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는 성령에 참예하고서 타락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그것은 먼저 성령에 참예했다는 것이다. 타락이란 당연히 성령에 참예함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고 그 자리에서 떠난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타락에 앞서 어떤 완전함을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타락은 그 완전함에서 떠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완전함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다시>라는 말이다. 완전함은 다시 하지 않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도가 온전히 다 이루어진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의 전개는 단계를 나눌 수 있다. 먼저는 “타락을 염려하기 전에”라는 글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 세상의 성공이라는 자기 육신의 정욕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며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는 신앙은 젖 먹는 단계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젖 먹는다는 것은 아주 어리고 미약해 보이긴 하지만 생명이 아닌 존재와는 그 존재 정체성의 격과 세계가 다른 것이다. 다 큰 개와 갓 태어난 아기의 존귀함의 차이 그 이상이다. 개는 생명이라는 범주에서는 그나마 살아는 있지만, 세상의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믿는 사람들의 신앙은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것이기에 땔감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늘 불에 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인지도 모른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 (히브리서 5:11-6:8) 타락을 염려하기 전에



히브리서가 말씀하는 대상은 그런 사람들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약속이 남아 있는 사람들, 행여 안식에 들지 못할까 염려해야 하는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 행위로 의롭게 되어 그 의로워진 행위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려는 장사하는 신앙이 죽은 신앙이라는 것을 알고 사람은 그 안에서 살 수 없음을 알고 그 자리를 떠나 큰 물을 건너 간 사람들(히브리인이라는 말 뜻이 큰 물을 건넌 자)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즉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행위를 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될 것인지에 관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 이 히브리서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이 히브리서를 대할 때 약속과 안식에 관하여 어둡고 모호하며 아직도 수고하는 신앙이라면 자신이 아직 이 말씀에 이르지 못했음을 깨닫고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히브리서의 말씀이 자신의 말씀이 되는 관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을 얻고, 하나님과 성경과 사람과 세상의 모든 일이 성령의 안목으로,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보게 되었을 때, 곧 자신이 거듭난 존재라는 것을 자기 삶을 볼 때 부인할 수 없게 되었을 때에 그때 이 말씀을 펴고 히브리서가 권면하는 장성함을 묵상함으로 완전한 자리에 이르게 되기를 소망하는 자리에서 이 말씀을 묵상하면 그 의미가 아주 분명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단계는 가시적이지는 않지만 이를 잘 보여주는 성경이 있는데 욥기다. 욥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지만 엘리후라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책망도 받고, 하나님께도 질문의 형식이지만 많은 책망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이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것을 말했다고 고백한다. 그 욥의 여정이 이 히브리서에도 설명이 된다. 타락을 염려할 대상도 아닌 사람들, 성경을 육신의 행위로 지켜서 육신에게 불행이 닥치지 않고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신앙을 가진 욥의 세 친구와 같은 신앙의 단계가 있고, 하나님은 행위로 성경을 지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기에 오히려 죽기를 구하는 욥과 같은 여정이 있고, 그런 과정을 지나 다시는 반복하지 않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완전한 자리, 타락할 수조차 없는 자리에 이르는 진정 장성한 분량의 자리에 이르는 것이다. 욥기가 더 이상의 갈등 없이 온전한 평안과 안식으로 마무리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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