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으로 간 아브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0. 28. 14:12 Writer : 김홍덕

벧엘과 아이 사이 어중간한 곳에 자기 장막을 친 아브람은 점점 남쪽으로 내려갔고, 자신이 머물던 곳에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애굽에 가는 길에 아브람은 아내 사래가 너무 예쁘기 때문에 애굽의 왕이 사래가 자신의 아내라는 것을 알면 자신을 헤치고 아내 사래를 취할까 싶어 아내 사래에게 자신의 아내가 아닌 누이라고 거짓말을 사주한다. 그리고 아브람의 걱정은 현실이 되어 실재로 바로 왕이 아내 사래를 취하려 하자 하나님께서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심으로 바로 왕이 아브람을 불러서 ‘왜 자신을 속였느냐?’고 책망하고 애굽을 떠나라고 하여 그곳을 떠나게 된다.(창 12:10-20)


지금 아브람은 자신이 살던 땅에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내려갔다. 피라미드로 상징되는 애굽은 세상을 대표하는 곳이다. 세상은 늘 누군가의 위에 서는 것을 이긴 것 곧 선이라고 여기는 것이 피라미드로 대변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으로 내려오셨다. 애굽과는 반대이다. 바로 그런 곳으로 기근을 피해서 아브람이 내려갔다는 것이다. 즉 먹을 것을 찾아서, 자신을 채우기 위해서 애굽으로 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사람이 자기 육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 없다는 것은 그 신앙이 아직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 낼 정도로 장성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기근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가는 아브람의 모습은 빈 그릇인 자기 삶을 세상의 것으로 채우려는 마음과 같은 것이다. 아직 그의 이름, 곧 정체성은 ‘위대함의 아비’라는 아브람이니까.


하나님을 믿는 여정은 누구나 아브람과 같은 여정을 거친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자기의 장막을 치듯 머무르면서 위대함을 좇는다. 어떤 사람도 이 신앙의 여정을 생략할 수 없다. 각양의 과정을 거치는 기간이 다를 수는 있지만 아이가 9살에서 10살인 해를 건너뛰고 바로 11살이 될 수 없듯이 지나칠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구나 아브람이 애굽으로 간 것과 같은 여정을 거치고 할례를 받는 과정을 거치고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여정을 거친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많은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여정도 그렇다. 애굽에서 출발해서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이르러 나라가 된다. 한 개인의 여정이 애굽과 같은 가치관에서 큰 물을 건너서 광야 곧 율법과 같은 가치관을 가진 세월을 지나고 또 큰 물을 건너 가나안에 이르러 나라가 되듯이 그 사람으로 인하여 많은 하나님의 백성이 나오는 여정을 가는 것이다. 그것이 개인의 신앙 여정이다. 그 여정을 아브람을 통해서 또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라는 관계는 남자의 의(성)를 여자를 통해서 얻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영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남편이 아내에게서 아들을 얻듯이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해 갈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 아들이 아직 아브람에게는 없는 것이다.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장막을 쳤고, 또 자신을 채우려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사람은 그 정체성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즉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람은 살기 위해서 왜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였을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면 육신의 삶이라는 형식을 쉽게 생각한다. 아브람이 아내 사래를 아내가 아니라고 한 이유는 아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내의 아름다움 때문에 자신이 죽을까봐 그랬다. 아내의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자신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신앙에 있어 아내의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는 육신의 여러 가지 모습들, 능력이 있다거나 돈이 많다거나 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생명을 헤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 회사나 가정 등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이 자신의 신앙에 요구하는 것들이 자신의 신앙을 헤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자꾸 멀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요일에 일 하러 나오라는 것이나 회식 때 소주 한잔 하라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육신과 그 삶의 요소들이 자신의 아내, 곧 자신이 가진 신앙을 표현해 낼 대상이 아니라고 해 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경계해야할 세상은 그런 삶의 형식이 아니라, 위대함을 좇는 마음, 그것이다.


신앙인들은 세상의 것을 취한다고 하면 살아가는 사회 속에 있는 것을 취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 이유는 아내 사래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그가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자신의 정체성을 둠으로서 자신을 채울 것이 없자 애굽에서 자신의 속사람을 채우려고 했다는 것 때문이지 아내 사래의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아브람이 죽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아브람의 이 모습은 신앙인들에게 사회가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는 것 때문에 신앙이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요구들 앞에 예수님과 같이 죄인이 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가진 신앙으로 세상을 굴복시키고 심판하는 위대함으로 대하는 그 가치관 때문에 죽을 수는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이든 무엇이든 남보다 위대해져서 높은 곳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 바로 피라미드의 가치관, 애굽의 가치관, 세상의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아브람이란 이름은 ‘위대함의 아비’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것 역시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얼마든지 세상적인 것이 된다는 것을 모른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렀다는 것, 그것은 애굽의 피라미드와 같이 세상 사람들 위에 신앙으로 높아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섬기기 위하여 부르신 것이다. 술 마시는 사람을 보면서 세상 사람의 타락이라며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심판하는 권세를 주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목적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그 죄인들 앞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신 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지금 자기 눈에 자신에게 든 기근을 애굽에서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애굽에 가려고 보니 아내 사래의 아름다움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애굽과 아내 사래의 아름다움은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아내 사래의 아름다움이 애굽 스타일이 아니라면 걱정할 것이 없을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자신의 의를 표현할 아내의 아름다움이 바로 애굽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마치 신앙인들이 자신이 가진 여러 사회적인 모습과 조건을 세상의 것이라며 터부시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모습이 심해지면 정말로 전 재산을 다 팔아서 교회에 바쳐버리는 것이다.


신앙은 결국 육신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마당이 바로 세상이다. 그리고 또한 남자가 아내에게서 아들을 얻듯,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삶, 표현하는 삶은 아내와 같은 자신의 육신으로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이 가진 육신의 여러 가지 신분, 조건,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을 주신 것은 다 그 이유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아내 사래를 준 것은 아들 이삭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지 애굽에서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닌 것처럼.


그러므로 신앙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자신이 가진 것, 아내와 같은 육신의 모든 것은 버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의를 나타낼 도구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애굽 바로왕의 지비에 재앙을 내리심으로 아브람이 자신의 모든 소유를 가지고 애굽을 떠나게 하신 것이다. 즉 그런 피라미드와 같이 높은 곳에 서려는 위대함을 추구하는 가치관에서 떠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 여정을 거쳐서 사람들이 이삭을 얻는 것이다. 즉 생명의 아버지, 곧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므로 다른 사람이 다시 이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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