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9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를 야곱의 자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세상의 가치관을 취한 사람들을 사마리아와 같이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야곱의 수치는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과 신앙을 혼합한 신앙관을 가지는 것을 사마리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인의 피가 섞인 사람들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한국 사람에게 숫자 4가 한자로 죽음을 의미하는 ‘사(死)’와 발음이 같은 이유로 죽음을 상징하듯.


그리고 미가서의 전반부에서 그런 신앙의 병폐를 고발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신앙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신앙을 버린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나온 아기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이를 <야곱의 남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난 아기는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로 대변되는 신앙의 간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크고 위대해지는 것을 추구하는 세상의 가치관이 혼합된 것인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죄인일 수밖에 없는 낮아짐과 섬김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서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자기 모습을 버리고, 오히려 인생이란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 죄인과 같이 자기 육신을 소비는 종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육신 가진 인생을 주심이 자기 생명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 또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기에 베들레헴에서 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크고 위대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 생각하는 느므롯과 같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마음에서, 또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마음을 물리치게 할 것이라고 미가 선지자가 예언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니므롯은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하늘에 오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 자체가 아니라 노력하고 가공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한다는 사람들이 바로 니므롯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에서 난 아기, 즉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그런 것을 다 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을 고찰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높아지려는 마음을 자신이 다스리며, 절제하고 극기하듯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도원이나 신부나 수녀와 같이 자기 의지로 높아지려는 것을 이겨내는 <노력>과 <수고>로서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노력과 수고가 바로 흙을 벽돌로 만들기 위하여 짚을 넣고 불에 굽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에 대하여 아주 어두운데, 자기 의지와 신념으로, 또 기도하고 부르짖어서 자신 안에 있는 높아지려는 마음을 이기는 것이 아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한 아기가 났다고 말씀하신 것을 간과하면 안 됩니다. 아기가 나는 것은 신념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남녀가 결혼을 하고 출산을 위한 수고야 하지만 그것은 육신이 하나님이 주신 본성에 순종하는 것일 뿐입니다. 어떤 부모도 그 아이의 머리카락 하나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부모들의 수고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님을 우리가 다 압니다. 그게 바로 수고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명의 하나님을 믿는 생명에 관한 신앙을 믿으면서 수고와 노력으로 믿습니다. 기도해야 마음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면 그것은 이긴 것이 아닙니다. 단지 기도에 종속된 결과일 뿐이지 자기 안에 그 유혹을 이길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앙관을 가진 사람들이 기도 하지 않으면 큰 일 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높아질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세계는 그렇지 않아서 자기 안에 어떤 것이 들어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들을 때에 그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된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바로 육신을 가진 내가 살아야 할 모습이구나!’라고 고백할 때에 성령께서 속에 들어온 예수님의 모습이 생명으로 잉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생명이 육신의 삶의 본성이 되어 그 본성으로 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라는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 그것이고, 그것이 바로 아들이라는 정체성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로 나타난 의가 하나님의 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이 그 정체성을 부인하려해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 부모의 유전자가 아무리 싫어도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아들로 나기만 하면 낮아지기 위해서 노력하고, 묵상하고 할 필요가 없고, 죄를 지을까 하여 산에 들어가 수도승과 같이 살 이유도 없고, 결혼을 금하여 신부가 수녀가 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을 사람들은 좋은 신앙이라 여기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이 상할까 하여 따로 모여 살거나, 사람들이 죄를 짓는 모습을 보고 원천적으로 육신을 그곳에서 분리하려 결혼을 금하고 또 노력하는 모든 것은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노릇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니므롯이 쌓은 바벨탑과 같이 육신의 삶에 가치관을 더하여 하늘에 이르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는 야곱의 남은 자들, 곧 사마리아와 같이 수치를 버리고 여호와의 전에 오른 사람들은 여러 백성들 중에 거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여러 백성들 중에 거하면서 그 백성들 안에 있는 본성들을 이겨 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전파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관과 멀리하여야 좋은 신앙이라고 여깁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세상의 가치관과 자기 신념으로 이겨내려고 애쓰고 있고, 그 싸움을 이기려 기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빌리려 신앙생활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세계에 있으니 동화되지 않으려 멀리 떨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름이 불을 멀리하는 것과 같이.


