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타락은 두렵고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만 생각해보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한 것이지 형벌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 성경을 보고 있다면 사실 염려할 일도 아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 29:11)


그러므로 이 구원받은 이후에 다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타락에 대한 말씀도 구원의 불안정성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거듭나는 것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생명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생명이 바뀌었다는 것은 본성이 달라진다는 것은 물론 생명으로 난 것이기에 그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으로 난 존재는 죽일 수는 있어도 그 생명으로 살았다는 것은 바꿀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구원은 거듭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육신으로 나서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보실 때 온전한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또 살았다고 여기는 존재가 될 때 비로소 산 사람이고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존재가 된다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그리고 이 구원에 대하여 예수님 이외에 다른 이름을 주신적이 없다고 하심에서 이것의 유일성이 선언되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단번에 드린 제사라고 하심도 그것이다. 구원이라는 것이 반복되거나 다시 하거나 보완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이라는 정체성의 본질로 봐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다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구원의 구원다움에 관한 것이다. 유명한 맛집을 평할 때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간 사람은 없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구원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신 인생의 존재 목적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은 그것으로 났다는 그것에 만족할 수 없다. 이것은 고백적인 것이다. 그런 자리, 그 생명의 장성함에 이르러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결혼이라는 것에 대하여 말로는 알아도 실제 결혼해서 사는 것과 다른 것과 같다.


이 히브리서의 주요 독자 그러니까 저자가 겨냥한 신앙의 대상들이 있다면 아마도 이제 갓 구원에 입문한 사람들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드리고 그 반대급부로 육신이 바라는 평안하고 성공적인 삶을 하나님께 구하던 신앙의 자리를 떠난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젓 먹는 이들은 알 수 없고 장성해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노력하는 신앙이 하나님의 뜻과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원이라는 것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단번에 되면 되는 것이고 아니면 아닌 것이지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기 때문에 노력한다는 것은 단일성과 유일성 그리고 생명 정체성의 불변성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구원은 받았는데 예수님과 자신은 다르며 예수님과 같아 지기를 노력한다고 하는 것은 구원이 없는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들은 구원받은 적이 없으므로 구원을 기준으로 한 타락은 없기에 타락을 염려할 것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함을 염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히브리서에서 말씀하시는 이 타락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앞서 맛집에 대한 이야기로 설명해 볼 수 있다. 맛집을 한 번 가 보았는데, 그 집이 어떻고 어디에 있는지 아는데 스스로 가지 않는다면 그것을 어떻게 할 방법은 없는 것과 같이 구원의 능력을 알게 되면 그것으로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이 구원을 얻을 때 하나님이 주신 선택의 권한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을 자기 운명으로 순종하는 선택을 했 듯,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대해서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기에 스스로의 결정을 인하여 다시 돌이킬 수 없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타락의 정체는 의외로 적지 않다. 먼저 타락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에 참예한 바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사람들이 흔히 이단이라고 말하는 종파들의 교주들의 경우 사실 일반적인 목사들보다 성경에 대하여 더 깊이 있는 것에서 시작한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사람이 따르는 것은 단지 그들이 사람을 미혹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존 교회, 스스로 정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온전히 알려 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남다른 성경에 대한 견해가 갈급한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기 때문이다.


문제는 성경에 대하여 깊이가 더해질수록 그 귀함에 취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그 귀함은 놀라울 따름이다. 그렇게 노력해도 되지 않던 것들에 대하여 성경은 노력이 아니라 생명으로 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귀함을 안다는 것은 정말로 귀한 것이다. 그 귀함에 빠지면 정말로 벗어날 수 없고, 그 온전함을 알고 나면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부인할 수 없는 것임도 알게 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귀함에 매료되었을 때에 간과하는 것이 있다. 바로 그 귀함의 정체이다. 존귀하신 예수님과 자산이 같은 존재임을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자부심은 정말로 놀라운 것이다. 성경에 있는 대로 더 귀한 것이 없고, 자신도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아들임에 감사하고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귀한 존재임을 내세우기 시작한다. 이를 상징하는 말이 “목사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라.”와 같은 말이다. 그것은 자신이 아는 하나님의 말씀이 귀하니 그것을 따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진정한 교주가 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모습은 구원을 알지 못하는 교회들에게도 있다. 그들에게 귀함이 되는 기준은 물론 신학이고, 그 신학으로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의 업적과 공로다. 당연히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다.


그러나 그 존귀함의 본질이 바로 사람들 앞에서 종이 되고 죄인이 되어 육신이 수고하는 것, 사람들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그 주장 앞에 자기는 내어주는 것임을 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성하지 못한 신앙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모습이 어떤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고,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시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려는 자들과는 비교 자체가 의미 없을 정도로 하나님에 대하여 온전하게 아실 뿐 아니라 귀하신 분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는, 아니 전혀 모르는 자들이 하나님의 의라고 주장하는 자기가 옳다는 주장 앞에 육신을 내어 주시지 않았는가? 바로 이 자리에 가지 않았음에도 자신을 장성한 자로 여기면 그것은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귀하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과 같이 귀한 존재로 거듭나게 하시기 위하심이므로 우리도 귀하다는 것을 아는 것에 이르렀지만 애들이 오냐 오냐하면 자기가 제일 높은 줄로 아는 것처럼 되는 신앙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이것은 정말로 구원을 모르는 자리에서 구원에 이르는 것과 비할 수 없는 돌아섬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얻게 된 귀함의 실체가 바로 세상에서 천하고 낮은 자리로 가는 것임을 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십자가의 본질이다. 그 본질을 버리고 온전한 구원을 누릴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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