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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지를 자문하듯 하던 미가 선지자의 말씀은 악인의 삶이 어떠할 것인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개는 보통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다소 부자연스럽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것은 악인의 삶이 어떻게 피폐할 것인지, 부정한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저주를 받을 것인지에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 정의와 연결해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가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6장의 말씀은 ‘하나님을 무엇을 드릴까?’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을 순종하는 것이 본질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어떤 행위의 공로를 드려야 하는지를 궁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기에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 완전한 지혜라는 말씀을 하심이 그것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아니 성경의 모든 말씀이 가진 본질적 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꾸 뭔가를 하려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가만히 서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또 나를 만드신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먼저며 본질이며 그것을 자기의 존재 정체성으로, 삶의 이유와 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순종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완전한 지혜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말씀에 이어서 악한 자, 부정한 에바(저울이나 기준)를 사용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이 말씀이 왜 나왔는지는 생각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회 정의적인 관점에서 보게 되는 모습에 이상함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어떤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래, 부정한 저울을 사용해서 부정한 재물을 모으면 안 되지!’라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은 어떤 행위가 논점이 아니라, 그런 행위들이 바로 완전한 지혜인 하나님의 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자기 안에 없기 때문에 표현된 것이라는 것임이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람들의 행위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행위의 어떠함이 그 사람이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 판단하는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준은 오히려 사람을 혼돈스럽게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를 지키는 자국의 군인은 적국의 군인을 많이 죽여야 합니다. 순식간에 행위가 기준인 가치관을 흔들어 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법과 가치관이 여기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사회는 늘 불공정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와 세상이 불공정한 것은 존재의 하나님께서 만든 세상을 행위적 관점으로 보고 그 기초 위에 법과 가치관이 세워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이 행위가 아니라 그 사람의 본질을 본다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사람을 믿는 것도 달라질 것입니다. 예를 들면 스포츠를 보고, 그 경기 결과에 대한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사람들의 가치관이 얼마나 행위에 매몰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경기에 이기지 못하고 좋은 경기력을 보이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수준이 가히 참혹합니다. 


사람들이 그런 악함을 보이는 것은 가치관을 인함입니다. “프로 선수가 밥 먹고 저것만 하는데 저걸 못하냐?”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을 안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프로 선수는 누구나 이기고 싶어 하고 그것을 위해서 사력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만 인정해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선수가 말 그대로 “밥 먹고 그것만 해도 잘 안 되는 것이 프로 스포츠구나!”라고 생각하고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사람의 행위는 그 심령이 어떠함에 따라 결정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가 선지자가 말씀하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부정과 악함은 그 행위가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함을 인하여 발생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을 아는 완전한 지혜가 없기에 악한 행위를 하고, 또 그것을 구분도 못하고 그런 악한 <행동>을 어떻게 제어할지나 고민하는 답 없는 순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존재의 하나님께서 그 존재의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창조하신 세상과 사람이 그 목적을 알고 존재적인 관점을 가지지 못하므로 지혜가 완전하지 못하며,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 갈 때도 ‘무엇을 가지고 갈까?’, ‘무엇을 행할까?’를 고민하는 그 연장선에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악하다고 하시는 모든 것이 나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정한 저울이 악함의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뜻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저울>로 부정한 재물을 축적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특히 자칭 하나님을 믿는다는 기독교인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만 알면 도둑질을 해도 되느냐고 반문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기만 하면 그 사람이 스스로 어떤 행동을 함에 있어 절제하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느냐고 묻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분명히 미가의 말씀이나 선지자들의 외침 속에 있는 악함을 행위 기반으로 볼 것입니다. 이는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만 하면 도둑질을 해도 되냐고 묻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신학박사고 장로고 목사며 기독교인으로서 세상에서 청렴하고 성공한 사람이라도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다면 미안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본성으로 있고, 그 본성으로 인하여 살아가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살아가는 것인데, 그런 삶이 도둑질을 하게 한다면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 안에 도둑의 본성이 있다는 이야기 밖에 더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을 넘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분노가 있는 것임은 아마 꿈에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악함을 볼 때 그 말씀들이 사람들의 행위를 기반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니 알아야겠다고 노력해서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방법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어떤 수고와 노력과 방법으로 그렇게 되는지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시키는 것에 순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또 사람을 지으신 뜻을 하나님이 만든 한 사람으로서 자기 삶의 운명과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순종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될 것인지를 생각하고 그것에 대하여 여전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자기 삶의 존재 목적과 의미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본질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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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6:9-16) 매를 순히 받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Date : 2018. 11. 3. 12:01 Writer : 김홍덕

