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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씀하시는 영원함은 사실 우리에게 있어 가늠하기 힘든 것일 수 있습니다. 앞선 글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유한함 안에서 무한함을 이해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에 있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과 같이 이해하는 생각의 방식 때문입니다. 우리의 유한한 존재성이 그 유한함을 극복하고서 무한한 존재가 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세 무궁토록 영원하다는 것은 성경이 늘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원하려면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절대적인 조건이 있습니다. 이는 영원함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절대적인 속성이고 능력이므로 그 능력에 의지할 때 영원함을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 역시 당연히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영원함의 개념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진 영원함에 대한 생각은 사람이 가진 유한함을 벗어나서 하나님과 동일하게 영원함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과 개념은 우리의 삶의 아주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근래에 들어서 많은 Time Sleep 드라마들이 방영되고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어떤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를 대변합니다. 유한함인 시간을 넘어선 과거나 미래에도 현재의 기억과 사고방식과 문화와 심지어 사건들이 이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함은 현재의 연장선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끊어질 선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다시 이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듭남과 거리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존재로 다시 나는 것을 거듭났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다시 났다는 표현을 큰 변화를 보인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은 거듭 났다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존재로 날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사도 바울은 거듭남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현재의 기억과 생각과 문화와 안목을 가진 상태의 연장이 아니라 영원함을 가진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현재 상태의 연속성을 영원이라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안목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이 영원하게 되는 것이 영원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영원을 단지 시간의 개념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원은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존재의 개념입니다. 영원함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면 영원은 따라 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세세무궁토록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고, 앞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이 거듭남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영원이란 정체성의 개념이지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앞선 글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존재이고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존재의 정체성으로 거듭나서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하나의 a christ로 살아갈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한 명의 그리스도로서 가진 육신이라는 형식의 장막을 벗고 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그 본질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인데 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영원한 것이기에 우리가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영원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라는 장막을 입고 계셨다가 육신이 십자가에 달리시니 그 육신은 죽었으나 그로 인하여 그 안에 있던 그리스도의 정체성인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난 것입니다. 따라서 그 드러난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하나님이 보실 때 유일하게 생명이 있는 것이기에 부활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드러났다는 것은 영원함도 함께 드러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원하심의 기준에서 볼 때 살아 있고 생명인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드러났기에 이의 부활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 표현된 형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기에 그 영원함이 그릇과 같고 형식과 같은 우리 육신의 삶 안에 생명의 본성으로 자리하게 되면 이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듭난 것입니다. 겉모양은 같지만 그 삶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자고 일어나며 늘 사용하는 말의 뉘앙스도 동일하나 그 가진 모든 형식이 지향하고 표현하는 목적이 이전에는 육신을 위한 것이었는데 거듭나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거듭나서 자기 육신의 일이 더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겉과 속이 반대이고 방향도 반대인 생각입니다. 반대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반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함은 우리가 가진 이 형식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본질이 되므로 우리가 전혀 다른 생명으로 거듭나고, 그 거듭남은 이 육신을 보존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육신을 다 소비하기까지 속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을 표현하고 나면 형식은 소비되어 썩어지나 그로 인하여 그 속에 있던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나고, 그것만 남게 되므로 우리가 영원에 속하게 되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영원의 의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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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진 이 육신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두 가지, 현실과 말씀 사이에 간격이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같은 말씀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하나가 아니라면 우리에게 희망이 없고, 한편으로 이 간격이 크게 보이면 보일수록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선 글에서 사람이 자신이 가진 육신의 삶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한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육신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육신을 자신이 의로워지는 도구로 여기고 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있어 그것을 표현하는 의로운 도구로서 육신을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은 스스로가 의롭다고 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신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의) 것에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가능성을 두신 것입니다. 사람이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오는 것을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의가 그 속 심령에 거하게 되면 그것을 표현하는 것에는 나무랄 데 없는 온전한 모습이 바로 이 육신을 가진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의 육신은 유한하나 하나님은 영원을 말씀하시고, 사람은 유한하기에 의로워지는 일을 유한함 속에서 해결해야할 촉박한 문제로 보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육신을 원래 의롭게 만드셨기에 그 의로운 정체성이 영원하다고 여기시는 차이가 겹쳐져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이 육신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심에도 그것을 잘 믿지 않고 부정하게 여기는 것만큼, 하나님은 우리의 정체성이 영원하다고 하시나 우리가 눈에 보이는 세계가 무한하므로 이를 잘 믿지 않는 것은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괴리는 신앙의 근간이기도 합니다만 상당히 의문스러운 것입니다. 아니 의문스러워야 합니다. 우리는 유한한 삶을 살면서 영원을 논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는 유한함이 한스럽고 아쉬워서 영원을 보상이라도 받으려 꿈을 꾸듯이 소망하는 것입니다. 유한함에 지쳐 영원이 큰 상급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원함은 단지 우리 인생이 가진 유한함 속에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을 잘 행하므로 그 성과에 따라 주시는 보상으로서의 영원이 아닙니다. 사실 영원함은 우리의 유한함과 무관하게 항상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기 전에도 세상은 있었고, 또 죽고 난 다음에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이 있는데 우리가 태어나서 세상과 하나로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영원함 역시 단지 우리가 그 영원함에 합당하나 존재로서 하나가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유한한 인생에게 영원함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를 언어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어와 일부 언어에 있는 관사가 그것을 설명하기에 너무 적합합니다. the와 a(an)가 그것입니다. the Apple은 형상은 없지만 사과라는 모든 것을 총칭합니다. 그리고 영원합니다. 반대로 an apple은 형상이 있지만 유한합니다. 한 마디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듯 썩어질 것입니다.


