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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4:9-13) 오히려 평안이 없는 신앙생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Date : 2018. 9. 23. 09:21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삶이 평안해질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건강도 회복되고 사업도 잘 되고, 자녀들도 자기 꿈들을 이루어가는 평탄하고 평안한 삶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마로 중요한 것이 있는데 평안과 잘됨과 복됨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의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이라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 우러러 보는 것이 아니고 평안도 단지 육신의 생각과 몸이 평안한 것이 아니며 자녀 또한 세상의 일이 잘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성공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이 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면 그것이 그 사람과 하나님의 성공이고, 복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복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성공이나 복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큰 다툼이 일어나면 서로 상대방을 하나님의 원수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것은 자기 생각과 의로움을 기준으로 두고 그것이 하나님의 생각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아 하나님의 행사를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미가 선지자는 바로 앞서 까지 하나님의 회복을 이야기하다가 다시 해산하는 여인과 같이 낳고 들에 거하고 바벨론(세상)에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사람들의 바람과는 전혀 다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평안해 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해산하는 고통과 들에 거하는 곤고함과 세상에서 무시당하는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수도원에서 금욕적인 삶을 살고, 신부나 수녀와 같이 살고 또 때로는 몸을 괴롭게 하기 까지 자신을 경건하게 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는 자기 의에 매몰된 것입니다. 그게 좋은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평안도 아니고 금욕적이고 스스로 고난을 받는 것도 아니라면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그 둘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안목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안 보인다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맹인이고,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보게 하신 것은 바로 이것이 보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이 온전하게 보이지 않으면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의 복이라 생각하거나, 아니면 세상의 모든 것은 부질없으니 그것을 멀리하고 자신을 학대하듯 하면서 육신의 본성을 제어하면서까지 하나님을 믿는 생각만 하고 세상일은 생각지도 않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의 예언과 같이 하나님의 회복이 있다면 그것은 육신의 평안이 목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삶이 지으신 뜻대로 사용되는 목적의 일치성에 기인한 평안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쟁하는 칼이 칼집 안에 있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피를 묻히기도 하듯 육신의 삶도 평안하기도 하고 또 반대로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대로 사느라 육신이 곤고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은 사람들은 세상의 일과 자기 삶의 일을 자기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을 선하게 여기는 자기 기준으로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고서 악하다고 여기는 것을 버리고 멀리하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육신이 곤고해지거나 뜻대로 되지 않으면 이내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잘못했나?’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단지 평안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회복은 마치 여인이 해산하여 아이를 낳듯 어렵게 얻는 것이고, 들에 거하고 바벨론 곧 세상과 마주하고 그 속에 거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금 많은 신앙인들이 세상을 멀리하고 교회와 교인들로서 자기 사회를 형성하는 것을 바라고 그것이 좋은 신앙이라 여기는 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짐이 가볍다고 하셨는데 왜 이것이 여인이 아이를 해산하는 것과 같이 어렵다고 하셨을까? 이는 사람의 생각을 인함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그 존재하는 목적대로 사용되는 것이 가장 쉽고 평안하고 안정된 것입니다. 오른 나사는 오른쪽으로 돌리면 그 이상 쉬운 게 없는데 그 별거 아닌 작은 나사도 반대쪽으로 돌리면 그렇게 어렵듯, 성경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렵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자신의 삶을 보기에는 자기 생각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 생각을 벗어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돌아와서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믿으려면 세상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을 줄이고 교인들과 예수 믿는 사람들과 어울릴수록 좋은 삶이라고 여기지만 미가 선지자의 말씀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회복과 구원은 들에 거하게 되고, 바벨론과 같은 이방인들이 무시하고 죽이려 드는 그 자리로 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목적, 곧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기 위하여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난다는 것은 그것이 드러났을 때 표시가 나고 구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흰색도화지에 흰색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려서는 표시가 나지 않지만 검은색 도화지에 흰색 크레파스로 그리면 확연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의가 없는 세계에서 표현되는 것이 더 온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 압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성전에서 거룩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장 밑바닥인 사형수의 틀인 십자가에서 벌거벗겨져서 고상할 것 전혀 없는 모습으로 처형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났고, 그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삶이라는 것은 세상과 분리되어 세상의 악함과 접촉도 하지 않는 것을 청결로 여기는 그런 삶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의 예언과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위하여 한 아기가 태어난다고 5장에서 말씀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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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4:6-8) 저는 자들의 나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Date : 2018. 9. 19. 10:45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는 저는 자를 모으고 쫓겨난 자와 또 하나님께서 환난 받게 한 사람들을 모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세상에서 버림받듯 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귀하게 쓰임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고,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실패라는 친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다 실패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위로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시험에 실패한 사람, 취업에 실패한 사람, 결혼이나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을 모아서 그들이 다시 시험이나 취업이나 결혼이나 사업이 잘 되도록 해 주시고,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세상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성과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고, 그것을 유지하고 더 나아지기 위하여 하나님께 헌금하고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자기 힘으로 도전하다가 실패하고서 하나님께 의지하여 다시 그것을 도전하는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도우시는 분도 아니고, 그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시는 분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힘을 빌려 사람이 자기가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루는 것을 간음한 것이라고 책망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세상이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악하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한 계획을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 가치관이 먼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위대한 것을 추구하는 존재로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원래 연약하게 지으신 것입니다. 