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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2:1-10) 이전과 다른 삶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2. 22. 07:34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고 새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었다고 살아나는 것이 부활이니 이전에는 하나님 앞에서 죽은 생명이었는데 이제는 산 생명이 되는 것이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왜 새로워지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의 삶을 거듭나게 또 새롭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는 곧 달라진 삶의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새롭게 한다는 것은 이전과는 다르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자신의 가치로 알았지만 하나님을 알고 나서는 그것은 가치 없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을 자신의 가치로 알고 살아가야 비로소 새롭게 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이나 알고 나서나 모두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복으로 알고, 육신의 복락을 복으로 안다면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데 새롭게 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회를 바라보는 정의감 역시 자신이 알던 도덕과 정의를 바탕으로 사회 정의를 부르짖다 하나님을 알고 나서는 성경을 인용해서 같은 사회에 단지 성경을 바탕으로 이전과 동일한 것을 요구하고 바란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어 새롭게 된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 새롭게 되었다면 사회 정의의 개념이 바뀔 때 비로소 하나님을 인하여 변화된 삶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이 착각 속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서 새롭게 되었다면 하나님을 알기 전에 귀하게 여긴 것이 이제는 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인데 오히려 더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도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하나님을 알고 나서도 동일하게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귀한 것인데 단지 그것이 이전에는 자신에게 영광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교묘함으로 회 칠을 한 상태로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니고 새롭게 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청소된 곳에 더 많은 귀신이 거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버린 돌을 이야기 했습니다. 건축자 곧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건축자가 볼 때는 쓸모없어 보이는 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어떤 모습인가 하는 것에 대한 많은 주장과 이론이 있는 중에 예수님께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와서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응당 지킬 것이라는 것들을 폐하시면서 초라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서는 건축자가 버리듯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과 같은 사람의 온전한 모습이었기에 하나님이 보실 때 그 모습은 살아 있고 생명이 있는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님을 살리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죽은 예수님을 살려야겠다고 마음을 먹고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으로 볼 때 본능적인 조치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바로 그 버린 돌이 이제는 귀하게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편지를 받는 고난을 받는 성도들에게 ‘너희도’ 이제는 그것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계를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성도들을 향해서 너희가 이제는 건축자가 버린 돌과 같은 예수님을 귀하게 여긴다고 말한다는 것은 베드로 사도가 그것을 위하게 여기는 사람이고, 또 버린 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을 알 수 있는 안목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버린 돌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예수님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시대의 사람들도 예수님을 귀하게 여깁니다.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찬송 부르는 것은 물론이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최소한 예수님을 성자라 부르며 존경하고 분류하는 정도로 귀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베드로 사도가 또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지금 교회들이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라서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세상 사람들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겨루는데 있어 더 유리한 조건을 가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기 전이나 믿은 다음이나 바라는 것은 동일하게 세상에서의 성공과 육신의 복락과 안위인데 단지 그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말한다고 이전과 다른 삶이 되었다고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전과 달라졌다면 달라지는 이유와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유와 목적이 다른데 동일한 것을 추구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썩은 고기를 먹이로 알던 늑대가 양으로 거듭났는데 계속 썩은 고기를 먹으려 한다면 그것이 거듭난 것입니까? 이전에는 포악하게 고기를 잡아먹었지만 이제는 부드럽고 순하게 고기를 먹는다고 달라진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듯 하나님을 믿어 새롭게 된다면 이전에 귀한 것이 이제는 귀하게 여기려 해도 귀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건축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버린 것은 모두가 높아지고 성공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세상에서 낮아지고 자신의 육신을 수고로움에 내어 주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소비하려 하는 것이 도무지 귀하지 않아서 버린 것입니다. 모두가 세상에서 육신의 삶이 대접 받고 육신이 더 평안해 지는 것은 높은 곳 곧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이라고 여기는데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서 창녀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생명으로 거듭났는데 교회를 더 크게 지으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서 교회에 올 것이라고 믿으며 또 기왕이면 큰 교회에 가는 것이 좋다고 여기는 것을 새롭게 거듭났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고 교회가 작다고 다른 것도 아닙니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렇게 되기를 꿈꾸니 다 큰 교회인 것입니다. 