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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6:6-8)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 4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Date : 2018. 10. 28. 09:05 Writer : 김홍덕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늘 주님과 동행’이라는 것을 좋아하고 뇌까리듯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그런 표현은 하나님을 상비약을 가지고 다니듯 생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살아가다 뭔가 도움이 필요할 때 즉시 도움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마음이 있도록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가 신앙 안에서 흔히 쓰는 말들의 모든 의미가 달라집니다. 구원에서부터 기도와 말씀 그리고 순종과 함께 하는 것 그 모든 것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하나님이 그에 맞게 보답하신다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결국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 한다’는 그 흔한 말은 흔한 만큼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한다고 하는 것만 해도 늘 함께 있는 것은 아니듯 하나님을 상비약이나 램프의 지니나 도깨비 방망이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챙겨서 가져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늘 함께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때로는 휴대폰을 집에 두고 출근하듯 하나님과 함께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생각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우리 주머니 속에, 아니면 우리 삶의 옵션 중에 하나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때로 방심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닌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행여 떨쳐내고 싶어도 불가능한 상태가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사람이 결혼을 하면 혼자 출근해서 일하고 있어도 유부남, 유부녀라는 신분은 변할 수 없고 떨칠 수 없는 정체성의 불가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도 그와 같아서 어떻게 하나님과 따로 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 전반이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려 애쓰는 것이 좋은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인하려해도 자기 삶의 어느 한 절도 그럴 수 없는 상태가 좋은 신앙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의가 자기 생명이 된 것을 말하며, 그런 상태를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여자가 남자의 유전자를 받아 아들을 낳듯 사람이 자기 삶의 의미와 목적이 하나님의 의에 있는 것이라고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순종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순종을 이야기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순종은 역시 자기가 하나님께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하여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내 육신으로 표현되는 것을 기쁨으로 수용하는 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들어오게 되고 그 의는 생명이니 자기 안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살게 되는 본성이 유전자처럼 속에 거하게 되고 그 본성을 인하여 살아가게 되는 것이 바로 거듭난 생명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게 된 사람은 천하에 어떤 능력이 있어도 하나님과 분리된 삶을 살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하나됨 역시 바로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바로 이것을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이신 것이 그 오신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과 함께 하고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가지고 다니거나 옆에 손잡고 가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의와 하나가 되어 분리될 수 없는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가 선지자가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께 우리가 나아갈 바,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그 자체이고 유일한 것입니다.


이는 미가의 때에 와서 새롭게 선포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 그 자체입니다. 이것이 목적이라는 것이 바로 창세전부터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목적으로 해서 세상을 지으셨으니 이 목적이 창조보다 먼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목적이 바로 그리스도이기에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보다 먼저, 창세전부터 있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미가서 뿐 아니라 성경을 대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고, 또 하나님과 동행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아야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감춘 것 없이 다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성경을 시작하는 바로 그 첫 장에서.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우리가 뭔가를 해야 한다면 그 말씀하신 것을 순종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그 뜻이 자기 삶의 본질이라 여기는 그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늘 궁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신학이라며 연구하는 그 모든 것이 바로 율법적인 신앙이고 행위의 신앙이며 바알을 섬기는 것인데도 단지 자기가 하려는 행위가 기도나 성경 보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이유로 그것이 행동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치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깐 첨언하자면 기도는 할 수밖에 없는 상황, 곧 존재가 되어야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고, 말씀대로 살려면 그 말씀이 자기 본성이 되었을 때만 항상 말씀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 ‘항상’이나 ‘쉬지 말고’와 같은 빈도부사를 만족시키는 신앙이나 믿음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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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8. 10. 20. 09:00 Writer : 김홍덕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유명한 성경말씀이다. 하나님을 믿고 그 안에 있으면 세상을 살면서 겪는 어떤 문제라도 자기가 꿈꾸는 대로 이룰 수 있다는 말씀으로 여긴다. 그럼 과연 이 말씀이 그런 뜻이 맞을까? 하지만 이 말씀에는 대 전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이다. 따라서 그 밖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궤변적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궤변이 아니다. 성경을 자기 맘대로 재해석 할 것이 아니라면…


이 말씀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 한정된 것이라는 말씀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말씀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내 생각과 삶의 모든 것이 내게 능력을 주시는 그 분 안에 있다면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때로 이 말씀을 가지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역습을 받을 때가 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의문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있으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이냐?‘라고. 그러면 당연하다는 듯 ”그런 뜻은 아니다“고 답한다. 그럼 대부분의 경우 서로 양해(이해가 아님)한 듯 그쯤에서 그친다. 그것은 <모든 것>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니다. 사람의 말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의 핵심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전제가 있다면 그 전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의 핵심은 어디까지는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본질이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도끼를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금도끼 은도끼를 얻을 심산으로 이 말씀을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능력 주시는 자 곧 하나님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시는 이 말씀이나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이나, 내가 저희 안에 저희가 내 안에 있다는 말씀이 다 같은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심이지, 금도끼와 은도끼에 사심이 가득한 욕심 많은 나무꾼과 같이 세상 살면서 어려운 일 만나면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다 들어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적어도 기도를 하려면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즉 그 분의 의에 맞게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심을 잊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러면 무엇이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는 것인가?


성경 전반에 있어 안에 있다는 것은 어떤 공간 안에 있다는 것이나 계모임이나 단체 안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교회에 다닌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사람이 손으로 만든 물리적 교회 대문을 들락거리는 것 정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게 십자가를 진 것이라 여기는 바보들이라면 몰라도.