사람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온전하고 만족스럽다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위대한 것을 이루기 원하셨다면 모두를 슈퍼맨과 같이 창조하시지 못할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연약한 존재로 만드신 것이 원래의 뜻인데 사람들이 이와 반대로 크고 위대하고 높은 것을 추구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세상의 가치관을 좇다가 실패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모으신다고 하신 것은 그런 실패에 재도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빌리고 그 하나님의 능력을 얻기 위하여 예수 믿는다 하고 성경을 지키는 사람들을 모으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관점인데 성경이 말하는 실패자와 그에 대한 회복의 은혜는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을 이루는 것에 관한 실패와 그것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것을 말하고자 했다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놀라운 능력으로 내려오셨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못하신 것은 하나님의 의와 생명과 본성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모으시겠다고 하시는 저는 자와 쫓겨난 자와 환난을 받은 사람은 단순하게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는 일을 실패하고 다시 도전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끊임없이 도전하는 가치관, 그렇게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눈에 그런 시도도 하지 않는 사람으로 비치는 완연한 실패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해서 내려 오셨다면 세상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사업에 실패했다가 교회에 다니면서부터 성공했다, 기적과 같은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중요한 것인데 오늘날의 교회와 신앙인들은 이것과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말하는 저는 자, 쫓겨난 자, 환난을 당한 자는 세상의 실패 앞에서 <이것은 내 인생의 목적이 아니구나!>라고 깨달은 사람, 그런 고백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노력했다가 실패하고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더니 실패했구나, 이제 하나님을 의지해서 다시 시도해 봐야지!’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것은 이런 성공을 위한 것이 아니구나!’라는 고백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 이런 고백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사람에 대하여 가지신 뜻과 우리가 좇았던 세상의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는 자신이 정해진 자리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백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성경을 거꾸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신앙을 향하여 사마리아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는 이들의 수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치라고 여기는 세계에서 쫓겨나고 그들이 볼 때 저는 자와 같이 온전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환난을 당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께서 뜻하신 의대로 정체성을 회복한 자들이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의가 통치하는 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영원한 왕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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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선지자는 사마리아와 같은 신앙의 종말을 맞이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모든 가치관보다 더 높고 온전한 것임을 아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율법이 나오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이기에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그 사람이 곧 하나님의 전인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하나님의 의가 세상의 다른 산들보다 더 온전하고 높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미가 선지자는 그런 사람들은 자기 포도나무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무 아래에 앉게 된다는 것은 곧 안식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 나무가 바로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에게 포도나무가 있고 또 무화과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래에서 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무엇일까? 즉 어떤 것 아래에서 쉬게 된다는 것일까? 성경에서 포도나무는 특별히 말하지 않아도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또 무화과는 이스라엘의 나라목(木)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향하여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신 적이 있는데 그것은 나다나엘이 이스라엘의 율법 아래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열매의 때가 아닌데 열매가 없다고 저주하신 것도 무화과 곧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열매라고 할 만한 것을 내어 놓아야 하는데 그것이 없었기 때문인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에 속하는 의이자 자격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의와 그리스도의 성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아래에서 안식을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그리스도의 품성을 인하여 안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미가 선지자는 <자기> 포도나무, <자기> 무화과나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고 또 그리스도의 성품이 있어 그것을 인하여 안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는 하나님의 전과 같은 사람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서는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고 또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와 그리스도의 성품이 있음을 인하여 안식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와 그리스도의 성품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빼앗길 리도 없고, 자기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기에 두렵게 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빼앗기지 않는데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현금을 들고 있을 때는 불안해도 자기 이름으로 된 통장에 들어 있으면 안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없고 그리스도의 성품이 없기에 그것을 얻으려고 끊임없이 성경을 지켜 행하려고 하고, 그런 노력 이면에 노력해도 이르지 못하기에 얻지 못함을 인하여 쉬지 못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신앙 안에는 계속 수고하니 안식이 없고, 또 자기가 가진 신앙을 행여 행위로 실수하여 잃어버릴까 늘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신앙의 온전함을 이루기 위하여 세상의 시스템과 가치관을 가지고 와서 자기의 것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마리아와 같이 간음한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기에는 수치스러운 것이 되는 것이 되고, 그런 신앙은 또 다시 반복적으로 그 안을 돌고 돌며 불안해하고 서로 다투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런 사람과 신앙을 자기의 신을 좇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신의 신은 바로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좇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노력해야 한다고 여기는 신앙, 성경을 지켜서 의로워져서 하나님께서 자신이 바라는 세상의 성공과 육신의 복락을 보장하기를 바라는 그 신앙이 옳은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자기 신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의 신은 신의 정체성이 무엇이든 자신이 규정한 것을 말합니다. 즉 존재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행위에 반응하여 축복을 주시는 분으로 간주하는 것이 바로 자기의 신이라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있고, 그 두려움을 인하여 늘 전쟁을 연습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포도나무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쉬는 사람, 곧 자기 안에 하나님 나라의 의과 그리스도의 성품이 있는 사람은 두렵지도 않고 언제나 앉아서 안식할 수 있으며, 자기 육신으로 살아가는 그 삶ㅇ이 온전히 율법을 다 지키는(율법이 나오는) 삶이고 또 그 삶이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심이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셨던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는 삶이 된다는 것을 미가 선지자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영원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의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의이기 때문에 그 정체성은 당연히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귀속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먹는 한 알의 사과는 먹어서 없어지는 것 같지만 the Apple이라는 영원한 사과의 정체성에 귀속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이 영원함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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