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마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6. 14:20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셨지만 소식이 없었다. 아브람의 나이가 이미 80이 넘고 아내 사래가 경수(생리)가 끊어져서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래는 여종 하갈을 아브람과 동침하게 하여 아들을 얻게 되었는데 그 아들이 바로 이스마엘(하나님께서 들으심)이다. 사람들은 이 이스마엘이 중동에 사는 유대인 외의 많은 족속의 조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중동의 모든 분쟁의 씨앗이 아브람에게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약속한 것이나, 혹은 사람이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라든가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해야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한 일치고 제대로 된 것이 거의 없다. 사울 왕이 제사를 먼저 드린 것이 그것이고, 롯의 두 딸이 아버지의 씨를 받아 아들을 낳은 것도 그렇고, 바벨탑이 그렇다. 그리고 아브람도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얻은 것은 어떻게 보면 다른 측면도 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시겠다고 한 땅에 아브람이 도착했고,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아브람의 신앙 여정이 많이 장성하고 하나님께서 평강의 왕을 보내어 아브람의 신앙이 평안 곧 안식할 수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이 자기의 의지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려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브람의 모습은 정말로 사람들의 신앙 여정에서 마지막 관문과도 같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를 위하여 죽겠습니다.” 각오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순종이지 제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하여 죽을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들이라는 존재는 아버지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아브람의 의가 온전해졌을 때 그 의를 아들로 표현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람이 자신의 뜻으로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자신의 의를 육신으로 표현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스마엘이다. 이 이스마엘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지만 오늘 신앙의 여정을 가는 신앙들에게 있어서 누구나 겪게 되는 여정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들이 신앙의 여정을 가면서 <하나님의 위한 일>을 많이 하려고 한다. 언뜻 그것은 참 대견하게 보이고 또 좋은 신앙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 부족함이 있으신 분도 아니다. 하나님께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할 순종적인 형식 그것 하나뿐이다.


어쩌면 신앙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뜻에 의한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인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또 다른 사람을 자신의 삶을 통하여 얻게 되기까지의 여정에 있어 가장 마지막의 여정이 바로 ‘하나님의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아내 사래는 이때까지 아들이 없었던 것이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언약을 하고 난 다음에 기다려 봐도 아들이 생기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몸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내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뜻을 세우고 종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얻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는 단순하지만 눈에 띄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아브람이 사람의 뜻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루어내려고 하는 생각을 아브람의 아내인 사래가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와 내용이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의와 내용의 형식이 먼저 그랬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종의 몸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내려고 했다는 것이다.


아내 사래, 곧 여자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내려고 했다는 것은 사람들이 육신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려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스마엘을 낳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명의 법과 같이 의가 삶으로,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방향이 아니라, 삶이나 행동이 지옥에 갈 사람의 정체성을 천국에 갈 신분으로 바꾸어 내는 것은 모두 이스마엘을 낳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런 모습은 널리고 널려있다. 교회를 보면 교회를 잘 지어 놓으면 사람들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훌륭한 행사나 모임을 가지면 사람들이 모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교회는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삶(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런 사람들이 모이고자 하는 마음이 서로 연합하여 모인 것이 교회이고, 그런 교회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모임)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도 저들과 같이 되고 싶다.’는 성령의 감동을 주므로 또 다시 사람이 모이는 것이 온전한 교회다. 그런데 그 반대 방향으로 해서 얻는 아들 곧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다 뭐다? 다 이스마엘이라는 것이다.


개인의 신앙도 그렇다.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으로 표현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다. 그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는 본질이 그 사람 심령에 생명이 된 하나님의 의기 때문이다.(그것을 몰라보는 것은 어두움이다.) 그런데 반대로 자기 심령 안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더라.’며 자기 행동을 성경대로 하면 자신의 정체성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 이스마엘과 같은 아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종에게서 아들을 얻었다는 것도 비슷하다. 아들이란 아버지가 있다는 의미고, 종이 있다는 것은 주인이 있다는 것이다. 종은 아들과 다르다. 아들은 어떤 행동을 해도 아버지와의 관계가 달라지지 않지만, 종은 그 행위가 주인과의 관계가 달라지는 존재다. 종을 주인에게 종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항상 수고해야 하고, 잘하다가도 하나를 잘못하면 혼나는 존재다. 아들은 아버지께 뭐 좀 잘못한다고 혼날 수는 있어도 아들이라는 존재 가치가 달라지지는 않는다.(그래서 율법이 종의 신앙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종에게서 아들을 낳아서 하나님께서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려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공로로 의롭다 인정을 받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신앙인들이 새벽기도회 가는 것으로, 교회에 봉사하는 것으로, 또 성가대나 교사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으려 하는 모든 것과 그것으로 인한 영광(그들만의 영광이지만)은 모두 이스마엘과 같은 신앙을 낳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바로 이런 신앙들은 이상하게도 신앙이 좋을수록 더 그렇다. 신앙적인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사람은 사실 보통사람이 아니다. 새벽기도회 가는 것만 해도 그렇다. 그것이 보통신앙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죽겠다는 신앙도 그렇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열정인가? 하지만 그런 시간들, 그런 신앙이 하나님의 온전한 아들을 얻는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이스마엘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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