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출애굽 과정에는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게 있다. 금은보화, 곧 돈 이야기다. 애굽을 떠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사람들에게서 금은보화를 얻어서 떠났다. 430년 노예 생활의 급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출애굽이란 게 세상 재물과 가치를 상징하는 애굽을 떠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출애굽의 목적에 반하는 사건이 아닌가 생각할 여지가 있다. 실제 오늘날 기독 신앙은 재물을 탐하는 것은 물론 바라는 것도 터부시하는 경향이 없잖아 있다. 구원받은 신앙인에게 돈은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여기서는 출애굽기 전체적인 흐름에서 좀 도드라지는 면이 있어도 '' 이야기를 좀 하려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존재의 신인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게 이 글에서 말하는 구원의 기본 뼈대다.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건 여호와 하나님, 곧 존재의 신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게 아님을 설명해왔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될 것인지를 믿는 게 존재의 신을 믿는 믿음이고 구원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믿음과 구원은 왠지 육신의 평안과 번영을 가져다주는 금은보화, 즉 재물은 멀리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을 준다.

 

그러나 사람은 돈 없이 살 수 없다. 이건 명백한 현실이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육신이나 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세상 일부다. 즉 존재의 신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돈 없이 살 수는 없다. 이런 상충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쉽게 자유로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이 세상을 의미하는 애굽에서 특별히 수고하여 얻었다고 말하기 힘든 재물을 가지고 애굽을 떠나고 있다.

 

우리가 생각할 건 돈에 관한 관점이다. 돈이 목적이나 본질 또는 하나님 은혜의 척도인 것과 수단인 것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르다. 한마디로 돈을 본질이나 목적으로 삼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삶의 수단으로 인식하는지의 문제다. 이건 표면적으로는 아주 비슷한 문제지만, 실상은 구원의 문제, 구원받은 사람이냐 아니냐의 차이다.

 

신앙인에게 있어 돈 문제의 결국 어떤 사람이냐의 문제다.

 

사람은 돈을 보는 자기 관점을 바꾸면 돈에 대해 경건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관점을 바꾸는 것인지, 아니면 관점은 생명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니 생명을 바꾸는 것인지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결국 이것 또한 구원과 거듭남의 문제이다.

 

돈을 목적으로 보는지 수단으로 보는지는 의외로 하나님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느냐로 구분된다. 돈을 본질로 보는 사람은 하나님께 세상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며 기도하고, 그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육신으로 성경을 지켜내려 한다. 반대로 돈이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살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사람은 하나님께 돈을 구하지 않는다. 먹을 것 입을 것도 딱히 구하지 않는다. 그런 모든 건 살고 있는 사회에서 구하는 방식을 따라 구한다.

 

하나님을 기도하고 간구하면 돈을 주시는 신으로 믿는 사람은 육신을 삶의 본질로 보고 육신의 평안과 성공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 믿는다. 이런 사람에게 돈은 그저 목적이다. 돈으로 대변되는 육신의 형편이 곧 하나님 은혜의 척도라는 건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처럼 육신의 삶을 본질로 보는 신으로 믿는 신앙이다. 이건 분명 하나님을 존재의 신 여호와로 믿는 신앙이 아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에게 애굽을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많은 재물을 빼앗듯 얻어서 떠나는 건 구원은 곧 육신의 평안이라는 자기 믿음을 확신하는 착각을 낳게 한다. 마치 육신의 문제 해결이 구원인 듯, 또 구원은 곧 육신의 형편 개선인 양 믿는 일반적인 기독 신앙을 보증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이건 회칠한 무덤과 같다.

 

돈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수단으로 여기는 가치관을 가지려면 먼저 바로 잡아야 하는 게 있다. 바로 육신에 관한 관점이다. 육신을 하나님을 표현할 형식이자 도구로 보는 관점이 있어야 한다. 이 관점이 없는 사람에게 돈은 절대로 수단이 될 수 없다. 사람은 삶의 한 절에서 경험하는 깨달음으로 이게 바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관점은 생명이 바뀌어야 바뀐다. 돈이란 한 가지를 두고 목적으로 보는 가치관이 수단으로 바뀌는 건 생각만 바꾼다고 되는 게 아니다. 섞은 고기를 양식으로 알던 늑대가 냄새나는 부정한 것으로 보는 양으로 거듭나듯 생명이 바뀌어야 한다. 즉 구원이 있어야 한다. 구원 없이 돈에 대한 가치관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돈은 노력이나 다짐으로 돈에 대한 관점이 바뀌지 않는다. 물론, 이건 비단 돈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 전체가 그렇다. 생명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뀌고 가치관도 바뀐다. 한 마디로 구원받으면 굳이 별다른 조치나 관점을 전환하려는 노력이 없어도 그 사람에게 돈은 그저 수단이 된다. 구원받은 사람,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건 무엇이든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된다. 돈도 마찬가지다. 있으면 있을수록 유용하지만, 그렇다고 없어서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사는 데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많은 재물을 취한 건 이제는 유월절을 넘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러 가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애굽에선 그 모든 금은보화가 세상 가치로 존재하지만,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사람에게 주어진 금은보화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이므로 그 육신이 사용하는 동안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의 제물과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에게 돈 문제 역시 구원의 문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로 거듭난 사람에게 돈은 있으면 있는 대로 또 없으면 없는 대로 그 삶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다. 또 부유하고 성공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나 영광으로 여기지 않고, 육신이 된 말씀대로 사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이니 숨만 쉬어도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그런 사람에게 돈은 수단이고, 이미 예비하신 세상의 법으로 충당하고 소비하며 산다. 그 자체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므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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