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이 죽임을 당하자 애굽의 왕 바로는 그제야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러 가는 것을 허용한다.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 막을 내린 것이다. 장자의 죽음으로 마무리된 출애굽은 세상 가치를 떠나는 게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것임을 설명한다. 출애굽을 바로의 고집과 하나님의 재앙이라는 대결 끝에 바로가 패배한 것에 한정해서 이 일을 조명하면 곤란하다. 다시 한번 출애굽은 각 사람 심령 안에서 일어나는 구원의 과정이란 걸 상기하자.

 

출애굽 당시 양식으로 쓸 빵을 준비할 시간조차 없이 그냥 애굽을 떠나라고 하심에서 구원은 아주 신속하고 단호한 세상 가치와의 이별을 요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출애굽 당시를 보면 애굽은 10가지 재앙으로 이미 저항할 힘이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아마도 애굽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들 그림자만 봐도 혼비백산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게 정상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호되게 당했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요구하는 각종 귀금속이나 재물을 거저 내 줄 정도였다. 그런 상태라면 굳이 빵도 준비하지 못할 정도로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신속하게 떠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이 서두름은 세상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느긋하고 여유롭게 관망하듯 떠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왕 역시 얼마 후 정신을 차리고 군사를 동원해 애굽을 떠나는 이스라엘을 추격했다는 것에서 하나님 말씀의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세상 가치는 우리를 구원으로 쉽게 배웅하지 않는다. 출애굽 과정은 이렇게 세상 가치를 떠나는 구원은 단호하고 신속한 결단이 있어야 함을 우리에게 말씀한다.

 

그러나 이런 단호한 결정은 생각보다 쉬운 게 아니다. 430년간 지긋지긋하게 노예로 지냈으니 금방이라도 떠날 수 있을 것 같지만, 반대로 애굽을 벗어난 곳에서 삶은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구원도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이 죄와 사망 가운데 거하는 삶이었다는 걸 깨닫는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은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다. 선뜻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만을 믿고 나서기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진정한 믿음이 필요하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세계다.

 

구원받은 삶은 사실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

 

만약 지금까지의 삶과 신앙이 온전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면 그 자리를 떠나는 게 합리적이고 상식적이고 온전한 것이다. 우리가 육신 가진 인생으로 살며, 육신이 속한 사회에서 습득한 상식이나 이성은 어쩌면 이런 때를 위한 것일지 모른다. 구원받았다면서 회개하는 자기 모습이 모순이란 걸 알게 되었다면,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라곤 세상에서의 평안과 성공뿐이란 걸 알게 되었다면 그때까지 삶을 떠나야 한다. 모순이고 온전한 신앙이 아니란 걸 알고서도 머문다는 건 명백히 그릇된 것이다. 게다가 이전의 삶이 가진 유혹이 떨치기 힘든 것이라면 애굽을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신속하게 떠나는 게 정답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한국처럼 교육 수준이 높고 아주 높은 수준의 이성을 가진 사회에서도 신앙이란 가면 뒤에 숨은 육신의 소망이 다른 사람이 하면 미신적이라는 행동을 서슴지 않게 한다. 신권으로 헌금하는 정성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합리적이지 않음에도 믿는 것 같은 게 그것인데 평안과 부유를 바라는 간절함이 신앙의 모든 의도를 어둡게 만든다. 그런 모습들은 분명 신앙이라기 보다는 자기 최면이나 요즘 말로 정신 승리일 뿐이지만 이제는 오히려 교리가 되어가고 있다. 신앙이란 장막 안에서 정성이란 이름으로 회칠한 육신의 간절함이 이런 불합리가 하나님 말씀이나 상식을 삼키고 있다.

 

특히 이런 자기 최면 상태에선 간간이 자기 신앙의 모순을 깨달아도 그 모순을 타개하는 계몽이나 결단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심각한 문제다. 구원은 모든 죄를 씻고 하나님 아들이 되는 것이라 믿는다면서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는 회개부터 하는 게 분명 이상한 일임에도 문둥병자처럼 아무렇지 않다. 이렇게 누적된 어이없는 모순들은 신앙인 대부분에게 이때껏 유지해온 신앙의 형태를 벗어나면 그렇게 바라는 육신의 평안과 번영이 날아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그 두려움이 이성적으로 분명 이상하고 모순적임을 깨달아도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에 안주하게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건 사람의 생각이고 하나님은 사람의 그런 자기 최면을 일절 용납하지 않는다. 사람이 그런 신앙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과 은혜를 얻을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건 하나님을 기만하려는 시도일 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다. 이걸 외면하는 걸 양심에 화인을 맞은 상태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이런 미온적인 태도는 신앙의 왜곡을 낳는다. 하나님의 의도와 다른 믿음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할 형식으로 육신을 주셨는데 사람은 그 육신을 하나님 은혜와 영광의 척도로 착각하고 어떻게든 육신의 번영을 갈망하는 게 그 왜곡이다.