안에 있다는 것은 같은 생명 안에 있다는 것이다. 고양이를 배에 태워 태평양 한 가운데 가도 고양이 안에 있는 것과 같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다는 것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와 본성과 생명이 같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다는 것은 그 생명의 유전자가 그리스도라는 의미이다. 그러면 그 사람 먹어도 그리스도(a christ)요 죽어도 그리스도 인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리스도의 생명으로서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을 가지고 자기 삶에 응용하려면 먼저 능력 주시는 자 안에 들어가는 것부터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것도 없고,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도록 그 의가 같지도 않고 오히려 자기 의로 세상을 살면서 만나는 문제, 자기 꿈을 이루지 못할 것 같은 문제를 다 해결 할 수 있다고 여기며 기도하는 자들은 그저 “주여! 주여!”하는 자, 회 칠한 무덤과 같은 자일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하는 자가 되고 싶다면 이 말씀을 자기 꿈을 이루어주시는 희망적인 말씀으로만 보지 말고 먼저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속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의와 생명이 같은 것이며, 같은 유전자 곧 생명의 본성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생명으로 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생명 안에 속하는 것이다. 아무리 사람 같은 로봇이라도 나지 않으면 그냥 로봇이듯, 나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난 사람,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된 사람이 될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삶의 모든 것은 능력 주시는 자의 의 안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모든 것이 능력 주시는 자와 같은데 그 안에 못할 것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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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6:6-8)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 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Date : 2018. 10. 18. 10:04 Writer : 김홍덕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경건의 상징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순종일 것입니다. 누구 앞에 겸손하게 서겠다는 것은 자신의 의가 아니라 겸손하게 선 그 상대의 의에 자신을 맞추겠다는 의미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싫어하신다고 하심도 같은 맥락인데, 잘난 체 하는 사람을 싫어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의를 굽히지 않는 것을 목이 곧다, 교만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다는 것이나 순종한다는 것은 이중성이 있습니다. 그 먼저는 금도끼 은도끼 동화에서 나오는 욕심쟁이 나무꾼과 같은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자신의 창조주로 믿는 마음 그 자체가 순종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먼저는 자신이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있기에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께 바라는 것을 단지 세상의 성공과 같은 것에만 한정합니다만, 이것은 더 광범위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앙을 좋게 여기시는 것까지 포함한다는 것이라는 것까지 생각을 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신앙이 좋다는 것을 인정받는 것은 하나님께 별로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게 바로 제사며 그런 사람들의 생각에 하나님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장 흔한 예로 많은 사람들이 힘든 나라로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자신을 보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것이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고, 평안한 삶을 뒤로하고 그런 삶을 사는 것이 겸손이고 순종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단순하게 비난으로 볼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실 때 기대하시는 가장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목적과 기대는 사람으로 보내신 그 보내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외지로 선교를 가는 것 보다, 사람으로 보내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먼저고, 그것이 겸손의 근본인 것입니다. 


그 순종과 겸손으로 살다보니 어떻게 멀리까지 삶을 옮기게 되기도 하고, 그렇거나 말거나 언제나 사람으로 보내신 뜻을 좇아 살면 아프리카로 가든 한국에 살든 그것이 선교고 복음 전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과 겸손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신앙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으려고 하나님이 시키시는 것은 하겠다면서 그것을 순종으로 치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하러 가겠다는 것이나 세상의 성공을 바라는 것은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순종은 의외로 ABC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근본적인 기초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생각과 의를 상대에게 맞추어 순종한다는 것이 겸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겠다는 것은 인생으로서 삶에 대한 기본적인 의와 생각을 하나님의 의에 맞추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창조주로 믿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순교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는 하나님을 크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순교라는 것을 자신이 먼저 설정한 상태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각을 자신이 정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모든 것에 앞서 인생으로 자신의 삶을 주신 그 뜻을 먼저 아는 것이 순종의 출발이고 겸손의 시작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뇌까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것만 무슨 뜻인지 알아도, ‘영생은 하나님과 독생하신 그의 아들을 아는 것’이라는 그것만 알아도, 아니 매주 한 번씩은 외우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라는 것이 진정한 자신의 신앙고백이기만 해도 하나님께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 보다, 자신에게 인생을 주신 이유와 목적을 알려고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꾸 하나님께 뭔가를 하려고, 시키시기만 하면 순종하겠다고 기도하고 떼를 씁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아마도 하나님은 ‘내가 너를 세상에 보낸 의와 목적이나 잘 달성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목적이 먼저 있었음에도, 그 목적을 상실한 자신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원의 퍼포먼스(행함)로 보고, 그것에 자신도 행위로 보답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의 말과 같이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까?’라고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예수님도 무엇을 가지고 오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으신 목적대로 생육하고 번성하며,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가서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것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어떤 순간도 내가 원하는 것이 있으니 가지고 오라고 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자기 생각과 의로움과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옳다고 스스로 정의내린 그것에 매몰되어서 자기 생각에 하나님을 믿으려면 뭔가를 가지고 가야지, 뭔가를 드려야지, 어떤 격식으로 예배를 드려야지 주장하므로 교만을 떨지 말고서 보내신 그 뜻에 잘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불순종하는 마음의 눈으로 보면 ‘좋은 것’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기는 것과 간음하듯 혼용되고, 그래서 교회를 크게 지어 하나님께 바치자고 하고 서울을 하나님께 바치자고 하며, 세상에서 성공한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며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 유명한 사람을 불러 간증 집회를 하고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미가 선지자가 앞서서 책망한 내용이고, 이제 그것에 반하여 아니, 온전한 하나님의 의를 전하는 회복의 말씀으로서 그런 불순종과 교만과 간음과 같은 수양의 기름을 가지고 가는 것을 버리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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