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1

흔히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물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육신의 삶의 바람을 신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종교의 범주 이상의 것이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사랑이라고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가야합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흔하고 대부분의 경우 정의를 내릴 필요도 없는 말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관념 그대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잘못되었다기보다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하면 희생하고 헌신하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남을 위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수고하여 밥을 지어주는 것에서 남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는 것까지 다양합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의 개념은 모두 표현된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여기는 사람의 삶의 모습은 그 사람 안에서 표현된 것이기에 사랑의 본질은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의 모든 말과 행동이 결국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의로움의 표현입니다. 무엇을 선하고 의롭게 여기는지가 나타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자기가 의롭게 여기는 대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때로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는 대로 행하지 못하면 양심의 가책을 받아 괴로워하는 것이 사람이라는 존재의 본성입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행동과 말씀은 다 하나님의 의로움에 입각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것도 신념이나 사명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가진 본성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보이신 사랑 역시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하나님의 의에서 비롯된 것이지, 인류애나 혈연 혹은 다른 종교나 가르침에 의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단순한 인류애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지신 뜻이 표현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시려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 말씀이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사람인 너와 나에게 표현되고, 또 서로가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므로 사랑이 표현되었고, 그와 마찬가지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사람이 또한 서로에게 그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의를 나타낼 때 그것이 형제를 사랑하고, 지체를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되려면 어떤 것도 필요 없고 오직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 행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서 표현한 사랑의 모습과 같거나 더 숭고해도 사랑이라 하지 않는다고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했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서 알 수 있기도 합니다. 사람이 이야기하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모든 것에 있어 가장 먼저 하나님의 의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지신 뜻과 생각과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바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의가 바로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과 그 속에 속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니 사랑이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의미입니다. 사랑은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의미가 있기에 수고하고 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남자가 또 여자가 반씩 있는데 그 중에 단 한 사람이 자신에게 여자로서 또 남자로서 의미가 있어질 때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고 결혼하는 것입니다. 의미 없는 이와 사랑의 표현인 육체적인 행위를 하면 불륜이고 매춘이 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의미가 되신다는 것, 그 의를 표현하시는 사랑을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의미를 두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실 뿐 아니라 그 창조 목적은 또한 사람에게 의미를 부여하셨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 의미는 다름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 형식과 나타난 것이 없는 그림자도 없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형식이 간절하셨기에 만드신 존재가 바로 사람과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하나님께 사람은 피조물이기도 하지만 또한 간절한 존재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 간절함이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와 같은 말씀들로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사람들과 의도하신 관계를 분명하고 간절하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관계를 바로 잡고 온전하게 하시기 위하여 아들도 제물로 드릴 정도로 간절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 역시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신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적인 의미 그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든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알게 하신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려면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있어야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날 것이니 그제야 육신을 가진 인생이 의미가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표현될 때, 그렇게 표현되는 것 그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표현된 것을 보고 형제가 또 지체가 또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으로 만드신 의와 뜻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것을 알게 되었듯, 하나님의 의가 그 속에 있는 사람에게서 그 속에 있는 것이 육신으로 표현될 때 그것을 보고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따라서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 형제를 사랑하려면 먼저 그 사람에 그 육신으로 표현해 낼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 의는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에게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고, 특히 사람에게 자기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이 주신 육신을 소비하여 표현할 때 그것을 보고 또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게 되도록 하는 것, 그럴 수밖에 없는 본성으로 사는 삶, 그것이 바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앞서 진리와 진실은 의도된 존재가 되어 그 존재로서 가진 본성대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리는 어떤 존재에 대한 존재의 목적이고, 진실은 그 존재의 삶과 행함이 그 존재의 존재 목적 곧 정체성대로인 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진리는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이고 진실은 그 목적이 사람의 본성이 되어 그것이 표현될 때 진실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거짓이 그렇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거짓은 행위와 말의 일치나 상태와 말의 일치가 어긋나게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거짓은 노릇과 외식에 관한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에 맞지 않는 표현 곧 행동과 말과 생각입니다. 자신은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존재인데 율법을 지켜서(야) 의롭게 된다고 여기는 것이 거짓입니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지키려는 모든 것이 다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늘 우리에게 자신의 죄를 시인하면 용서하신다고 하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살지 않았음을 고백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상태, 곧 하나님의 의와 뜻을 알지 못하여 인생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기에 그 고백은 온전하고 진실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인생이 존재하는 목적을 안다면 그 사람의 삶은 모든 순간 진실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그 사람의 존재 목적이 되면 그 사람의 모든 말과 행동과 생각이 다 진실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임이 분명한데도 사람들은 이것을 잘 믿지 않습니다. 사람이 생각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하면 된다는 말이냐고 반문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인 사람이 죄를 마구 짓는 그런 사람이 된다는 말 밖에 되지 않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영혼을 깨끗게 하는 진리를 가진 성도들이 형제를 거짓 없이 사랑한다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자기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로 받은 사람은 진리로 영혼이 깨끗해진 사람은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 이르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만 그 속에 있으면 된다는 말씀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행위로 의롭게 되려 하며, 교리에 매몰되었으며,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여기는 믿음 없는 오늘날의 교인들이 ‘사람이 믿음만 있으면 되겠느냐?’, ‘그럼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죄를 막 지으면 되겠느냐?’고 반문하는 이들의 의문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그렇지 않음을 확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없다는 것은 안에 있는 것이 삶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진실되지 않고 거짓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있어 그것이 생명과 본성이 되어 그 의가 삶으로 행동으로 말로 또 생각으로 나타난 이들이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움뿐이거늘, 하나님을 믿는 이가 죄를 마구 지을 것이라 가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부정하다고 여기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생각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짓된 사람의 생각입니다.