나사들은 보통은 오른쪽, 그러니까 시계방향으로 돌리면 체결되고 반대인 왼쪽으로 돌리면 해제됩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왼쪽으로 돌려야 체결되는 나사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왼나사라고 하는데, 우리 생활 주변에서는 선풍기 날개를 고정하는 뚜껑이 왼나사에 해당합니다. 이 왼나사는 왼쪽으로 돌리면 아이라도 쉽게 돌릴 수 있지만, 사람들이 가진 일반적 방식이 옳다면서 오른쪽으로 돌려 넣으려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어쩌면 왼나사를 대하는 것 같아서, 하나님이 정한 방법대로 하면 너무 쉽고 간단하며 평안한데, 그것과 반대로 우리가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상식이나 생각으로 접근하면 그 어려움은 불가능한 것이 됩니다. 이는 확률적인 문제나 하나님께서 비밀처럼 몽니를 부리신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목적대로 응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왼나사를 일반적인 상식과 대중적인 관점에 입각해서 오른쪽으로 돌려 넣으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궁극적으로는 그 나사를 개조해야하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억지로 오른나사로 변형시켜서 선풍기 날개를 고정시키는 것으로 사용하면 문제는 더 커져서 이내 선풍기 날개가 풀려서 사고가 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마치 이와 같아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대로 인생을 살지 않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은 어려운 것이 되고, 신학이라며 학문과 같이 공부하게 되며, 라마단이라며 자신을 학대하기까지 하고, 본능을 억제하며 결혼을 금하고 참으며 사는 억지 인생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더 웃긴 것은 그런 모습을 가진 이들을 성직자라 부르고 좋은 신앙을 가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왼나사를 오른쪽으로 돌리려 애쓰는 바보들을 그렇게 부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때로 고난을 당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서 순종하지 않으니 갑자기 그 사람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치게 하는 것인 양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졸렬한 분이나 case by case로 대응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서 그것에 일일이 대응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할 때 ‘하나님 앞에서 벌을 주신다.’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왼나사를 오른쪽으로 돌리듯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법대로 살지 않으니 겪게 되는 마찰일 뿐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법대로 살지 않으니 그 법에 대한 마찰을 겪을 뿐인 것입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사람이 가진 육신, 그리고 그 육신의 인생을 보는 관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육신을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일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종과 같이 섬기신 것과 같이 사용하라고 주셨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육신이 평안한 가운데 하나님을 믿고, 말로만 하면 기적이 일어나서 마음에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좋은 신앙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자기들의 마음에 바라고 생각하는 좋은 신앙을 이루려 노력을 하는데, 하면할수록 어렵고, 그래서 스스로 인간은 부족하기 때문에 성경을 다 지킬 수 없고, 그러니 단지 노력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하나님께서 노력의 정도와 여부와 정성에 따라 내리시는 은혜가 다르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바로 왼나사를 오른쪽으로 돌리려고 노력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소비재로, 다시는 사용할 수 없도록 시간 안에 두시고, 그 주어진 시간 동안 하나님께 없는 형상을 가지고 그 형상으로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와 반대로 육신이 평안해지면 질수록 더 큰 은혜며, 더 좋은 신앙이며, 육신을 덜 사용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면 하나님의 큰 종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소비재로 주신 것이 왼나사의 목적과 같은 것인데, 사람들은 자기 눈에 좋을 대로 오른쪽으로, 자기가 알고 있는 대로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인생은 참 곤고한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과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살지 않기에 당하는 어려움을 시련이라고 말하고, 그 시련을 이길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어처구니없는 것을 신앙이라 기도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지혜도 완전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는 그로 인하여 당하는 매를 순순히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지팡이와 그것을 정한 이의 권위를 인정하라고 되어 있는데 번역이 좀 건너 뛴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성경도 처음 번역하실 때 분들이 하나님의 의를 좀 더 잘 알고 있었다 싶기도 합니다. 지팡이는 인도자가 가진 의를 상징하는 것인데, 그것에 순종하라는 것은 곧 그 의에 순종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다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아는 것에 수렴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어 그 목적이 자기 안에 생명이 있으면 완전한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노릇을 하는 것은 공부하지 않아도, 신학대학원을 가듯 공부하지 않아도 다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것은 사람 안에 완전한 지혜로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말하는 것은 말하는 능력이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것이지, 말하는 능력부터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고 계획하신 것을 온전히 알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인생이 되는 것이고, 삶이 곤고하지 않게 되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왼나사를 왼쪽으로 돌리는 것과 같이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생각에, 사람들이 다 하니까? 또 말하는 능력을 주신 이는 생각지 않고 말을 하게 된 이후의 삶에서 말을 어떻게 잘 할 것인지를 궁리하고 그것을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인지 궁리를 하니 이것이 바로 왼나사를 오른쪽으로 돌리는 것과 같고, 미가 선지자가 말하는 매를 순순히 받으라, 곧 지팡이로 상징되는 인도자의 의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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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6:9-16) 완전한 지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Date : 2018. 