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에 임한 10가지 재앙의 마지막은 흑암과 장자의 죽음이다. 이번에는 그 중 흑암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흑암은 '어둡다'라는 의미다.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흑암은 단지 세상의 어두움을 말하는 것인가? 성경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책이 아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물리적인 빛을 밝혔다가 어둡게 했다가 하는 능력이 있음을 사람에게 보이시려는 것이나, 빛에 관한 주권으로 사람에게 재앙을 내릴 수 있다는 걸 보이시려는 게 아니다. 이건 인생의 밝음, 곧 인식과 안목에 관한 말씀이다. 인생의 의미, 살아야 할 이유와 삶의 목적이 보이느냐의 문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를 생각해보자. 창조 이전의 세계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이 말씀을 잘 상고해보면 빛이 있으라 하시기 전 이미 땅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땅은 혼돈 상태일 뿐 아니라 공허하고 깊은 흑암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요한복음 1장의 전개와 같다. 예수님께서는 어두움에 속한 사람들에게 비취는 빛이라는 말씀으로 요한복음이 시작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4-5)

 

성경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상태를 죄, 사망, 어두움으로 정의한다. 성경이 그렇게 정의한다는 건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의한다는 것이고, 세상을 창조하고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정의인 만큼 그게 실체적 상태다. 다만 우리가 서로를 볼 때 의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기에 성경의 이런 정의를 실감하지 못할 뿐이다. 그리고 이게 성경을 믿지 않는 이유이자 상태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두움이란 게 확정된다.

 

굳이 성경이 아니어도 우리 사회에는 문맹, 컴맹과 같은 말이 있다. 단지 단어가 아니라 개념이다. 글자를 모르는 상태를 문자에 어둡다고 하고, 컴퓨터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을 컴퓨터에 관해 어둡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세계, 어떤 개념에 대해 모르거나 바른 인식이 없는 상태를 어둡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그런 식의 표현이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겠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를 어두움이라고 표현하시는 하나님이 창조한 존재, 특별히 하나님을 표현할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그런 기본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어두움은 곧 하나님에 관한 인식이 없는 상태다. 하나님에 관한 인식이 없다는 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에게서 찾지 않고 다른 것, 예를 들어 진화론과 같은 데서 찾고 있는 상태 혹은 삶의 모습이다. 이는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출애굽기의 주제, '구원'의 핵심적 요소다. 그러니까 어두움을 벗어나는 게 구원이란 의미인데, 그건 곧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는 게 구원임을 설명한다.

 

물론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이 많고, 기독교나 천주교 등 성경을 경전으로 하는 많은 종교 안에는 구원받았다는 사람이 넘쳐난다. 때론 그 많은 수가 통계적으로 좁은 문, 좁은 길에 있는 사람일까 싶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이 아는 하나님이 과연 여호와 하나님, 나무는 타지 않는 불꽃으로 임하시며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말씀하신 존재의 신 여호와 하나님인지는 의문이다. 존재의 신으로서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와 하나님과 자신은 어떤 관계인지를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나 많이 언급했듯이 사람들의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 아니다. 기독 신앙 안에서 구원받았다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그저 성경을 행동으로 잘 지켜내면 행동의 주체인 육신의 삶을 풍요롭게 축복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들의 신은 나의 행동으로 감동하게 하면 행동하는 도구인 육신을 풍요롭게 하는 신이다. 이는 그들의 기도와 말로 확정된다. 그들은 늘 육신의 필요를 구하고, 행동의 결과가 하나님이 반응하는 이유인 것으로 말한다. 그게 신앙관이고 인생관이며 신앙적 철학이고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런 잘못된 하나님의 정체성은 진정한 어두움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아예 모르는 것보다 더 어둡다. 아예 모르는 상태는 '0'이라는 기준점에 머무는 것이지만 잘못된 개념은 '-' 상태, 즉 반대로 가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는 없다.

 

하여간 성경이 말하는 어두움, 흑암은 하나님을, 또 자기 정체성을 바로 알지 못하는 상태다. 그건 인생의 의미를 모른다는 읊조림으로 나타난다. 술주정처럼 하는 '사는 게 뭔가?', '태어난 김에 산다.' 말들이 왜 사는지를 알지 못하는 인생의 근원적 어둠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애굽에 내려진 흑암이란 재앙은 이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애굽 사람이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씀도 하고 있다. 자신도 왜 사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알아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도 왜 사는지 모르고, 사람이란 존재의 의미와 정체성도 알지 못하며, 세상은 또 왜 이런지도 모르는 온갖 혼돈 속에 있는 것, 이게 흑암이고, 천지창조 이전의 세계와 상태다. 사람들은 모두 이런 상태에서 거저 눈에 보이는 육신의 활동성을 생명과 삶으로 알고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그런 어두움에서 벗어나 밝음에 이르기를 원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두고 빛이라고 한다. 따라서 천지창조의 떄에 빛이 있으라 하신 말씀은 곧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고, 특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인생의 목적을 예수님을 통해 알게 되는 일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우리의 구원이다. 그래서 출애굽기가 구원의 말씀이다. 또한 재앙은 구원 없는 삶 그 자체다. 구원이 없는 삶은 어두움이니 아홉 번째 흑암 가득한 세상과 상태, 그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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