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9

마가복음 50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8. 10. 16. 10:45 Writer : 김홍덕


'미디어 말씀 파일 > 마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52  (0) 2018.11.11
마가복음 51  (0) 2018.11.05
마가복음 49  (0) 2018.10.01
마가복음 48  (0) 2018.09.17
마가복음 47  (0) 2018.09.10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미가 6:6-8)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Date : 2018. 10. 14. 07:37 Writer : 김홍덕

인자를 사랑하는 것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자 곧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의미 있는 것이고 또 좋은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과는 좀 다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열거한 것들은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 그것도 위대한 사랑에 해당하는 것들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사랑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을 때에 사랑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느라 오히려 많은 것을 놓칩니다.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말씀을 보면서 사랑, 그것도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사랑에 집중하느라 사람이 자기 몸을 사랑 없이 불사르게 내어줄 수 있느냐의 문제를 간과한다는 것입니다. 강제로 화영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내어 주는데 국가나 의나 사람을 사랑함 없이 가능한 것이라고 그냥 가정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 세상에는 흔하거나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모습으로 어떤 것을 사랑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나라를 사랑하기에 자기 몸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을 구하느라 자기 몸을 던지는 사람이 있음은 물론이고, 부모가 되면 자식을 위하여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독교인들만 그런 것이 사랑 없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열거한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의 모습 그 자체이며, 사람들이 가장 숭고하게 여기는 것들의 상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런 사람들의 사랑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서 소용이 없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역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의도하시는 사랑이 있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단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기 때문에 사랑, 그것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의 십자가가 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인하여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괴변이나 트집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이는 아주 중요한 구분(거룩함)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이 구분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도 하나님도 예수님도 십자가도 사랑도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사람에게 그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다고 하신 것은 창조주이시기에 그 존재의 목적을 가지고 계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자기 피조물이 자기 스스로의 결정(순종)으로 알 수 있도록 그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시므로 그 창조의 목적을 보이시기까지 그것을 알게 하시려 하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려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을 보이신 것과 같이 사람에게 그 존재의 목적을 알게 하는 삶을 사는 것, 그 존재의 의미를 알도록 전하고 수고하는 것에 자기 육신의 삶을 소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우리가 하나님께 가지고 가야할 것이 그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또 요한 사도가 그렇게 절절히 전한 사랑이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한 삶속의 대부분의 것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기에 그 상태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매진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신앙적으로도 그 맥락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께 무엇을 할까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모습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답답해하시며 행위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늘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날 자신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깨달았다면, 지치도록 살아가는 자기 모습을 보며 그렇게 사는 이유가 궁금했다면[각주:1] 그 시작이 왜 있었는지를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 인식 가능한 존재로서의 마땅한 것인데, 누구나 살면서 그 의문을 가졌고, 답을 얻지 못한 체 살면서 기껏 의미를 부여한 것들도 존재 이후에 가진 것들에 대한 의미를 잔뜩 부여하고 그것에 동의하면서 그 중에서 숭고한 것을 규정하면서 사랑이라 논할 뿐이며, 그 중에서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지고 가야하는지를 고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의문,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존재하기에 벗을 수 없게 부여된 이 삶의 시작의 이유를 알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게 있어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는 것 그 이상의 사랑이 없는데,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위하여 의인이심에도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셨기에 그 자체를 사랑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고 이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야하는 것이라고 미가 선지자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이 궁금증 그 하나로 사람들이 죽어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듣지 못하였노라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바울 사도가 로마서 1:20절에서 말씀하고 있음 [본문으로]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미가 6:6-8)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Date : 2018. 10. 7. 10:53 Writer : 김홍덕

공의를 행하는 것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6-8)


이 본문은 어쩌면 미가 선지서의 주제와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변론하시는 속에, 혹은 그것에 연결되어서 이 말씀이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의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치중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오늘날의 개념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으로 한정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 정말로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의 의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일년 된 송아지, 천천의 수양, 넘치는 기름과 같은 것은 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물을 뜻합니다. 이 말씀은 사울 왕을 책망한 사무엘의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말씀과 같은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한 마디로 우리가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보이시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보이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 선한 것이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선하심은 먼저 공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공의라고 하면 단어 자체의 의미로만 본다면 공평한 의로움과 같은 것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공평한 의로움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이기만 하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개인적인 역량의 차이를 고려하자는 것을 넘어서는 개념입니다. 단지 사람이기만 하면 그것이면 충분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로움을 나타낼 수 있는 세계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기만 하면 된다는 의로움이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란 존재를 만드신 목적 그것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은 영이신 하나님의 실존을 사람이란 육신이란 형식을 가진 존재로서 그것을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존재하는 순간 이미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입니다.(가능성이 있고 예비 되었다는 것) 다만 자신이 그것을 인정하므로 자기 삶의 목적이 그것에 있다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느냐의 문제만 남았을 뿐 존재 그 자체로서 이미 하나님의 의를 나타낼 모든 예비가 다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그래서 여호와 이레인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도 바로 이것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나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내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하여 누군가에게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찾고 구하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그 사람에게 그것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존재한 것은 기존 명제로서 삶을 생각합니다. 존재했으니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운 삶인지, 또 자아실현인지, 또 행복인지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삶의 의미에 대한 모든 신앙과 철학과 학문이 다 What to do?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지식의 한 파트에 진화론(진화의 목적은 없이)과 같이 근원에 대한 의문에 대한 최소한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자위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든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기대를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선한 선생이라고 부른 청년에게 예수님께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와 연관이 있는데, 예수님의 그 말씀에는 하나님이 세상과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모든 존재의 선함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합되는지 아닌지에 따르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자신이 어떤 물건을 만들거나 살 때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물건이 자신이 의도한 목적에 부합되면 부합될수록 선한 것이고, 사용하고자 하는 의도에 반할수록 악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악을 견디지 못해 버리거나 중고로 팔거나 반품하거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 행위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또 범죄한 인생들에게 진노하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송아지를 드리듯 십일조하는 것이나, 천천의 수양을 드리듯 봉사와 헌금을 하는 것이나,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는 것이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면서 자신의 행위와 그 공로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뜻을 알고서 행하라는(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 뜻을 아는 것이 선하심이고, 그 선하심은 사람이기만 하면 누구나 이룰 수 있게 주신 것이기에 온전한 공의로움이라는 것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