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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 1:24-25) 마지막 인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유다서 Date : 2017. 12. 17. 07:56 Writer : 김홍덕

대부분의 서신서와 같이 유다서도 마지막에 해당 서신서의 수신자들에 대한 축복을 비는 것으로 마칩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 지어다. 아멘(유 1:24-25)


이러한 축복의 말씀을 대할 때면 ‘이 말씀이 나에게 이루어졌는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아야 합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나면 마지막에 듣는 축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 축도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떠나서 어쨌든 그 예배 속의 축도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니 그 하나님의 축복을 매주 듣는데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되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참 무감각한 것입니다. 문둥병에 걸린 것이라는 것입니다.


유다 사도의 축복을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가 정말 삶에 있어 거침이 없는지, 흠 없는 즐거움이 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다 사도가 유다서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 자신에게 다 이루어졌는지를 가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신의 마지막에 이렇게 빌었다는 것은 유다 사도가 권면하고 경계한 말씀의 목적이 이루어지면 이렇게 될 것이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 축복은 일반으로 얻은 믿음을 지키고 싸우는 이들, 그래서 영생에 이르도록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유다서에서 경계하는 사람들, 다른 색을 좇고, 성령이 없는 이들에게 거침이 없고 흠 없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흠이 없는 즐거움은 항상 기뻐하는 것과 일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즐거워하는데 흠이 없다는 것은 즐거워하지 않는 순간이나 요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 존재 자체가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존재가 즐거운 것이 아니라 삶의 행위와 마음과 생각이 즐거운 것이라면 모든 순간의 생각과 행동이 즐거워야 하는 것이 될 것인데 그러면 장례식장에서도 웃기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즐거움에 흠이 없다는 것은 삶 자체가 즐거운 존재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 즐거움이 없는 사람들은 거침없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즐겁고 행복하기를 바라는데 행여 자신의 어떤 행동으로 인하여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나 신이 노하여 벌을 주어 원치 않는 불행을 겪을까 노심초사하는 사람에게 삶이 거침없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자기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벌을 받을 만한 행동이 아닐까 조심하면서 사는데 거침없는 삶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그렇게 조심하는 것을 깨어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정체성이 발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성품이 살아 있는 것을 깨어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행동이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여 자신이 바라는 육신의 평안이 깨어지는 것을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자기 행동을 조심하는 것은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것으로 보시지 않는 행위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즉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유다서를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의 말씀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유다서를 읽으면서 자신은 당연하게 영지주의자가 아니라고 여기면서 읽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경계하는 바 사람이 그 행위로 하나님께 의로워지려고 성경을 육신으로 지키는 노력의 공로를 드리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영지주의와 뿌리가 같은 자입니다.


행위로 의로워지려 한다는 것, 육신으로 성경을 지키는 것이 믿음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이고 여기는 것, 그렇게 해야 자기 육신의 삶이 평안할 수 있다고 믿는 신앙은 그 바라는 것이 육신의 평안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도 있지만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어떤 행위의 공로와 소유의 드림이 필요하다고 여기며 늘 그것을 쌓고 채우려고 하는 것은 온전하지 않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온전하고 자기 믿음대로 된다는 것을 안다면 더 이상 노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이 딱 맞는 국이나 찌게에 간장이나 소금을 더 넣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렇듯 뭔가 아직 부족하다고 여겨 오늘도 내일도 육신으로 그것을 매우려고 한다는 것은 이 육신을 가진 삶을 부족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육신으로 성경을 지켜내는 수고를 자꾸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거듭난 생명이면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도 그리 살 수밖에 없는 것을 기록해 두었건만 사람들은 거듭날 생각은 하지 않고 자꾸 자기 육신으로 그것을 지켜서 의로워지려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 육신가진 삶을 부정하고 부족한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육신을, 또한 육신 가진 삶을 부족하고 부정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율법이나 성경을 몸으로 지켜내려 하거나 아니면 아예 믿음은 마음만 있으면 된다며 육신은 방치하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순간 그것이 혼합되기도 합니다. 어차피 육신을 부정하고 부족한 것으로 보는 뿌리는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영지주의나 율법주의나 다 같은 뿌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경을 몸으로 지켜서 의롭게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유다서를 보면서 ‘이건 옛날 영지주의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히 건방지고 교만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성령이 없는 사람들의 생각인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유다서를 보면서 옛날 영지주의자들을 경계한 말씀으로 읽는 사람들은 성경이 오늘 자신의 이야기는 아닌 것입니다. 오늘 자신에게 하는 말씀 아닌 것을 괜히 읽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단지 사람이기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거듭난 생명으로 산다면 이 육신은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존재가 그리스도이므로 항상 하나님의 아들이고 항상 그리스도이며 항상 즐거운 사람이고 언제나 성경이 충만한 사람인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자신을 영지주의자와 같은 자리에 두고 이 말씀 앞에서 고백적인 마음이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아니라면 이 말씀을 성경에 두고 읽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유다서를 마칩니다. 유다서는 설교나 강해를 많이 들을 수 없는 성경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오늘 자신의 이야기로 잘 받지 않기 떄문입니다. 그리고 유다서에는 ‘~~하라, 그러면 복을 주실 것’이나 ‘~~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어떤 행동을 해야 행동의 주체인 육신의 삶이 평안해 질 것이라고 설교하는 교회에서는 별로 할 말씀이 없는 책입니다.


