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2) 불기둥, 구름 기둥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3. 10. 15. 20:47 Writer : 김홍덕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으므로 구원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성경에 기록된 여정이 40여년이라 구원의 여정 또한 그렇게 길 것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성경의 시간은 달력을 넘기듯 가는 시간이 아니다. 12시가 점심시간이 아니라 배가 고픈 때가 점심시간인 개념이다. 달력의 시간은 크로노스, 상태의 시간은 카이로스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성경의 시간은 카이로스의 개념이다. 구원의 여정이 달력으로 40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는 상태까지의 단계적 흐름이다. 그래서 생명이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의 여정은 생명이 성장하는 것 같은 흐름이다. 하나님은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대하는 것이 달라지듯 이스라엘을 이끄신다. 출발하자 강한 이방 민족 블레셋을 만나지 않도록 홍해로 이끄셨다. 전쟁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 돌아갈까 염려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구원의 여정을 갓 시작한 이들에게 적절한 이끄심이다.

 

물론 블레셋을 피해 더 심각한 홍해로 이끄셨다는 걸 두고 더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게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홍해는 일단 건넌다면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게 이유일 것이다. 물론 홍해를 건너기 위해서는 기적이 필요했지만, 홍해가 갈라진 건 단지 구원은 기적이 필요한 은혜라는 걸 보이시기 위함이 아니라 세례, 즉 애굽이나 세상의 가치를 좇아서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통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지 않게 한다. 블레셋을 만나면 다시 돌아갈까 염려하신 것과 대비된다.

 

그렇게 구원의 여정이 시작되자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나타나 이스라엘을 인도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구원이자 하나님께서 뜻하신 인생의 자리(정체성)는 사람이 가보지 않은 자리기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단지 길 안내를 위해 나타난 하나님의 기적인 건 아니다. 애굽, 곧 세상의 가치를 떠난 구원의 여정은 율법적인 과정을 거친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율법적인 신앙 여정의 상징이다.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넌 이후 여정은 광야와 사막의 여정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 요한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쳤고, 그래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고, 무엇보다 여자가 낳은 자, 곧 율법의 세계에서 가장 큰 자라고 했다. 예수님 이전에 세례 요한이 있었듯,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전엔 광야의 여정이 있다.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자, 존재의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을 얻으려면 율법적인 여정은 피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우선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사막과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존 환경을 제공한다. 낮에는 그늘 하나 없고, 밤엔 매우 추운 광야를 낮에 구름 기둥 아래 그늘을 따라 진행하고, 추운 밤에는 따뜻한 기운을 제공한다. 그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의미다. 지키면 살고, 어기면 벌을 받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율법을 지키는 삶의 모습 그 자체다.

 

이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볼 차례다. 우리가 교회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하지 않으면 큰일 나(벌 받아)'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너무나 일상이 되어 있어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게 오히려 정상처럼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행동이 기도나 십일조라고 할 때 그게 자기 생명의 본성이라서 하는 게 아니라 벌을 받지 않겠다는(혹은 상을 받겠다는) 목적과 이유로 기도하거나 헌금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벗어나면 안 되는 상황과 같다. 그러니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니 해야 한다'라고 설교하고, 그 설교를 듣고 그렇게 노력하는 신앙은 모두 율법적인 신앙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온전한 구원에 이른 게 아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여정에 나타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며, 내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능력 있는 신이라는 자부심은 아직 온전한 신앙이 아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 하늘의 뜻이 이루어진 땅과 같은 흙으로 창조된 사람이 되기까지 여정 중에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초입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서 머물며 아직 어리고 온전하지 않은 신앙을 심화시키려고만 한다. 어떻게 하면 더 성경을 잘 지킬 수 있는지 연구한다. 신학이란 게 그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에 이르지 못한 구원의 초입에 머물며 반복적인 노력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신념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에 대한 연구다. 거듭나서 생명이 되면 거저 그리스도로 살 수밖에 없는 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고 삶인데, 그 하나를 모르니 노력하지 않으면 쓰러진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서 신념을 가지고 노력한다. 그게 율법적인 신앙이다.

 

당연히 율법적인 신앙으로는 온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율법적인 신앙을 건너뛸 수는 없다. 누구나 그런 여정을 지난다. 세상 가치를 사모하는 삶을 대변하는 애굽의 국고성을 쌓는 종으로는 살 수 없어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듯, 율법적인 삶의 모습은 광야의 삶에 머물 수 없어 요단강을 건너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없는 지경에 이르러야 구원이 성취된다.

 

다만 이 여정은 달력의 세월로 얼마를 충족해야 하는 개념이 아니다. 세상 가치를 버림과 동시에 율법적인 신앙도 함께 버릴 수도 있다. 반대로 모태 신앙이라고 해서 세상 가치를 좇는 삶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이 귀하다고 하는 걸 얻으려는 건 모양은 기독교인이나 실상은 애굽의 국고성을 쌓는 종이다. 말 그대로 '때가 차면'이란 조건이 성취되면 된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존재인 사람이 애굽이나 광야에서 머물 수는 없다. 지금 내가 율법적인 신앙에 속했음을 알게 된다고 실망할 게 아니다. 이건 여정이고, 생명의 자람과 같다. 지금 내가 세상이나 율법 세계에 속했다는 걸 시인할 수 있다면 오히려 축복이다. 실상의 삶은 세상에, 율법 세계에 있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구원받았다고 믿는 게 문제다.

 

곤경에 빠지는 건 몰라서가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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