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9. 17:38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불러서 약속한 땅으로 가라고 하시고 또 그에게 자손을 주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아브람이 99세가 되었는데도 아들은커녕 오히려 아내 사래가 출산할 수 있는 연령을 지나버렸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계속 자손을 주겠다고만 하시면서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얼마나 끈기가 있는지 보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아들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되는 것이다. 아들의 정체성은 아버지에게서 나오므로 아브람의 아들이 어떤 정체성은 곧 아브람의 의와 정체성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아브람의 정체성이 하나님께서 주시겠다는 아들을 얻을 수 있는 정체성이 되어야 아들이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라는 본토 아비 친척의 땅에서부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신앙의 여정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에까지 가야만 얻을 수 있는 아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 여정은 위치의 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상태의 이동이다. 아브람이라는 사람의 정체성과 본성의 이동인 것이다.


물론 아브람은 그 위치를 이동했다. 갈대아 우르에서 벧엘과 아이 사이 땅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애굽으로 갔다가 다시 그곳으로 왔고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땅 헤브론에 거하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히 몸이 땅의 위치를 옮긴 것이지만, 본질적인 것은 아브람이 있었던 땅은 아브람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표현하는 땅이었다. 즉 자기의 정체성이 이동한 만큼 위치도 바뀐 것이다. 즉 자기 정체성이라는 내용이 땅의 위치라는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제 아브람에게 아들을 주시려고 하신다. 그러면서 할례를 받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할례라는 것은 단순히 몸의 증표가 아니라 어떤 상태인 것이다. 할례는 하나님의 아들을 얻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삭이라는 아들은 아브람이 할례를 받은 신앙의 상태가 되어서야 얻을 수 있는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아들이라는 것이다.


할례는 할례로 표현될 수 있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그 상태를 할례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까 할례를 받을 수 있는 신앙의 상태가 된 사람이 할례를 받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냥 할례를 몸에 행했다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군인이 군복을 입는 것이지, 군복을 입어서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다면 이 할례는 어떤 의미인가? 할례는 신앙의 어떤 상태, 어떤 여정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할례는 남자 성기의 표피를 제거하는 것이다. 요즈음말로 포경수술이다. 이것은 껍질이 벗겨진 것에서 나오는 씨로부터 얻은 생명, 아들이 하나님께서 주시겠다는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형식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내용이 형식이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실 남자 성기의 표피를 잘라낸다고 달라지는 것은 크게 없다. 그것이 성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연구들도 있지만 통일되지 않고 서로 반박하는 내용들이 주기적으로 나올 뿐이다. 그러니까 할례를 하고서 얻는 아들과 그렇지 않은 아들이 육신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별반 다를 것이 없는데 할례를 받은 사람이야 뭐 그렇게 큰 차이가 있겠는가? 바울 사도도 할례가 유대인의 자격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롬 2:28)

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누가 할례를 받은 사람인가 하는 문제이다. 즉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이 하나님을 믿는 남자는 다 포경수술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아들은 껍질이 없는 신앙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자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껍질에서 비롯된 신앙, 몸의 할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외식하는 것이라고 하셨고, 몸에는 할례가 있지만 영혼의 할례가 없는 이들을 회 칠한 무덤이라고까지 하신 것이다.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그 삶이 속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삶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껍질에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육신이라는 형식이 어떻게 변한다고, 육신을 어떻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속에 있는 것이 나올 때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람의 신앙이 그런 상태가 되어서 얻는 아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한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아들을 얻는 것, 그것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든, 아니면 우리의 삶을 보고서 다른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든 간에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생명과 내용이 되어서 밖으로 표현될 때 아들이 되고 아들을 얻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아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시기로 한 아들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그 이름을 바꾸라고 하신 것이다. 이름은 정체성이다. 이제는 위대함의 아버지가 아니라 생명의 아버지, 많은 무리(민족)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람의 상태가 이제는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밖으로 표현되는 사람이 되었기에 할례를 받으라는 것이고, 그렇기에 이름을 이제 바꾸라는 것이다. 그런 아브라함에서 나는 아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하신 아들이요, 그 자손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에게서 아들이 나오는 것은 그야말로 내용이 형식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몸에 할례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생명인 사람에게서 나오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삶이고, 할례를 받은 삶이며, 그것이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요 삶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하시고, 그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라고 하신 이후에야 아들을 주신 뜻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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