그러나 야곱의 남은 자들, 베들레헴에서 난 아이와 같은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들은 다릅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하나 되려고 해도 그 본성이 이미 그것을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지키려 세상을 멀리하는 사람은 양의 탈을 쓴 늑대가 고기의 유혹을 물리치려 멀리 떨어지려 노력하고 기도하면서 그것을 이기려 하지만, 양은 고기가 옆에 있어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의 남은 자들은 여러 백성 중에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을 가졌기에 세상 사람들과 스스로를 구분하는 것과는 근원이 다른 세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물고기를 먹음에 있어 비늘과 지느러미가 있는 것을 먹으라고 하신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짠 바다 속에 있지만 짜지 않은 고기와 같은 생명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바다 속에 있지만 비늘로 구분이 되고, 지느러미로 방향을 정하듯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방향성을 가진 생명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흔히 가진 생각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에서 자신을 멀리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오히려 바벨탑을 쌓는 노력이고, 그 노력이 효율적이도록 사마리아와 같이 세상의 가치관과 간음하듯 그 법을 도입하여 방법을 연구하고, 결정적으로 그렇게 노력이 결실을 맺으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높아져서 교회의 높은 곳에, 사회적 높은 자리에 이르는 죄악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온전한 신앙은 세상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과 하나가 되고, 세상의 가치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그런 것을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세상을 이길 본성이 그 안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아들이 자기 육신의 유전자가 아버지와 달라질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이 믿음이 없으니 그렇게 세상을 경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충만하면 할수록 세상 속에서 세상의 사람들과 어울리고 함께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성과 의는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드러날 때 더 영광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하신 것입니다. 야곱의 남은 자들은 그렇게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에 거하여 니므롯과 같은 본성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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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5:1-9) 평강이 되시는 그리스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Date : 2018. 9. 27. 00:27 Writer : 김홍덕

미가 선지자는 베들레헴에서 나는 아이가 우리에게 평강이 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당연히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the Christ이신 예수님께서 평강이 되시듯 그의 본성으로 거듭난 a christ 역시 그와 같이 평강이 되신다는 의미이기도 함.)


이 평강의 왕이 앗수르 사람과 니므롯이 우리의 땅과 궁들을 침략할 때에 물리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땅은 표면적으로는 당시의 이스라엘의 땅이겠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본질적 행간은 바로 우리 사람의 심령입니다.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고,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신 하나님과 그 의가 거하는 성전이자 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앗수르와 니므롯이 쳐들어왔다는 것은 우리 심령에 앗수르와 같은 본성, 니므롯과 같은 본성이나 유혹이 들어와서 우리를 어지럽게 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우리를 평안하게 하고 이를 물리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볼 때에 나에게 의미 있는 말씀이 됩니다. 이 말씀을 단지 미가 선지자가 살던 때의 역사적 사건으로 본다면 내게 큰 이익이 별로 없습니다.


앗수르와 니므롯은 상당한 연관이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앗수르를 언급하는 것은 다분히 사마리아가 야곱의 수치라고 언급한 것과 연관된 것입니다. 그리고 니므롯을 언급한 것은 앗수르가 혼혈, 곧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세상의 가치관이 간음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니므롯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건설한 왕이자, 이방민족 최초의 왕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핵심적인 것은 바벨탑의 주역이라는 것입니다.


바벨탑의 본질은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그것을 쌓아 하늘에 이르자는 것에 숨어 있는데, 벽돌을 만든다는 것은 벽돌을 만들 때 볏짚을 넣는다는 점에서 사람(흙)이 그 자체로는 하늘에 오를 수 없다(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한다.)는 가치관을 가졌기에 사람에게 어떤 것(볏짚 등)을 더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사마리아의 혼혈정책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벽돌을 쌓는다는 것은 사람의 공적을 쌓고 쌓아서 하늘에 이르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사람의 공로를 쌓아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미가 선지자는 그런 가치관의 상징으로서 니므롯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앗수르와 니므롯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면 하나님이 만든 사람 그대로는 안 되고 세상의 가치관을 혼합하고, 공로를 쌓아야 한다는 신앙관, 가치관의 상징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가진 그런 가치관은 사람의 마음을 전쟁이 난 것과 같이 혼란스럽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이겨 더 높은 곳으로 가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 사이에도 전쟁과 같은 갈등을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평강이 없는 상태이고, 예수님이 평강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본성, 가치관, 신앙관은 이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앗수르와 니므롯이 침략할 때에 하나님께서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서 앗수르와 니므롯을 치고 우리를 건져내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일곱은 안식의 수요, 목자는 우리를 쉬게 인도하는 상징이니 침략과 같은 혼돈 앞에서 우리가 안식을 누리게 할 것이라는 뜻이고, 여덟은 안식 후 첫날 곧 성경에서는 늘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이므로 새로운 통치를 인하여 앗수르와 니므롯과 같은 신앙과 가치관에서 비롯된 혼돈과 다툼을 다스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과 연결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존재의 신이라는 하나님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그것에 의지한다는 것은 존재의 신께 의지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인간의 공적을 쌓아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겠다는 바벨탑이나, 사람의 정체성에 하나님의 의가 아닌 세상의 가치관과 간음하여 위대해지겠다는 것과는 대척점에 있는 것입니다.


