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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백성’이라 말하고, 죽으면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동의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고 명백한 것이지만 사람들이 자기 육신의 안목으로 눈이 어두워져 이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자신들이 바라는 바가 자기 능력으로 다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대책과 수단으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냉소적인 말 같지만 사람들이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서 돈 달라 밥 달라 배우자 달라 좋은 직장 달라 아픈 가족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모든 기도의 핵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은 나라를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가난한 나라에 간 선교사를 위하여 또 그 선교 사업에 동참하기를 바라는 기도를 한다면서 자신들은 자기 육신의 소망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고 항변도 합니다만 그들이 위한 나라와 교회와 선교지의 사람들에게 전하고 바라는 것 역시 육신이 잘 먹고 잘 사는 소망에 관한 것이니 다 같은 것이라는 것을 외면하거나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일 뿐입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그 믿음이 하나님께 유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신을 다스리는 것에 동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순종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육신을 자신의 의와 뜻대로 얻은 것도 아닌 인생들이 그 육신의 바람과 소원을 하나님께 얻는 것이 믿음이 아니며 또 그렇게 얻을 수 있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의와 뜻이 주관하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삶의 모든 것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에서 살면 아이 때부터 부자에 대하여 배우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 나라의 의가 자본주의고 민주주의기 때문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씀을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건축자와 같은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린 돌과 같이 여기고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소비하는 낮은 자리로 가는 삶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많은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가서 자신이 낮아지기를 기도하듯 하니 자신은 예수님을 버린 돌과 같이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만 미안하게도 그 신앙이 무엇을 바라는지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자신들의 가족들이 평안하기를 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얻으려면 낮아지고 그것을 버리듯 하면 얻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신이 낮아지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자비와 긍휼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지신 의와 안목이 자신의 것이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의와 생각과 안목을 가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은 성경책의 문자대로 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생명이 되면 그 의가 본성이 되니 속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설사 원치 않아도 하나님과 같이 보고 하나님과 같이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한 나라의 의에 속하여 그 나라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와 본성이 어떤 것인지만 알면 됩니다. 그것을 알고 그것에 순종만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말씀)가 육신이 되면 어떻게 되는지를 예수님을 보내셔서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도깨비 방망이로 생각하고 예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나라이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살 것이라는 것은 세상에서의 방식입니다. 천국에서 기와집은 뭐하려고? 집값이 오르기나 할까요? 오르면 또 뭐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앞서 베드로 사도가 지속적으로 이야기해 온 것들이 자신의 본성이 된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베드로 사도의 말과 같이 이전과는 다른 의로 사는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자기 의로 세상에서 성공하려다가 예수 믿고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것은 새롭게 된 것이 아닙니다. 도구만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새롭게 되어 이전과 전혀 다르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삶의 목적과 의미가 전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은 세상의 성공이나 육신의 복락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을 의롭게 여기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성공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분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다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만드신 것을 인하여 영광스러워하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고 의롭게 여기는 것은 세상을 만든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과는 반대라서 세상의 가치 기준을 가진 건축자가 볼 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인데 그것이 의롭고 영광스럽고 귀한 본성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에게 이전에는 아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전에는 세상이 가진 가치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서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노력하는 것을 의로운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래서 하나님께 그것을 기도하고 바랐는데 이제는 그것과는 전혀 다르게 세상 가치관으로 보면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을 귀한 것으로 여기고 영광스럽게 여기며 의롭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과 다르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을 얻은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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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에게 예수님과 같이 너희도 건축자가 버린 돌과 같은 존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성도들과 달리 예수님의 정체성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는 이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이 부딪히는 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이것을 해도 되는지 염려하는 사람들의 일이라고 지난번에 이야기 했습니다.