사람들의 말에 ‘~다워야 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진실된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이 가진 본성이 그가 가진 형식인 육신과 육신의 행위와 말과 생각으로 나타나는 것은 다 참된 것입니다. 양을 잡아먹는 늑대는 잔인해보일 수는 있지만 거짓된 것은 아닙니다. 사자나 양이나 모두 그것이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의 탈을 쓴 늑대는 늑대인데 양인 척 하기 때문에 거짓된 것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합당치 않은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신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은 의아 뜻대로 살지 않았다면 그렇다고 고백하는 것은 진실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라고 말씀하심은 진실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 하나님과 하나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이 육신으로 보이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을 받고 그 성령을 받은 성도라면 그 역시 하나님과 하나라고 이야기 할 수 있어야 진실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진리와 진실함이 있다면 당연히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 이를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하는 것이 바로 이 말씀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을 하려면 노력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마음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감정도 사람 마음 안에서 자신도 모르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안에 있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성경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 역시 성경에서 시키니까. 그래야 천국 가서 복 받는다고 하니까 억지로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복락이나 천국에 가서 잘 살겠다는 것을 목적으로 한 계략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도 모르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감찰하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형제를 볼 때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이 동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자기 안에 그럴 수 있는 본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본성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목적입니다. 그 목적이 자기 안에 있어 그것이 표현되는 것이 바로 진실된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 먹고 한다고, 신념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우리는 지금 베드로 사도가 고난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정한 성도들에게 전한 위로의 서신을 보고 있습니다. 이 얼마 길지 않은 문안 인사는 이루 다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복음의 진수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성령,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그 정체성이 생명이 된 성도들의 삶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빠지지 않고 언급하며 성도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서신을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성도의 삶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베드로 사도만의 주제가 아닙니다. 이는 성경의 주제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그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기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본성에 의한 삶을 사는 성도의 삶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이렇게 하라는 요구사항으로 보지만 사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뜻하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그것이 자기 삶으로 나타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즉 삶과 정체성의 일치 그것이 진리며 거짓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진리를 단순하게 Fact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진실인가 하는 것에 있어서 사건의 전말이 왜곡 없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리는 의도와 나타난 것이 같은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이웃을 돕기 위하여 물심양면으로 수고한 것을 아주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전했다고 해도 그 사람이 간첩이라는 신분을 감춘 것이라면 그것은 진리나 사실이라 하지 않는 것이 그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리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신 진리는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정체성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름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그 정체성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의도하신 것을 그 사람이 순종하므로 그 사람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의와 같아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전하셨기에 진리를 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거짓이라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은 사실과 다른 소리를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거짓은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겉모습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육신의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속사람은 하나님이 뜻하신 것과 다른 의를 가지고 있는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거짓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회 칠한 무덤이라고 하신 것을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진리> 또한 같은 의미입니다. 영혼이 깨끗하다는 것은 잡생각조차 하지 않는 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깨끗하다는 것은 영혼이 그 존재하는 목적과 동일한 상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흔히 ‘깨끗한 걸레’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무언가를 닦고자 할 때 사용하지 않은 걸레를 깨끗한 걸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걸레는 깨끗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걸레라는 목적으로 사용하기에 합당한 걸레의 상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깨끗함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괜히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능력이 무궁하시다 보니 심심해서 어쩌다 만든 것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아주 분명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어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그 창조주가 의도한 상태가 가장 깨끗하고 순결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살면서 그 입으로 욕을 한다고 깨끗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수시로 ‘독사의 자식들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말로 하면 ‘개새끼’와 비슷한 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진리는 우리의 행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행위로 깨끗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에 있을 때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결국 우리 안에 있는 의가 표현된 것이므로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의와 뜻이 있으면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은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 성경은 요구사항이 아니라 현상을 설명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겉과 속이 같아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면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진리나 진실이나 사실도 결국은 그 의도한 것과 표현된 것이 같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가 속과 겉이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만드신 뜻과 그 사람의 삶의 목적과 의미가 같은 상태가 하나님이 보실 때 거짓이 없는 진리 가운데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리이고,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진리인 것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