존재라는 것은 그 존재 자체로 온전하고, 존재가 가진 본성을 인하여 나타나는 행동과 표현은 그 어떤 것으로도 이길 수 없는 것임을 먼저 이야기했었습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정체성은 세상의 가치관과 섞지 않아도, 또 사람 그 자체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뭔가 자꾸 행위로 의로워지려 하지 않아도 되는 것임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그 자체로 온전한 것임을 믿고 순종한다면 그것이 바로 평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신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은 발가벗겨진 사람의 정체성 그대로이고, 세상이 죄인 삼을 때에 이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모습을 보고서 그것이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에 예수님께서 보이시고자 한 하나님의 의가 내 안에 거하게 되고 그것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면 그 본성이 우리 육신의 삶으로 나타나게 될 것인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평강이시듯 우리의 삶을 평안하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강이라는 것은 지극히 안정된 상태이고 안정된 상태라는 것은 그 존재가 목적대로, 의도대로 존재할 때에 가장 안정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평강인 것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나님의 의를 보이시는 것이 오신 목적이고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이기에 그것이 평강이고, 그것을 보고 그 모습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 역시 예수님과 같이 평강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평강은 하나님이 주신 육신의 삶이 부족하기에 뭔가를 더하여 그 공로를 쌓아야 하나님 앞에 의로워진다는 가치관이 끊임없이 뭔가를 해야 할 것처럼 독촉하는 것에서 우리를 이기게 하고, 사마리아와 같이 위대하고 높아져야 성공이고 안정이라 유혹하는 세상 가치관과 간음한 심령이 주는 채찍질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평강이요 평안이요 안식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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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5:1-9)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Date : 2018. 9. 25. 10:06 Writer : 김홍덕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는 작은 것에서


미가 선지자는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베들레헴이 유다 고을 중에 작은 마을이라는 것을 언급합니다. 이는 흔히 예수님의 겸손함을 이야기하는 것에 사용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작은 마을에서 나신다고 하셨는데 지금의 사람들은 교회를 크고 화려하게 지어야 사람들이 교회에 올 것이라고, 또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모순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마을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크고 위대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크게 짓거나 가우디 성당과 같이 위대한 건축물을 지어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다스린다는 것인데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의는 작은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을 말하는 대명사이므로 이스라엘을 다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린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니 그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의가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민주국가는 민주주<의>가 다스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사람이요 하나님 의의 본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태초부터의 본성


이는 바울 사도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본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요한 사도가 예수님은 태초에 있었던 말씀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요한 사도가 말씀하시는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의 로고서, 곧 계획이자 의를 이야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미가 선지자가 태어날 아이의 근본이 태초에 있다고 하는 것과 연결되고 하나인 것입니다.


이 아이가 태초의 근원이라는 것은 모든 것의 시작이자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즉 사람의 모든 인지와 가치는 바로 이 아이의 본성인 하나님의 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로 표현되고 그 표현된 하나님의 의는 세상의 모든 인식과 가치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지창조가 <빛이 있으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즉 인식이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 인식은 당연히 하나님의 의에 대한 바른 인식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의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 의가 다스리는 사람, 그 의에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났으니 곧 베들레헴에 난 아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인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화려하고 크고 위대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고을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태초, 곧 하나님 의에 대하여 눈이 밝아지고 알게 되는 하나님 세계와 나라의 시작은 은 낮은 자리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가 선지자는 이 아이가 나기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떼)를 바벨론 곧 세상에 두신다고 합니다. 이는 한 사람의 심령 안에 하나님의 의를 인식할 수 있는 하나님의 빛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나기 전까지는 그 사람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생명으로 잉태되어 나면 그가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그 육신의 삶이 속 심령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본성으로 하는 행동과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존재의 하나님의 능력


이는 여호와의 능력과 그 이름의 위엄에 의지하게 된다는 말씀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의지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정체성에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이름은 곧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므로 존재의 능력과 위엄에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존재의 능력에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의 본성을 표현하는 능력이 있는데 이것을 이기는 것은 없습니다. 바위를 뚫고 싹을 내는 식물의 본성을 막을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마지막으로 하시는 많은 질문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즉 본성에서 비롯되는 본성의 표현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데 이것이 바로 존재의 능력, 곧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뭔가 안 될 때 하나님께 훈수 두듯 도와주시는 것을 능력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본성이 성령으로 인하여 속 심령 안에서 잉태되면 그 생명의 본성으로 살게 되는데 이것이 진정한 능력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히 그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면 그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어 그 삶으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을 막을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 사도가 위협이나 적신이나 칼이 그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한 것도 이것이고, 예수님께서 두려워말라고, 세상을 이겼다고 하심도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 곧 존재의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너무 평안한 것입니다. 존재가 존재의 본성대로 행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고 안정적이며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날카로운 칼도 용도대로 사용 목적대로 사용되고 있으면 주인도 칼도 안식이 됩니다. 그 보다 더한 안식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돌아온 백성, 곧 바벨론에 있었으나 자기 안에 베들레헴에서 난 아이와 같은 본성이 있는 사람의 안식이라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그리고 이것은 땅 끝까지 미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 개인의 삶으로 볼 때 그 사람의 모든 삶에 미치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땅은 흙이며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라고 하셨기에 땅의 끝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의지하는 것이 땅 끝까지 이른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에서 비롯된 생명이 그 사람의 삶에 미친다는 것입니다. 즉 사나 죽으나 하나님을 위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땅 끝은 한 사람의 끝이기도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도 미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그 사람의 심령 안에 베들레헴에서 난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능력과 의지와 안식이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당연히 그 사람은 생물학적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 곧 그리스도의 본성에 순종하고 그 본성이 자기 생명이 된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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