사람들의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세상에서 성공하면 자신의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 믿는 사람이나 또 그것을 보고 교회에 가겠다는 사람이나 예수 믿어서 달라진 것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 적어도 이전과 다르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사람은 이전에는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했다면 이제는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실패하고 초라한 사람이 되는 것이 오히려 귀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높은 곳에 오르려 했지만 이제는 낮아지고 자신의 육신을 수고하는 종의 자리에 두어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드리는 것이 귀한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전에는 높은 곳을 향하던 사람이 이제는 낮은 곳을 향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육신이 평안할수록 복을 받은 것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의가 아닌 세상의 가치를 의롭게 여기는 자들의 주장 앞에 자신이 죄인이 되어도 자신의 육신을 그리스도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드려 수고하는 낮은 자리에서 사는 사람이 될 때 비로소 이전과 다른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어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면 적어도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에 대한 부러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안에는 성공한 것을 볼 때 부러워하는 것이 있는데 이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는 것입니다. 야구라는 종목에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은 누가 우승한 것을 보면 좋겠다고 하겠지만 그건 자기 안에 욕망이 좋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그냥 그런 것을 세상이 좋다고 하니 말하는 립서비스일 뿐입니다. 세상의 성공이나 좋은 차와 집을 가진 친구나 사람을 볼 때 그 이상의 마음은 가지려 해도 가져지지 않는 본성이 되었을 때, 최소한 그 정도는 되어야 하나님을 믿는 사람, 이전과 전혀 다른 거듭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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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에게 돌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 돌에 새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돌로 쳐 죽이라는 형벌이 있습니다. 법에 의한 사형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돌이 유대인들에게 법이라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는 무관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전서를 비롯한 성경의 수신자가 유대인이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자신의 이야기로 읽는 수신자라면 역시 돌이라는 것이 율법과 같은 법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앞서 건축자의 버린 돌이 성전의 모퉁이돌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법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구원을 이루는 삶이라는 것이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어리석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삶을 성전의 주춧돌과 같이 여기신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은 베드로전서 전반에 흐르는 성도들의 삶이 받는 고난에 대한 위로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금식을 마치신 다음에 시험을 받으실 때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는 시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율법을 몸으로 지켜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시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귀의 요구사항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그대로 지켜내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은 돌을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돌을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은 돌에 새긴 율법을 사람이 그대로 소화해 내라는 것입니다. 즉 문자 그대로 지켜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는 유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율법은 그렇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돌을 떡으로 만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살 것이라고 답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람과 같이 표현한 것인데 이는 사람이 알 수 있도록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조금 더 설명을 하자면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말씀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람과 같이 의인화하여 표현한 것인데, 이는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 육신의 삶이 된 사람에게서 표현된 말과 삶을 볼 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돌에 새긴 율법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돌을 먹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지켜내는 것에 있어 그 방향이 말씀을 지켜 의롭게 된다는 <밖에서 안으로>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는 사람이 율법을 몸으로 지켜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돌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보여주는 것에 대하여 돌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지만 이는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된다는 방향이 아닙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산 돌>이라는 것입니다. 돌은 산 것이 아닌데 살아 있는 돌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고 생명이 있는 돌, 곧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뒤이어 나오는 부딪히는 돌과 대비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가 말한 돌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과 같이 대비가 되는 것입니다.