11. 2. 06:29 Writer : 김홍덕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께 나아갈까?”라는 문장은 의문문입니다. 의문이 있다는 것은 그 지혜가 온전 혹은 완전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의문에 대하여 명확하게 답을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답변에 이어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의문이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언급하십니다. 그것은 지혜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보통 ‘완전함’이라는 것보다는 ‘온전함’이라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완전함이라고 하면 그 뉘앙스가 실수조차 없는 것, 곧 드러나고 표현된 것의 무결함을 뜻하고, 온전함은 표현 이전에 그 존재의 정체성의 무결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존재론적 말씀인 성경에서는 온전함을 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미가를 통해서 지혜의 완전함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는 그 앞에서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께 나아갈까?’라는 의문 혹은 질문의 연장선에서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함이 표현된 어떤 결과의 무결함을 이야기하는 것이기에 어떤 행동을 하나님께 가져가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결국 행위적인 관점에서의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 바로 지혜의 완전함이라고 답을 하십니다. 사람이 어떻게 행할지 몰라서 그 완전함을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 곧 존재의 정체성을 경외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존재를 경외하지 않으니 행위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완전치 않은 것은 주의 이름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그 짧은 문장에 이런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행위의 완전함을 추구하기에 작은 실수도 창피해하고 그것을 극복하면 할수록 위대한 업적이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까지나 그럴 수 없고, 항상 그럴 수 없으며, 무엇보다 마음에(존재의 본연에)서는 그렇게 할 명분이 없이 자기 밖의 세상의 가치관이 원하기 때문에 노력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즉 겉으로 완전함을 추구하는 그 모든 내면의 이유는 항상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아주 상식적인 말씀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한다는 것은 신앙의 기본 중의 기본이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의문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지 않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을 알려고 학문, 곧 신학을 만들고 공부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공부를 했다는 증서를 기반으로 라이센스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경외함이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늘 하나님의 뜻을 묻고,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인지를 궁리합니다. 그리고 그런 고민이 깊을수록 좋고 경건한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것은 좋고 경건한 것이지만, 평생 그러고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드신 사람이 그 만드신 이의 목적을 아는 것을 퍼즐과 같이 두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무 쉽게, 누가 봐도 알 수 있게 만들어진 장난감처럼 쉽게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결혼 이전에 순결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했던 것이라고 말해야하는지도 모르는 시대지만) 결혼을 하고 배우자 서로에게 온전한 존재가 되기 위함이듯, 하나님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는 것도 시절이 있는 것이지 그 시절을 지나서도 알지 못함은 순결 자체를 지킨다고 결혼하지 않는 어리석음과 같고, 열매 맺을 계절이 지났음에도 열매가 열리지 않는 나무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를 저주하신 사건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 때는 생물학적으로는 무화과가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니었는데 저주하신 것은 무화과가 바로 이스라엘의 나무였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무화과의 잎이 무성하듯 뭔가 부지런히 행하고 의문을 가지고 연구하고 난리 법석인데 정작 열매 곧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각종, 아니 모든 신앙적 의문은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어려운 것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약한 신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들어 놓고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감춰두고 찾아보라고 하는 꼰대 같은 하나님이라 여기는 것과 진배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 곧 정체성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곧 그 존재의 정체성에 경외하고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란 분은 당신이 만든 존재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완전함을 논함에 부족함이 없도록 모든 것을 쉽고 편안하게 알려 주시는 분이라 믿는 것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것도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노라 입술을 놀리니 예수 믿는 것이, 성경대로 사는 것이 어려운 것이라고 고상한척 하는 것입니다.


어떤 지혜나 행위의 근간은 그 존재의 정체성을 아는 것입니다. 물건의 사용법을 알려면 그것이 왜 만들어졌는지, 무엇을 위함인지 부터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존재 곧 이름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시하면 그 어떤 것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험을 임함에 있어 문제가 무엇을 묻는 것인지, 왜 그런 것을 문제로 내었는지 모르는데 그 문제를 풀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성경대로 사는 것이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래서 심지어 그것을 학문으로 만들어서 소학도 아니고 대학에, 대학원에 가야 배울 수 있는 것이라 여기고 있다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존재 정체성을 하나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적도 없고 누군지도 모르는 이를 믿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정체성을 모르고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동네 구석구석까지 교회를 세워 놓고 성경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연구하자고 하는 것은, 그래서 헌금내고 봉사한답시고 시간과 육신의 수고를 헌납하고 있는 것은 보이스피싱 당한 것과 진배없는 것입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신을 믿는 것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면, 성경대로 사는 것이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더 나아가 우리는 사람이기에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말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입니다. 완전함도 온전함도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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