하나의 사과가 열매로 나게 되면 the Apple의 세계에 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an apple은 사람에게 먹여지든 짐승에게 먹여지든 아니면 그냥 썩어 없어지든 어쨌든 사과로 났기에 영원히 사과인 것입니다. 반면에 an apple은 자신이 썩어짐으로 또 소비되므로 사과의 세계를 표현합니다. 그렇게 사과의 유전자를 가지고 사과의 정체성을 표현하므로 그 사과는 비록 먹혀져서 소비되어도 사과로서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함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the Christ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같습니다. 마치 10세기에도 사과는 사과였고, 앞으로 30세기가 되어도 사과는 사과인 것과 같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을 보고서 그것이 나의 운명이라는 것을 깨닫고 순종할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유전자로서 그리스도가 되심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나서 그리스도(a christ)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치 사과 열매가 사과라는 정체성을 표현하고 소비되듯 우리 육신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에 소비하고 썩어져가는 것이 우리의 운명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비밀입니다. 거듭났기에 육신을 썩어지기까지 소비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썩어질 육신의 행위나 소유의 드림으로 거듭나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향이 완전히 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육신을 드리심이 바로 우리가 육신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육신을 어떤 도구로 쓸 것인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육신은 거듭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거듭난 생명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육신 안에 그 육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의대로 이끄는 유전자와 같은 본성과 생명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며,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하나의 사과 알이 먹여지나 영원히 사과의 정체성을 가졌듯, 우리 이 유한하고 썩어질 육신이 비록 소비되고 약해지고 썩어지나 하나님의 의의 말씀이 우리의 육신으로 표현될 때, 그렇게 소비하여 우리의 삶을 살아낼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하심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에 우리가 영원함을 얻는 비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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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가장 큰 견해의 차이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가 가진 이 육신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큽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도구로서 사람의 육신을 주셨는데 사람들은 육신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행동을 하는 도구로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을 소모품으로 주셨는데 사람들은 보존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 같이 다 늙고 약해져서 죽게 되는 소모품으로 지으셨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이 육신이 평안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모품으로 지으신 이가 그 소모품을 보존하는 것을 가치로 여길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사람과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을 보는 안목과 견해가 다릅니다. 그것은 사람이 육신을 보는 관점이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의미입니다.


이 문제는 신앙 안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벧전 1:24)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앞서 베드로 사도는 썩어질 것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말씀하고 있는데, 이어서 ‘그러므로’라고 이어서 육신은 풀과 같고 영광이 풀의 꽃과 같다고 하는 것은 육신은 곧 썩어질 것이요, 그것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거듭나지 않는다는 것은 육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육신이 소모품이라는 것만 알아도 많은 것을 달리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육신은 늙고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지 않습니다. 육신이 늙고 죽도록 지으신 이가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육신이 왜 그런 것인지에 대하여 “Why?‘ 라고 생각도 해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단지 ’삶이 그렇다.‘고 고착화 시키고 넘어가기만 합니다.


반대로 육신의 삶이란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을 무정의 용어처럼 여기는 인생들이 어이없게도 그 육신을 잘 보전하려고 갖은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 육신이 평안할수록 하나님께 또 자신이 믿는 신이 자신을 축복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늙고 병들어 죽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육신에 대하여 그렇게 여기는 그 자체가 어두움이고 성경이 말하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러 어두움과 어리석음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 육신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합니다. 육신의 복락이 하나님의 복이라 여기기에 육신의 수고를 드려 그 반대급부로서 육신의 평안을 얻으려고 신을 믿습니다. 그게 다른 신에게는 통할지 모릅니다. 그런 신이 없지만 가령 있다고 하면 사람을 자신이 만들지 않았는데 그 사람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드리려 하니 그것은 불로소득이 될 것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다릅니다. 그런 잡신들과는 완전히 구분되는 거룩함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거룩함의 근원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만드셨다는 것은 그 존재의 목적을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육신이란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무언가를 하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도루로서 지으셨는데 그것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의도와 다르게 인식하고 사용하며 목적과 다른 제사를 드리는데 하나님이 그것이 기쁘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복창 터질 일일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이 육신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신앙의 근간에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이 육신이 평안하게 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아는 이들은 육신의 평안을 위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것인지를 고민합니다. 그 고민과 노력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얻고 그 반대급부로서 육신의 삶에 대한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 바람이 이루어지면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여깁니다. 거듭난 생명을 하나님께서 돌보신다고 여깁니다. 즉 육신의 수고가 거듭남을 가져온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이 풀의 꽃과 같은 육신은 썩어질 것이며 그러하기에 이 육신으로는 거듭남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육신은 꽃이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그 식물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시들어지듯 이 육신도 하나님이 표현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에 살 동안 소비되고 쇠약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이 이 소비재인 육신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이란 앞선 글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예수님을 보고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본성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이 바로 거듭남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 온전한 거듭남을 받은 사람은 육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도 온전히 알아서 이 썩어질 육신은 우리에게 거듭남을 주는 도구가 아니라, 거듭난 생명을 표현하는 소비적 도구라는 것까지 온전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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