이 돌의 문제는 성경에서 아주 많이 그리고 중요하게 다루는 문제입니다. 바로 율법과 복음의 문제입니다. 돌은 율법이기도 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과 법을 상징이기도 합니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부딪히는 돌, 그리고 예수님을 시험하는 돌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과 같고, 예수님과 같이 육신이 되기도 하는 산 돌과 같은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돌의 차이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두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같은 말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보는 사람은 돌과 같이 보는 것입니다. 문자나 돌이나 물체이고 우리가 먹는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씀과 문자를 볼 때 그 의미하는 바, 그 뜻하는 바를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은 하나인데 이렇게 다른 두 가지 관점이 있는 것입니다.


이 차이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어떤 이에게는 부딪히고 걸림이 되고 반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반석이 된다고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의 행위로 지켜내려 하고 그로 인하여 의롭게 되려는 사람에게는 성경말씀이 늘 부딪히는 돌과 같이 다가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으로 율법을 지켜내는 것은 왼나사를 오른쪽으로 끼우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을 밖에서 안으로 지켜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란 그 속에서부터 밖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그 부모가 살을 붙여 몸을 불리고, 잡아 당겨서 키 큰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법이기 때문에 속에서부터 밖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단지 표현할 수 있는 말씀이 사람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는 사람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 바 된 것이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요한 일서 1장)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안에 이미지(형상)로 들어가서 그것에 순종할 때 성령이 역사하셔서 그것이 생명이 되어 거듭난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의 본성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것이 하나님 말씀의 법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람과 같이 표현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온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이 같은 육신을 가진 사람 안에 이미지로 들어가서 그것에 순종되고 동의 되므로 동일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육신으로 표현된 것을 기록하니 성경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을 기록하니 성경이 된 것이듯.


따라서 이 예수님의 법과 같이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고 그 말씀이 자신을 거듭난 생명이 되게 하여 그 말씀이 자기 육신으로 표현되는 삶을 사는 이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더할 나위 없는 반석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자신을 볼 때 자기가 아닌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본성이 되어 그것이 자기 육신으로 표현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그것을 보노라면 그것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하시고 보이신 것과 같다는 것을 이내 알게 될 것이니 그것을 보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가졌다는 것을 도무지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니 하나님의 말씀이 반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1편이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의 모습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속에서 생수가 넘치는 사람이고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의 모습입니다. 자기 안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본성을 자신도 어쩔 수 없어 그렇게 살아가는데 이것을 부인할 법은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 세계는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비밀과 같은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으로 지켜내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와 법과는 반대로 살아가니 하나님의 말씀이 시시때때로 걸림이 될 것입니다. 살면서 무엇 하나할 때 마다 성경 말씀이 생각나서 ‘이래도 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그렇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말씀이 부딪히는 돌이 된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늘 교회에 가서 묻는 질문이 무엇을 해도(Do) 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행동 할 때마다 성경 말씀이 걸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돌에 새겨졌지만 돌과 같이 경직되고 생명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돌에 새겼던 물에 새겼던 그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자기 것으로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돌에 새겨져도 살아 있는 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씀을 육신으로 지켜내려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이래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달고 사는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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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글에서 구원을 이루어 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이 자기 생명과 삶의 본성이 되었기에 그 본성을 육신으로 표현해가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방향이 반대입니다. 본성이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과 성경을 육신으로 지켜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된다는 밖에서 안으로의 방향이니 완전한 반대인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성경을 대하는 관점의 차이이기도 한 것입니다. 성경을 지켜서 행하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 된다고 여기는 것은 성경을 매뉴얼로 아는 것이지만,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어 그 본성으로 살 수밖에 없는 삶이 된 사람에게 성경은 자신의 일기와 같은 자기 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이 블로그의 제목이 Bible become My Story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이 구원을 이루라는 권면을 하면서 돌 이야기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돌은 곧 율법입니다. 