이 선한 행실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존재로서 그 존재의 본능과 행위를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이 선한 행위인 것이 바로 비밀입니다. 사람들은 더 알면 대접 받으려 합니다. 신학 공부 했다고 목사로 대우 받으려 하고, 설교를 많이 하면 더 많은 급여를 요구합니다. 언제부터 신앙이 학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백만 번을 물려 그것이 정당하다고 해도 선한 행실은 더 알기에 모르는 이들 앞에 죄인이 되고 모르는 이들이 자신의 삶을 보고 깨달을 수 있다고 육신의 수고를 기뻐하고 육신이 소비되는 것을 목적을 이루는 일로 감사하게 되는 것이 선한 행실인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더 가지면 그에 대한 대우를 받고 무엇보다 모르는 이들 위에서 가르치고 동냥하듯 던져주는 것을 선으로 여기고 당연한 것으로 아는 육체의 정욕에 속한 삶입니다. 놀랍게도 이것은 세상보다 신앙 안에서 더 합니다. 자신이 기도 좀 더했다면 자기 말을 들으라고 하고, 성경에 대하여 더 알면 자기 말대로 하고, 심지어 자신이 더 알고 밝기에 자신은 이래도 된다고 맘대로 높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단 교주들이 그것을 자명하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선한 행실, 깨끗한 영혼에서 비롯되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예정된 삶은 더 가졌기에 그것을 육신으로 성실하게 나타냅니다. 그런 삶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주장대로 끌려가기도 합니다. 분명하게 알고 있지만, 모르는 이가 자신이 잘 안다며 주장하는 것을 수용하면 헛수고와 같은 수고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육신이 평안해질수록 높고 복 받은 것이라 여기는 이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을 받았기에 대우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육신이 소비되지 않을수록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그것이 육신의 정욕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선한 행실을 육신으로 성경을 지키고 행하는 것이라고만 압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설명한 책입니다. 설명한다는 것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있는 사람의 삶이 이럴 것이라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 설명한 내용이 십자가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종과 같이 발을 씻기며,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할 수 있는 삶을 살아내는 것에 육신을 소비하고 종과 같이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속에 하나님의 성품이 없는데 종과 같이 살고 수고하고 심지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지만 하나님의 성품이 자기 안에 있어 그 깨끗하나 영혼이 본성이 되어 육신으로 나타나는 삶은 작은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영광스럽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 작은 것 하나를 얻는 것 하나에도 육신의 소비는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라고 우리에게 육신을 가진 삶을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한 행실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 하나고, 또 하나는 더 알고 가질수록 말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수고하고 더 종이 되고 더 낮아지며, 무엇보다 육신이 더 수고하고 소비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선한 행실의 비밀인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육신이 더 평안해지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에 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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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2:11-12) 선한 행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3. 3. 13:56 Writer : 김홍덕

베드로 사도는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하면서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간략하지만 사실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생각지도 못한 비밀들도 숨어 있습니다. 바로 교회가 세상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믿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어떤 의미인지까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앞서서 육신의 정욕이라는 것은 육신의 본능이 아니라 육신의 세계를 본질로 보고 그 본질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것이라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의 본성이 나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육신의 본성으로 하나님께서 표현하라고 한 하나님의 의는 표현하지 않고, 도구로 주신 육신을 목적으로 보고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것 그것이 육신의 정욕인 것입니다.


그런 문제는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목적과 의가 바로 내용이고 본질이며, 그 본질로 인하여, 그 본질을 이루고 나타내는 도구로서 주신 것이 바로 육신이란 형식인 것입니다. 이 주객이 전도된 상태가 바로 육신의 정욕으로 사는 삶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어지는 말씀 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을 이방인들은 악을 행하는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아들로서 사는 것을 이방인들은 악행이라 여긴다는 것입니다. 말이 금방은 이상해 보이지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를 생각하면 금방 이해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이 선하게 여기는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선하게 여기는 것의 기본은 높이 오를수록 선하고 정의로우며 영광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나란하게 육신의 행위를 선하게 하는 것인데 이는 보기에 그른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목적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사람 안에 있는 속사람이 하나님의 의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면 그 의로움이 행위로 나타나는 법이 하나님의 의며 법인데, 사람들은 그와 반대로 하면서 의롭다고 여기기에 선행이 하나님 앞에서 악하고 의미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듯 위로 올라가야 의롭고, 또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사람들은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을 악하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향이 반대인 것을 의롭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낮아지고 실패자가 되고 죄인이 되는 것을 의롭고 영광스럽게 여기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꼴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방인의 가치관입니다. 이 가치관은 지금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닌 것이 더욱 아쉽습니다. 교회에도 넘쳐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의 가치관, 이방인의 가치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위로 향한 그 가치관을 가진 이들에게 선한 행실을 보이므로 이방인들이 그 가던 길을 돌이켜서 뒤로 돌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게 하도록 하라고 베드로 사도가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듯 이방인들이 돌이킬 수 있는 선한 행실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더라도 베드로 사도가 제어하라고 말씀하시는 육신의 정욕은 성욕이나 욕망과 같은 인간이 가진 본성이 아니라, 육신이란 형식, 세상이라는 형식을 본질로 보고 그 본질을 영화롭게 보존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 그것을 추구하는 그 모든 시도와 바람과 욕망 그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가진 그 육신의 정욕을 성도들이 제어하므로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이 선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선과 악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기준입니다. 즉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사람이 가진 본성인 성욕이나 욕망이 악한 것이라면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은 말 그대로 실수하신 것이고 잘못 만든 것이며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절대적 가치는 하나님께서 선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부딪히는 것이 있다면 이는 그 가치관의 오류이지 하나님께 ‘왜?’ 라고 물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 그리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이 악하게 여기는 사람을 처형하는 형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악이 아니라 선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방향이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위로 올라가야 성공이라 여기는 세상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낮아지는 것을 성공과 영광으로 여기고, 겉을 변화시켜 속의 본성을 바꾸려 행위로 노력해야 한다는 세상과 달리 하나님의 생명의 법은 속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렇게 세상과 반대를 향하는 것이 바로 그 하나님의 깨끗한 영혼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그 깨끗함에 반하는 것이 육신의 정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봐도 성경이 말씀하시는 육신의 정욕은 육신이 평안해지고 높아지며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 대하여 반대로 행하므로 악하다 비난 받고 어리석다 조롱 받으며 심지어 십자가에 달리게 되기도 하는 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선한 행실인 것입니다.


이 선한 행실은 그 모양의 어떠함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행실을 어떤 이유로, 어떤 본성으로 인하여 나타내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본성, 곧 예수님께서 오셔서 전하시고 보이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 본성이 사람 안에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원하시는 선한 본성입니다. 


그리고 그 본성이 있으면 그 본성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모든 행실은 당연히 선한 행실인 것입니다. 개가 ‘야옹~’할 수 없듯,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본성이 속에 있는 사람이 악한 행실을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마음도 먹을 수 없고, 갈등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생명의 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법과 그 본성대로 될 때 선한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하나님 기준으로 선과 악이 구분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한 행실은 휴지 줍고 노숙자 밥 퍼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생명의 본성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것이 표현되는 모든 행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믿는다면 그렇게 하나님의 본성이 표현되면 모든 것에 실수 없이 선한 것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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