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9) 무교병과 쓴나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3. 10. 1. 05:42 Writer : 김홍덕

(1) 무교병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교병을 어린양과 함께 먹으라고 하셨다.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인 무교병을 먹으라는 건 부풀리지 않은 존재가 되라는 뜻이다. 이는 있는 그대로, 창조한 목적대로의 존재가 되라는 의미지 일상에서 항상 무교병을 먹으라는 계명이 아니다. 그러니까 누룩 없는 빵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라는 건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의 모습 그대로 일 때 임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누룩 없는 무교병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는 건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 외에 다른 의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는 고백

 

하지만 사람은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는 식으로 신앙을 생각한다. 세상이 좋다고 한다면 그것을 가미하는 게 좋은 선택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아주 비싼 전자 오르간을 설치해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일반화되고 오히려 좋은 신앙으로 인식되고 있다. 비싼 전자 오르간은 세상의 가치 기준에 의해 높은 가격, 좋은 물건으로 결정된 것인데, 그렇게 세상이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을 위해 사용한다는 건 하나님을 대단히 위하는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게 있다. 비싼 오르간을 좋은 것으로 가늠하는 세상 기준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심판의 기준이란 것이다. 나사렛이란 천한 동네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세리와 창녀와 먹고 마시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하나님은 세상의 가치로 가장 귀한 것으로만 대칭하던 유대인들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신성모독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진즉에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다. 유대인의 신앙 기준과 세상의 가치 기준을 조심하라는 뜻이다. 결국 예수님의 경계대로 그들의 누룩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유대인을 비난하면서도 더 열정적으로 세상 가치로 신앙을 조명하므로 바리새인을 능가하는 누룩이 되었다. 교회는 더욱더 세상이 귀하다고 가치를 부여한 자재로 건축하고, 교인이 세상이 성공이라 여기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 칭송하며, 간증을 청하고, 자녀들에게 본이라 가르친다.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막 8:15)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수없이 보는 이스라엘의 타락과 하나님의 진노와 그 진노에 이어진 재앙이란 전개에서 이스라엘의 타락은 대게 여호와 하나님을 완전히 버린 사건들이 아니다. 대부분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함께 섬긴 일들이다. 에스겔 8장에서는 심지어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이 서 있는 환상을 말씀하시기도 한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타락은 모두 <하나님 + 세상 가치>를 일컫는 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 외에 다른 것을 사람이 섬기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질투하신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무교병을 먹는다는 건 자신은 하나님의 어린 양의 의와 하나가 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삶의 가치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신앙 고백이다. 구원의 본질적 정체성과 맥락을 같이하는 신앙 고백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의가 나를 주관하도록 나를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이고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건 곧 그리스도가 되는 것, 즉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게 구원이다.

 

 

(2) 쓴 나물

유월절에 관한 말씀을 제외하면 성경에서 쓴 나물에 관한 말씀은 그리 많지 않다. 이곳 출애굽기 12장과 민수기 9장 정도가 전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은 모두 유월절에 관한 말씀이다. 종살이에서 벗어나는 유월절에 쓴 나물을 먹으라는 말씀은 누구에게나 그 시절의 어려움을 기억하라는 의미라 생각할 수 있다.

 

사람은 인생을 쓴 나물처럼 생각한다. 그 삶에서 벗어나는 게 바로 구원이다.

 

쓴 나물을 먹으라는 말씀의 의도대로 구원 이전의 삶은 쓴 나물을 먹는 것과 같은 삶이다. 그래서 사람은 인생을 한 단어로 '()'라고 정의하고, 그런 정의에 대부분 공감한다. 그런데 만약 사람의 인식 그대로 인생이 쓴 나물 같기만 하다면 하나님은 그야말로 고약한 신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우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신다. 다만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복과 소망이 다르다.

 

이제 애굽을 벗어나게 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쓴 나물을 대속 제물인 어린양과 함께 먹으며 여호와의 구원을 기념하라고 하신 건, 구원이란 사람이 생각하듯 괴로운 인생을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은 더 이상 쓴 나물 먹는 것 같은 삶이 아니다.

 

구원받았다면 구원 이전이 어땠는지 명백해야 한다. 무엇에서 구원받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건 구원받은 게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은 모두가 괴로움 그 자체라고 말하는 인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구원받았다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기쁜 삶이어야 한다. 그게 구원의 증거다.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삶이 쓴 나물로 대변되는 삶에서 구원받은 삶이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인생이 쓰지 않고 괴로움이 없다는 것에 대한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건 인생의 말초적인 부분까지 모두 기쁨으로만 가득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게 맞는다면 십자가는 고통이 아니라 희락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주시는 세상과 다른 기쁨은, 세상의 가치가 주는 기쁨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삶이란 구원의 정의와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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