하지만 이 유다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육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을 부정하고 연약한 것으로 보고 있지 않는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뜻과 다른 뜻을 가짐으로서 유다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다른 색을 좇는 사람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단지 사람이기만 하면 일반으로 얻을 수 있는 복음이나 믿음으로 이 믿음을 보는지도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면, 기적을 일으킨다면 더 좋은 신앙으로 여기고 있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일반으로 전한 범사의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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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 1:20-23) 영생을 이루는 삶의 본질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유다서 Date : 2017. 12. 16. 08:09 Writer : 김홍덕

유다 사도는 서신의 끝에서 <어떤 이들>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분류하여 사람에 따라 긍휼히 여기라고도 하고, 불에서 건져내라고도 하고,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입어서 더러워진 옷이라도 싫어하고 두려움을 가지고 긍휼히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람들을 분류하는 기준에 대하여는 특별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이 서신의 전반에 흐르는 서신의 목적을 기준으로 가늠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긍휼이 여기고 어떤 사람을 그 입었던 옷도 싫어하는 사람으로 여겨야 할까요? 여기서 특별히 궁금해지는 것은 그 입었던 옷까지도 싫어하라고 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의 문제일 것입니다. 유다 사도는 특별히 그 사람들에 대하여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옷은 단순하게 의복이 아닙니다. 이는 그 사람의 지위, 신분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을 받으실 때에 예수님이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다고 왕을 상징하는 홍포를 입힌 것도 그 때문입니다.


육체로 더럽혔다는 것은 오염시켰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성경 속에 있는 말씀입니다. 즉 더러움과 죄와 악은 모두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와 악에 기준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육신으로 더럽혔다는 것은 육신을 그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은 모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이 가진 존재의 목적이 있는데 그에 합당하지 않은 삶으로, 그에 합당하지 않게 육신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육체로 더럽혔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육신으로 더럽힌 옷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목적을 알지 못한 체 이루어 낸 옷으로 표현되는 자기 신분과 같은 정체성은 다 싫어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을 주신 목적과 의미도 모른 체 세상에서 성공한 모든 성공은 싫어할 만한 것이라는 것이고, 그런 성공을 바라볼 때에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악인 것을 알고 두려워하되 그런 성공에 도취한 이들을 긍휼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 사도의 권면은 앞서 이야기한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의 긍휼을 기다리는 일>의 실체적인 내용입니다. 영생을 이루는 것이 의심하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 불에서 구원하고, 육신의 목적을 알지 못함에도 이루어 낸 지위와 성공을 두려워하되 그런 사람들을 볼 때는 또 긍휼하게 여기는 이런 모든 삶의 모습들이 바로 영생을 이루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황금률 그대로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이나 세상 속에서 사람들을 볼 때 교만하고 의심 많은 사람들과 같은 이들을 싫어합니다. 심지어 신앙 안에서는 자신이 만든 사람도 아닌데 자신이 심판해서 ‘저런 꼴로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삶은 영생이 없고, 성령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성령이 그 마음 안에 있으면 사람의 교만도, 분내는 것도 다 사람의 연약함을 인함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의심? 그 의심 없이 신앙 안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걸린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세상의 성공을 빌면서 한편으로 성경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의심해보지 않는다면 신앙 안에 들어 올 수 없기도 합니다. 의심하는 것은 온전한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육신을 하나님이 주신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런 섬김이 의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확신을 얻을 수 있는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또한 불 속에서 사람을 구하려면 불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러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 그것입니다. 육신은 바로 그런 것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삶은 그 속에 성령으로 잉태된 그리스도의 생명 본성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 없이 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런 삶을 살아가는 그 여정이 바로 영생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을 이루는 것이고, 그것이 푯대를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삶이고, 하나님 아들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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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 1:20-23) 영생에 이르도록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유다서 Date : 2017. 12. 15. 07:14 Writer : 김홍덕