살아가는 순간순간 이래도 되는지를 염려한다는 것은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염려한다는 것 자체가 걸려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했는데 성경 말씀대로 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일일이 걱정해야 한다는 것은 자유가 아니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삶을 어두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자기가 할 일을 두고 성경에 맞는 삶인지 아닌지를 걱정한다는 것은 일단 그 결정에 관하여 성경이 무어라 말씀하시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곳에서 손으로 더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성경에 대하여 밝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안다면, 그게 궁금할 이유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자신 안에서 생수가 넘쳐나듯 성경 말씀이 늘 솟아나는 사람은 단언컨대 살아가면서 어떤 결정을 할 때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운전하는 법이 자기 안에 없을 때는 운전이 무섭고 걱정거리지만 운전하는 법이 자기 안에 있으면 어떻게 할지 궁금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본성이 자기 안에 있어 그 본성대로 살면 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니 순간순간 궁금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자주 말씀하시는 어두움은 모른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소경을 고치신 것은 예수님이 안과적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인생들이 자기가 사는 목적을 알지 못하고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고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인생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인생의 목적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인생의 목적을 몰라서 나타난 현상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이 바로 위로 향하는 것입니다. 위로 향한다고 하니 원래 그곳이 위쪽인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우주만 봐도 지구가 둥그니까 남반구이 사람과 북반구의 사람들에게 위는 반대인 것 같이 사람들이 인생에서 성공이라고 여기는 것이 원래 높고 영광스럽고 성공인 것 같고 예수를 믿으면 그 반대로 가는 것 같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 나오는 장님들이 정한 법과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눈 뜬 자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에 높다고 여기는 것, 예수님을 버린 돌로 여기는 그 가치기준과 세상에서 성공하면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들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알아야 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생각을 아는 것이 진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 제쳐두고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셨으니 하나님이 옳다는 것이 실은 높은 것이고 선하고 옳은 것입니다. 이 가치관을 가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진 기준, 곧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겨 세상에서 높이 오르면 그곳에 하나님이 계실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세상에서 영광을 취하려는 것을 하나님께서 도우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바벨탑이었고, 그 바벨탑의 후예들이 오늘날 방송에서 상 받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정말로 어둡고 어두운 가운데 있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인생이 평안한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인생이 평안하지 않는 것이냐? 그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평안하다는 사람들은 그 평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삶을 삽니다. 이는 모두가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평안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수고하고 괴로운 것 같지만 내면이 평안합니다. 인생의 본질이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정말로 인생이라는 것이 육신이 평안한 것이 복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이 죽지 않고 살면 살수록 더 쌩쌩해지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만드실 때 주신 이 육신은 소비재와 같이 갈수록 쇠잔하여지도록 만드셨습니다. 지혜가 있다면 이 육신의 삶이 갈수록 병약해진다는 것 그 하나에서도 인생의 성공이 육신의 평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하나 같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지 못하는 어두움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두움 속에서 자신들이 만들지도 않은 세상의 법을 만들었습니다. 높이 올라가면 영광스럽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은 이긴 자가 독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두운 자들의 행사입니다. 더욱이 하나님 만드신 세상을 자기 맘대로 정의하고, 자기 맘대로 하려는 죄 중의 죄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어두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내셨는데 그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에서 불러내셔서 기이한 빛으로 인도하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기이한 빛은 하나님의 밝음인데 이것이 기이한 것은 이전에 가진 안목으로 볼 때, ‘그게 된다고?’ 싶은데 되는 세계의 밝음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을 때에는 절대로 낮아져서는 영광스럽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을 때는 육신이 수고하는 것은 종이나 하는 짓이니 성공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들은 졸이 발을 씻겨 주는 자리에 있는 것이 온전한 것이었는데, 하나님의 밝은 빛 가운데로 오니 그와 반대로 육신이 수고할수록 십자가를 지는 영광의 삶이고, 발을 씻기는 것이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라는 놀라운 기이함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처음에는 의아하고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되며, 하나님 아들이 그 꼬라지로 있어서 되겠는가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그렇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육신을 종과 같이 수고하고 십자가에 내어주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이 밝음은 모든 것을 다 설명합니다. 밝아지면 모든 것이 명확해지고 의문스러운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인생을 왜 사는지, 왜 사람의 육신은 연약한지, 또 인생은 왜 영원히 살지 못하는지를 비롯하여 사람들이 가진 모든 철학적 종교적인 질문과 회의를 설명할 수 있어야 밝은 것입니다. 노력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은 다 기만과 술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어야 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로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육신의 평안을 추구하노라면 누군가 수고해야 합니다. 그래서 종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으면 자기가 옳다고 여겨 종을 두고 육신이 평안해지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자들의 주장 앞에 육신으로 수고하므로 종이 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은 아주 기이할 뿐 아니라 어리석은 것 같아서 건축가 버릴 수밖에 없지만 놀랍게도 그 어리석은 모습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세상의 백부장이 하나님의 아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신 자리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 건축자가 볼 때는 버려야 할 쓸모없는 돌과 같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영광이며 그런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기는 자들이 볼 때는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야 할 것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 고 낮은 자리로 가서 의인임에도 죄인을 위하여 스스로 죄인이 되는 삶을 사는 자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아름다운 덕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전하시고자 우리를 지으시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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