산 돌이라는 것은 살아 있는 말씀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같은 돌인데 어떤 이들에게는 산 돌이 아니라 버리는 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돌은 살아 있고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는 아주 좋은 돌인데 말입니다. 그 돌은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입니다. 돌이 말씀이니 산 돌이라고 함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살아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돌은 세상의 건축자, 곧 세상에서 이기고 이겨서 높은 곳에 이르고자 하는 이들이 볼 때는 전혀 쓸모없는 돌이자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겨서 높이 올라가야 의로운 것인데 낮아져야 한다고 하니 당연히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버린 돌을 성전의 주춧돌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의 심령을 가진 이들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건축자가 하나님이 보실 때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는 돌, 곧 말씀을 버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이라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여기기에 눈에 보이는 육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때에 의롭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치관은 어떤 공로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지에 따라 신앙의 좋고 나쁨이 결정됩니다. 그런 가치관의 결정체가 바로 우리가 오늘날 교회에 가서 항상 듣는 말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가치관을 지닌 사람에게 낮아지고,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여기지 않는 것은 쓸모없기에 버려야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조롱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가치관이 피라미드의 위로 가는 것이 옳다고 말할 때에 낮은 곳으로 가서 자기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느라 수고하고 종 되는 모습으로 살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아들의 삶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사렛에서 날 수 없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으로 볼 때 ‘저렇게 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겠는가?’ 싶은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들이 세상에서 조롱을 받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날 많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과 앞서 이야기한 비난은 전혀 다른 것인데 같은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비난을 받는 것은 세상 사람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나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라는 같은 파이를 두고서 다투고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것을 두고서 사실 둘 다 동일하게 육신의 수고로 성공하려고 하는 것 까지 같은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더 선하게 경쟁하고 있다고 하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성공으로 이끄시는 은혜를 베푼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교회에서도 늘 듣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성공해서 세상에서 잘 살게 되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서 교회로 온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좇고 있는 것이나 교회가 좇고 있는 것이 같은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도우시기 때문에 그것을 쉽게 얻을 것이며 세상의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 자신들도 교회에 올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밑장을 까고 보니 교회의 사람들이 늘 반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들 일하러 갈 때 교회에 간다고 빠지고, 같이 술 먹자고 하면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합니다. 같은 것을 추구하면서 같이 놀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세상 경건한 척 하지만 교회를 세습하고 또 목사가 성범죄를 저지르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세상이 간섭할 것이 아니라고 말하니 욕을 먹는 것입니다. 


또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한 장에 뛰어 들어서는 세금도 꼬박꼬박 내는데 세금마저 내지 않겠다고 하고, 교회가 세상적 기준에서 볼 때 문제가 있다고 지적을 하면 하나님의 일을 세상이 간섭하는 마귀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라는 같은 것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을 빌미로 각종 특혜를 스스로 누리려 하니 욕을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화룡점정으로 그런 비난을 세상이 하나님 아들을 비난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건축자, 곧 세상은 높은 곳이 성공이라는 세상이라는 건축자는 낮아지려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의인임에도 죄인들 앞에서 죄인이 되는 그 바보 같은 하나님 아들의 본성을 가진 사람을 볼 때 세상에서 도무지 성공할 수 없는 쓸모없는 돌로 여기기에 버리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것이 의로운 것이라며 스스로 그 자리로 가니 바보 같다고 비난하고, 그렇게 해서 세상을 이길 수 있겠느냐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와 보라고 하던 그 안목으로.


건축자의 버린 돌이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었다는 것은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을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로 알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삶의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 모두가 바로 산 돌이자 세상의 건축자가 볼 때는 버려야 할 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뜻이 한 사람 안에서 생명의 본성이 되어 그것이 표현되면 하나님의 아들이자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은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야 할 것으로 심판하는 그 심판을 받아서 십자가에 달리심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에 의하여 죄인이 되는 어이없는 것을 자기 운명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높은 곳에 이르러야 성공하고 영광이며 의롭다고 여기는 건축자가 볼 때 그것은 어이없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것은 진정으로 산 돌이기에 죽음에 둘 수 없어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이고 그 부활이 바로 성전의 주춧돌이 된다는 것이 이 말씀의 본질적인 내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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