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기세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2. 14:54 Writer : 김홍덕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는 신앙


멜기세덱과 관련해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멜기세덱의 이름과 신분이다. 먼저 그는 살렘 왕, 곧 평화의 왕이다. 평화의 왕이 아브람을 맞이하고 축복했다는 것은 아브람이 평화의 왕이 가진 의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아브람에게 평화가 있다는 것이다. 평화가 있다는 것은 곧 안식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아브람은 어떻게 보면 자기 안에 있던 애굽을 사모하는 본성이라 할 수 있는 혈육인 조카 롯을 떠나보냄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신 것이 온전히 이루어진 존재가 되어 하나님께서 땅을 주셨다. 그렇다는 것은 다시는 그런 본성과는 엮이지 않아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자신은 손해 본 것도 없음에도 조카 롯이 위대함을 좇고 애굽을 사랑하는 본성들끼리 싸우는 싸움에서 져서 잡혀가나 것을 자기 집에서 기르던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되 찾아왔다. 어떻게 보면 불필요한 싸움을 했거나, 아니면 그냥 두는 것이 더 은혜로운 것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브람이 롯을 찾아 온 것은 오늘 우리 신앙 여정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도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믿음이 또 믿음을 낳고 그렇게 많은 자손 같이 복음이 전파되어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라 할 수 있는 교회가 되는 여정에 대한 말씀이 바로 아브람의 여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아브람이 어떻게 보면 자기 안에서 빠져나간 애굽의 본성과 같은 롯을 다시 구해오는 것과 같은 신앙의 여정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신앙을 가지면 세상과 독립된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청소년들이 어른이 되는 것이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는 것이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듯이. 하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과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어른이 되듯이, 신앙이라는 것도 세상에서 독립될 때 좋은 신앙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그 존재하는 목적대로 잘 다스릴 때 좋은 신앙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평강의 왕이 마중을 나오는 평화와 안식의 신앙이 되는 것이다.


아브람이 세상의 법끼리 싸우다 잡혀간 롯을 다시 찾아 온 것은 바로 그런 신앙의 여정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신으로부터 나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 사람이 되는 여정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난데없이 멜기세덱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롯을 되찾아 온 아브람의 정체성이 살렘 왕의 영접을 받을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가진 모순 중의 하나가 세상을 멀리하는 것이다. 그게 좋은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왜 세상 가운데 살게 하겠는가 하는 것만 생각해도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음에도 어두우면 그런 것을 모르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그라운드요 도화지와 같은 곳이지 어울리면 나 자신이 지옥으로 끌려가는 위험한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세상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얻으려 하고, 하나님을 힙 입어 세상의 피라미드 더 높은 곳에 올라가려 하면서 그렇게 세상에서 더 높은 곳에 서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며 하나님을 이용하는 믿음이 더 세상적인 것이다. 아브람이 보여준 것은 자기 안에서 버려야할 애굽의 본성, 곧 세상의 일도 방관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브람에게 롯은 자신 안에 있는 애굽의 본성이고, 또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한 아비 친척의 일부지만 그 롯이 세상에 사로잡혀가는 것을 그냥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브람은 롯을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롯은 자기가 좋아서 간 땅에서 그 땅의 법에 의하여 포로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세상의 법대로 다투다가 잡힌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람은 롯을 위하여 괜히 수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브람도 자기 안에 애굽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을 때에 애굽이 자신의 기근을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하고 갔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기도 했었고, 그런 애굽을 사랑하는 롯과 함께 있어 다툼이 있었던 아브람이다, 그런 아브람이 그냥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하나님께 제사나 잘 드리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려면 세상을 멀리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기와 연관된 세상일이야 어떻게 되든지 그냥 방치한다. 친인척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멀리하기도 하고, 부모가 교회에 가는 것에 대하여 뭐라 한다고 집을 나오기도 한다. 먹고 사는 일도 신앙에 위배된다고 생각되면 버린다. 하지만 그런 모습들은 온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과 세상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을 인지하고 인정해야 할 대상들이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자기와 상관이 있는 세상의 일을 방관하지 않고, 오히려 다스리는 자가 되었을 때, 그때에야 평안과 안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때가 되어서 평강의 왕 멜기세덱이 와서 축복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제사장이 떡과 포도주, 예수님의 몸을 먹음과 같이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므로 예수님의 생명이 자신의 생명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평강의 왕이 축복하는, 세상을 평안하게 살아가는 생명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십일조


살렘 왕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마중 나와서 축복할 때에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왔다고 했다.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성찬에서 예수님께서 몸과 피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면서 먹고 마시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너희의 몸으로 나타내는 삶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아브람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었다는 것은 아브람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생명이 되었다는 축복이라는 것이다.


그 때에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그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드렸다고 하였는데 이 얻은 것은 싸움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이 가지고 온 떡과 포도주를 말하는 것이다. 아브람은 기본적으로 빼앗긴 것이 없고, 또한 롯과 함께 찾아온 것도 소돔 왕에게 소위 말해서 인건비만 제하고 다 돌려주었다고 되어 있으므로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재물의 십분의 일을 드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에게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것은 스티브 잡스에게 아이폰을 선물하는 꼴 밖에 더 되겠는가? 하나님 만든 세상에서 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그러므로 십일조는 세상에서 얻은 세상의 것을 드리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 그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으로 드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옛날에 십분의 일은 대표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십분의 일을 드린다는 것은 전부가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가진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십일조인 것이다. 그러니까 십일조를 하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보화를 쌓을 곳이 없이 준다고 하셨으니 십일조를 드리면 이 땅에서 그리고 죽어서 천국에서 부자로 사는 것을 믿고서 드리는 것이 십일조가 아니라, 쩍과 포도주를 먹은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삶으로 표현되는 순전한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로서 드리는 것이 십일조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조카가 잡혀갔는데 가슴 아프지만 ‘애굽(세상)을 사랑하는 녀석이니 그냥 두자.’라는 식의 신앙과 십일조를 드려서 부자가 되겠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이지만 같은 신앙이다. 아브람과 같이 세상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을 멀리하려 한다. 두렵기 때문이다. 괜히 세상에 어울렸다가 천국에 못갈까 싶은 것이다. 주일날 회사에 가서 일하면 지옥에 갈 것 같고, 예수 안 믿는 친인척과 같이 어울리면 그렇게 물들 것 같은 마음이 있기에 그런 것이다. 그게 아니고 언제라도 세상을 다르실 능력이 있다면 그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본성 자체가 하나님을 이기는 생명이어야 되는 것이다. 세상의 법으로 신앙을 지키려 하면 세사아과 어울리거나 맞붙으면 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울리지 않고 외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과 그런 신앙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지 않기 위해서 십일조를 하는 것이다. 이 모두가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는, 행동이 생명의 정체성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이다.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떡과 포도주를 받음과 같이, 우리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몸으로 표현하는 모든 삶이 된다면, 세상을 외면할 이유도 없고, 그런 생명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든 그것이야 말로 온전한 십일조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삶은 삶 전제가 드려진 산(살아 있는) 제사요 단번에 모든 것을 드린 제사요 언제나 불이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과 같은 삶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온전한 십일조요, 그것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하나님의 제사장 평강의 왕에게 축복을 받은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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