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로잡힌 롯을 구한 아브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0. 30. 15:58 Writer : 김홍덕

롯은 떠났지만 죽은 것은 아니다. 그게 특별히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우리에게 롯과 같은 본성이 우리 안에 계속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람이 롯과 함께 있을 때는 기근이 나니 자기 정체성을 채우러 애굽으로 가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그 롯의 본성과 같이 행하지 않고 오히려 위대함을 다투는 전쟁을 다스려 버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 땅에 있었는데 바벨탑을 쌓은 땅 시날의 왕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과 소돔과 고모라성의 왕들이 연합한 연합군과 싸움이 있었다. 그리고 먼저는 그 전쟁을 시날 왕의 연합군이 이겨서 결국 롯도 잡혀가 버린다. 즉 위대함을 다투는 전쟁에서 롯이 패한 것이다. 롯은 위대한 애굽이 좋아서 갔는데 그 전쟁에서 진 것이다. 즉 사람이 세상의 방법으로 세상과 싸우니 항상 더 강한 자가 있어 결국은 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람은 그렇게 끌려간 롯을 자기 집에서 기르고 연습한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시날 왕 연합군을 물리치고 롯과 그의 모든 소유를 다 찾아온다.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본성이 어떻게 세상을 이기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브람은 롯과 함께 있을 때에 갈등이 있었다.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가기도 했다. 그것은 자아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롯의 본성으로 해결하려 했었다는 것이다. 즉 세상에서 인간의 허전함을 채우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롯의 목자들과 자신의 목자들이 싸우는 것을 보고 그 땅이 자신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곳을 떠났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에 도착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에 도착한 것이다. 이 아브람의 모습과 여정이 우리 신앙의 여정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누구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자리에 이르려면 애굽을 좋아하는 본성과 자신의 본성이 다투는 것을 보면 그 땅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 상태를 떠나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있는 것을 보면 떠나라고 하셨다. 같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 내용과 형식이 다른 것을 보면 그 땅을 떠나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브람은 헤브론에 이르기 전까지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있었다. 애굽으로 가기 전에도 그곳이었고, 애굽에서 사래를 빼앗길 뻔하고 돌아와서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아브람을 수용할 수 없었다. 즉 하나님도 아니고 세상도 아닌 자리는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을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에 가려는 사람에게 그 땅은 만족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군에 있을 때에 일찍 일어나 기도를 했는지 아닌지에 따라 일과가 달라진다고 느꼈다. 그러면 그냥 ‘열심히 기도하자.’ 이랬을 수도 있었는데 그건 제대로 된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이것이 과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유일까?’, ‘다만 산신령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 그저 하루 편하게 살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굿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라고 생각했다. 내 안에 있는 롯의 목자와 아브람의 목자가 다툰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갈등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Do에 관한 것인가? 아니면 Be에 관한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고, 결국 그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필자의 경험이 모든 사람의 공통분모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뭐 대단한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어떤 행위를 보이고 또 어떤 소유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보응하신다는 것이 자신이 믿어야할 하나님인가 생각하거나, 세상에서 위대해지려고만 하는 교회에 자신의 영혼과 정체성을 맡겨도 되는지 고민하지만 아브람이 롯과 갈라서서 헤브론에 이른 것과 같이 그 자리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아브람은 우리 신앙의 여정을 보이고 있다. 아브람은 그런 자리가 자신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서 떠났다. 그리고 롯의 본성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고서 남은 땅으로 갔는데 그곳이 바로 헤브론, 곧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에 우리 안에 있는 애굽의 본성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성이 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그 본성은 서로 위대해지려는 다툼에 의하여 사로잡혀 가 버리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지내게 하라고 하심과 비슷한 것이다.


롯은 아브람을 떠났지만 죽은 것은 아니다. 아브람을 떠난 롯이 살아 있듯이 우리 사람 안에는 늘 롯과 같은 본성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싸워 이기려 한다. 하지만 무엇으로 이길 것인가 할 때, 바벨탑을 쌓은 시날 왕을 대적하여 소돔과 고모라가 맞서 싸워봤자 이기지 못하듯, 위대함을 추구하는 것을 애굽과 같은 물이 흐르는 땅의 사람들의 방법, 곧 애굽의 방법으로는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은 행위나 소유를 드림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수녀원에 젊은 수녀가 들어왔는데 남자 생각을 이기기 힘들어서 원장 수녀를 찾아 갔다고 한다. 그러자 원장 수녀는 권총을 한 자루 주면서 남자 생각이 날 때마다 이 총을 쏘면 남자 생각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권총을 받아들고 온 젊은 수녀는 남자 생각이 나자 총을 쏘았다. 그러자 난생 처음 들은 총소리에 놀라서 남자 생각이 싹 가셔 버렸다. 젊은 수녀는 ‘역시 원장님이구나!’ 생각했지만 이내 총소리에 적응이 되고 효과가 없어졌다. 그래서 다시 원장 수녀를 찾아 갔다. 그러자 원장 수녀는 큰 엽총을 주었다. 젊은 수녀는 엽총을 쏘았더니 큰 소리에 놀라서 얼마간 효과가 있었지만 이내 소용없었다. 그러자 다시 원장 수녀를 찾았지만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지하실에서 총소리가 나서 보니 원장 수녀가 기관총을 쏘고 있었다.


위의 글은 언젠가 유머 책인가 어디서 본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사람 안에 있는 본성은 사람의 행위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애굽의 땅과 같은 땅을 좋아하는 롯이 거하는 땅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은 시날왕을 이길 수 없었다. 이는 사람을 연단해서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마음을 육신의 방법으로 세상의 방법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을 육신의 수고와 노력으로, 아니면 소유를 드림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 안에 있는 위대함을 추구하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어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이 이김은 그냥 다 죽이고 없애는 것이 아니다. 이 이김은 살렘왕 멜기세덱을 만나는 이김이다. 즉 평강의 왕, 정의의 왕이 나와서 대적을 이기는 자라는 축복을 하는 이김이다. 이것은 사람이 위대해지려는 갈등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강이 있는 자리가 이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김은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회복할 때 얻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브람이 롯을 구하러 갈 때 자기 집에서 연습하고 자란 이들이 가서 구했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할까?’가 아니라, 어떤 땅에 있는 사람의 집에서 자란 것이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이 어떤 자리,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정체성이 가진 생명이 자람서 위대해지려는 다툼을 이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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