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6장에는 한 번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사람의 타락은 다시 회개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이는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는 “성령을 훼방한 죄”를 연상케 한다.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시고 이어서 귀신 들린 사람, 벙어리 된 사람들을 고친 것에 대하여 바리세인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린 것이라는 도전에 답하신 말씀인데 사람들은 특별히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에서 이 말씀을 기억한다.


그러나 굳이 경중을 따지자면 히브리서의 말씀이 더 심각한 것이다. 성령을 훼방한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생명을 잉태케 하는 성령을 훼방하면 당연히 생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알 것은 성령이 사람이 훼방한다고 그 하실 일을 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성령을 훼방한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사람에게 강제적이지 않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베풀고 보이시고 사람의 선택을 기대하셨는데 사람이 자기 육신의 정욕을 좇아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은 자기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도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지도 않는데 강제로 역사하시는 분은 아니다. 모든 것은 사람의 순종을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럼 사함을 받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기본적으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인데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 성령을 훼방한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이 구원을, 사함을 받을 법은 없는 것이다.


성령을 훼방한 죄가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다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성령을 훼방한 상태에서는 사하심이 없다는 말씀이다. 이는 사람이 성령의 참예하기 전 상태에서 성령이 역사하셔서 생명으로 거듭나는 단계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성령에 참예하고서 타락한 사람은 다시 회개할 수 없다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대상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거듭나야 다시 회개할 수 없는 사람이 되든가 말든가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서 타락을 염려하기 전에 먼저 구원부터 받으라고 설명을 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을 훼방하는 자가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과 성령에 참예하고서 타락하면 회개할 수 없다는 것에서 구원의 유일성도 함께 알 수 있다. 구원도, 성령으로 거듭남도, 회개도 단 한 번만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인생이 한 번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 밖에 없는 인생을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세우신 뜻대로 살기 원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유일하고 한 번 밖에 할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인생의 절대적 명제이고 인생을 걸어야 하는 문제지,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제 히브리서에 집중해 보면, 히브리서는 회개할 수 없는 타락을 멜기세덱에 대한 이해의 분량에 대한 언급에 이어서 말씀하고 있다. 멜기세댁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장성한 분량에 관한 것이고, 이 장성함은 세례와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대한 교훈을 복습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그 장성한 자리에 갈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시 회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세례와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심판에 대하여 온전하게, 또 장성한 자리에 이르지 못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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