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말하는 <아들>은 어떤 존재인가?

애굽에 임한 재앙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애굽에서 난 모든 장자, 사람 짐승 가리지 않고 모든 장자가 죽는 재앙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재앙은 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전 재앙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재앙이 임하지 않았지만, 이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요구된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유월절의 규례가 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인데, 이는 다음 편에서 다루기로 하자. 다만 그 정도로 이 재앙은 중요하다. 애굽에 임한 모든 재앙이 여기에 수렴한다.

 

우리는 먼저 아들이란 존재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여기서 딸을 이야기하지 않는 건 성경이 말하는 남자와 여자의 의미 때문이다. 즉 내용과 형식이란 관점에서 남자는 내용, 의를 의미하는 성경의 일관된 기준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건 육신의 성별 남자,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해 둔다. 무엇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아들의 정의를 분명히 알아야 10번째 재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건 단순히 '하나님 말씀 안 들으면 혼나?'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면 하나님의 자녀, 그것도 꼭 집어서 아들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도 이것이 육신의 성별 이야기가 아닌 걸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아들이라 칭하시는 이유를 안다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아들의 정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건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아들은 아버지를 잇는 존재다. 아버지의 모든 게 아들에게 이양된다. 누군가가 자기의 모든 걸 이양한다는 건 인수하는 이가 자기와 같은 의()를 가졌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모든 걸 부정하고, 악이라 규정하는 존재에게 자기의 것을 넘기는 사람은 없다. 그럴 바엔 모두 불살라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가 가진 의로움, 옳음과 목적과 뜻이 육신이 된 존재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를 이어갈 육신이란 형식을 가진 존재를 의미한다.

 

이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이 육신이 된 존재라는 의미다. 앞서서 아들이란 아버지의 의를 이어갈, 아버지와 같은 의를 가진 존재라는 설명과 맞아 떨어진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 곧 뜻이 육신이 되었기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런 아들을 그리스도라고 한다. 여기서 말씀은 LOGOS로 계획, 의도, 뜻과 같은 의미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 곧 기름을 부은 자로 삼으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런 아들의 개념으로 볼 때, 애굽의 아들들은 모두 세상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다. 특히 장자, 첫 번째 아들이라는 건 이후의 모든 아들 역시 세상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라는 뜻이다. 따라서 첫째 아들이란 애굽에서 나는 아들, 애굽의 가치를 수호하고 추구하는 사람의 의가 육신이 된 모든 사람을 대변하는 존재다. 그러니까 육신으로는 장자가 죽지만 실질적으로는 애굽의 가치를 의로 삼는 모든 육신과 그 삶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존재라는 선언적 사건이 10번째 재앙이다.

 

장자의 개념은 예수님께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예수님을 우리 구원의 첫 열매, 하나님의 아들 중 장자로 정의하는 건,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선언이다. 이건 한편으론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의가 육신이 된 삶을 사는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받은 존재로 여기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외쳐도 아들이 아니라는 분명한 선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죽이시는 재앙을 내리셨을까? 그리고 그때의 일이 수천 년이 지난 지금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보자. 이게 성경을 보는 실질적이고 본질적인 이유이고 의미다. 무엇보다 이 출애굽기는 나의 구원에 관한 말씀이다.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하지만, 이 재앙은 옛날에 있었던 이벤트가 아니다. 민족의 사건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오늘 내 안에 있는 자아의 이야기고, 나의 가치관에 조명된 자아 세계의 일이다. 이 재앙은 ''라는 존재가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삶으로 나아가고자 할 때 어떤 것이 망해야 하는지와 나는 죽고 예수님은 산다고 말할 때 무엇이 죽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애굽의 가치를 추구하는 ''라는 육신, 세상의 의가 육신이 된 삶을 사는 자아가 죽임을 당해야 비로소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존재가 된다는 걸 보여준다. 그렇다는 건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존재가 되지 않는 삶은 사망 그 자체라는 선언이다. 성경이 왜 구원 없는 삶을 어두움, 죄와 사망이라고 하시는지 명확하게 설명하는 사건이 바로 장자의 죽음이다.

 

생각해보면 구원이란 이때까지 내가 옳다고 생각하며 살던 삶을 떠나 다른 의로움과 가치를 새로운 본성으로 사는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난다고 하며, 그 새로운 생명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가진 생명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다. 살짝 첨언하자면 이런 생명의 변화,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새로운 생명이 되도록 하시는 이가 성령이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을 기억한다면 이해를 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처음에 잠깐 언급했듯이 '삼위일체'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구원은 필연적으로 이전 삶의 종말을 동반한다. 그건 필수적이며 피할 수 없다. 그 피할 수 없는 종말을 그리스도가 아니라 세상 본성을 가진 생명 안에서 보면 재앙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 안에서 보면 이 모든 재앙이 하나님의 나타내는 표징임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같은 사건이지만 생명이 다르면 다르게 본다. 썩은 고기가 늑대에겐 만찬이지만 양에겐 아주 더러운 것인 것과 같다.

 

너로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 가운데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출 10:2)

 

다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게 있다. 다른 재앙과 달리 장자가 죽는 이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게 있다. 바로 유월절이다.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듯 나의 생명과 본성이 애굽 그러니까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생명이 추구하는 양식이 세상 가치로 부풀려지지 않은 무교병이며 그리스도의 의를 의미하는 양의 뼈를 꺾지 않은 그 자체여야 한다. 이게 유월절이다. 이제 다음 회차에서 유월절을 이야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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