 

현대 기독교 신앙의 진정한 신이자 주인은 사실 자기 육신이다.

 

이렇게 왜곡된 신앙은 육신이 평안하면 하나님의 은혜고, 육신이 곤경에 처한다는 건 하나님이 벌을 주셨기 때문이라 믿는다. 육신을 본질과 척도로 삼는 것이다. 육신의 형편과 상태 그리고 바라는 바가 모든 걸 결정한다. 육신을 본질로 보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척도로 보니 자연스레 하나님의 뜻이나 의도 심지어 사람을 향한 목적까지 육신의 어떠함에서 찾는다. 결국 육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가 하나님의 생각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행위와 소유의 신으로 왜곡한다. 이건 십계명부터 어기는 것이지만 신앙의 모든 걸 볼모로 잡은 육신의 평안과 번영은 육신의 행위로 의로워진다고 믿게 된다.

 

하지만 거듭남이란 구원은 생명이 바뀌는 것이다. 자기 행위로 인해 구원이 없어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는 건 생명이 아니라 행위가 기준이기에 이미 모순이다. 또 인생은 자신이 선택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 말하면서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인생이 될까 두려워한다는 관점에서 봐도 분명한 모순이다. 이처럼 육신에 거하는 사람에게 육신을 본질로 보는 생명 없는 가치관과 신앙관은 구원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중력 같은 힘이다. 이 어두움과 두려움으로 관철된 신앙은 언제라도 우리를 애굽에 붙잡아 두려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허리에 띠를 띠고 지팡이를 들고 마치 5분 대기조처럼 구원의 절기인 유월절을 지키고 기념하라고 말씀하신다. '여기가 있을 곳이 아니구나!' 깨달았다면 즉시 떠나는 각오로 구원을 간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어떤 계기, 어떤 말씀을 듣고 자신의 신앙이 육신의 평안과 번영을 바라는 어리석은 희망에 매몰되어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면, 구원받았는데 왜 회개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면 즉시 그리고 아주 단호하게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 이런 신속하고 단호한 결단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게 허리띠를 띠고 지팡이를 들고 유월절 규례를 지키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다만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 이전의 삶을 버리는 데에는 또 다른 두려움도 있다. 그건 바로 구원은 경험해보지 않은 삶이자 미지의 세계다. 예수님의 여러 말씀처럼 구원받은 삶은 세상에 없던 것이다. 세상에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으로 오실 이유가 없다. 세상에 있다면 그걸 활성화해서 사람이 보게 하면 될 일이다. 세상에 없었기에 하나님 아들이 직접 육신으로 오셔야 했다. 그만큼 구원받은 삶은 사람에게 미지의 세계다.

 

바로 이런 이유로 믿음이 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성이라 불리는 건 아브라함이 보여준 태도가 믿음이라는 의미다. 아브라함은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 말씀 하나를 믿고 떠났다. 지시할 땅이 도무지 어딘지도 모르는데 이전 삶을 모두 청산하고 떠난 것이다. 이건 사막이나 밀림에서 살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문명화된 도시의 삶을 모두 청산하고 떠난 것과 같다. 그리고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역시 아직 어딘지도 모르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추상적 장소를 향해 떠났다. 이처럼 지금 그 자리가 온전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떠나기를 바라는 자리란 걸 인지했다면 즉시 떠나는 게 믿음이다. 십일조 잘하면 이생에서 부자가 되거나 죽어서 천국에서 부유할 것이라 믿는 건 믿음이 아니다.

 

구원은 신속하고 단호히 이전 삶을 떠나는 것

 

구원은 이처럼 신속하고 단호한 회개(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섬)와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오늘 자기 신앙이 사람이 가진 상식으로도 모순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속히 회개하고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 그런 결단 없는 구원은 없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만 먼저 자기 자리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는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다행히도 온전한 여호와 하나님, 존재의 신을 찾고자 한다면 언제나 만나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셨다. 이 믿음이 있다면 지금이 온전한 신앙이 아니라는 의심이 들 때 하나님을 부르면 응답하신다. 어쩌면 이 글도 그런 부름의 소리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부른 하나님은 당연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즉 하늘의 뜻이 이루어진 육신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그게 유월절로 설명한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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