신약성경에 있는 사도들의 서신서의 내용은 거의 다 온전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대한 권면과 위로, 그리고 복음에서 벗어난 이들을 향한 책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모든 서신서에 나오는 온전한 믿음을 가진 이들을 향한 권면은 하나 같습니다. ‘구원을 이루라’, ‘푯대를 향하여’, ‘영생에 이르도록’,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얼핏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어가라는 권면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들이 미완을 완성시키라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 신앙의 안목이 육신으로 신앙적인 공로를 쌓는 사람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을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믿는다고 말하고 그 말한 것을 육신으로 지키고 노력하는 안목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임종을 앞둔 부모님이 예수 믿는다는 말 한 마디 하는 것을 그렇게 의미를 두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평생 하나님 믿지 않다가 죽을 때 ‘믿는다’ 말하고 죽으면 되는 것인가?’라는 말도 안되는 의문을 가지기도 합니다.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생명의 세계입니다. 어쩌면 이 생명의 세계 하나를 설명하시기 위해서 우리 인생이 나고 자라고 살다 죽도록 하셨는지도 모른다 싶을 정도로 우리에게 이것이 생명의 법이라는 것을 설명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달리 생명, 생명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살아감이 우리 삶의 목적이고, 영생을 이루는 것이며, 푯대를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이란, 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정체성의 문제, 살아가는 주체의 정체성의 문제라는 것을 알 때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도 알게 됩니다. 태어난다는 것은 이전에 없던 존재가 어떤 목적 아래서 존재하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생물학적으로 나서 그 생물학적 육신이 삶의 본질이라고 여기면서 살던 육신에 속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육신 가진 인생의 목적을 보고서 ‘저것이 내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 목적이고 의미구나!’라고 깨닫게 될 때 미운 오리새끼로 있던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로 거듭나는 것과 같이 그 삶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인생의 목적을 알고 살아가는 존재로 회복된 것이 거듭남이고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 법을 알면 왜 구원이 거듭남이며, 회개는 무엇이며, 영생은 또 무엇인지가 분명해지고 무엇보다 자신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 마치 여행 가방인양 늘 믿는다는 것을 상기하고 신경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일이나, 구원은 이렇게 해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나, 건강을 회복하려면 무엇을 하라는 것이나, 죄를 지었으면 주기도문을 10번 해라는 것과 같은 말을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본성으로 있는 것을 그렇게 단속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뺏을 수 없는 것입니다. 뺏을 수 없다는 것은 순교적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릴까 신경 쓰거나 다른 노력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으로 뺏기지 않는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조건처럼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 웃기는 일입니다.


유다 사도의 유다서, 영지주의를 경계하는 말씀의 마지막에도 이렇듯 영생을 이루어가는 것을 온전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권면하고 있다는 것은 온전한 믿음,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육신의 의미를 잘 알고 살아간다는 것은 곧 영생을 이루어가는 삶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육신으로 영생을 이루어 간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 그런 위로의 말씀의 대상이 아닌 사람들은 모두 책망의 대상이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인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말씀이 우리가 아는 그 생명의 법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목적이 있어야 생명이라는 것, 그리고 생명은 수고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남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존재하게 주신 육신을 하나님의 의를 담는 그릇, 거하시는 성전으로 자신을 드림으로 생명의 본성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그 육신을 통하여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육신의 의미이고 행함의 의미며, 믿음과 구원의 본질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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