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과 아이 사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0. 26. 14:39 Writer : 김홍덕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아브라함은 매우 의롭고 선한 사람으로 인식된다. 유대인들에게는 믿음의 조상이니 더 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생각되는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은 아브라함이다. 그 이전, 특히 아브람은 기독교인들이나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아브라함과는 다른 사람이다. 이는 아브라함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브람, 아브라함의 정체성의 여정, 그리고 그 삶의 여정은 우리 모든 사람의 신앙 여정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즉 누구라도 신앙을 처음 시작하는 시점의 정체성과 그 신앙이 장성한 다음의 정체성은 다르다. 특히 신앙에 있어 큰 마디를 지난 다음에는 그 이전과 이후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때 홍해를 건너기 전과 건넌 후, 요단강을 건너기 전과 후는 전혀 다른 민족이고, 할레를 받기 전의 아브람과 받은 후의 아브라함은 다른 사람이듯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역시 그 신앙이 생명이 자기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사람과, 그 자리에 이르기 전에 행함으로 의에 이르려고 하는 시절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아니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위하여 아브람의 여정을 성경으로 기록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신지 얼마 되지 않은 아브람의 여정은 마치 처음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는 여정과 흡사하다. 누구나 이 아브람의 여정을 거쳐서 가나안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땅이 그 소산을 풍족하게 내듯이 흙으로 만들어진 인생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풍족하게 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창세기 1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셨다. 그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성경의 장절로 본다면 금방 부르신 것이다. 그 아브람의 신앙 여정의 시작은 벧엘과 아이성의 사이에서 시작한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아이는 ‘폐허, 절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불렀고, 아브람이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믿음을 보여서 시작하는 믿음을 보여주었지만, 처음에는 하나님의 집과 절망 사이에 자기의 자리를 정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브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말씀이 오늘 나와 상관이 없다면 이 말씀을 읽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는 것은 성경을 지키며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이 한 성경인데, 구약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역사고, 신약은 오늘 우리의 행동 가이드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의 어느 부분을 보고 그것이 나의 이야기, 설사 신앙이 그것에 미치지 못하고 그 말씀을 행동으로 지키면서 살아내는 신앙이라 해도, 그렇게 성경의 한 부분을 보고 있다면 이 아브람의 여정은 오늘 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그대로 살기 원하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람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이후에 하나님의 집도 또한 세상의 절망과 폐허도 아닌 중간에 자기의 장막을 쳤다는 것은 그 자리가 자신에게 좋아 보이는 생명이 아브람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브람의 모습은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모든 사람들도 그와 같이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는 신앙과 세상 그 사이에 자기의 장막 곧 자기의 자리를 둔다는 의미인 것이다. 자리는 곧 자기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다고 바로 베드로나 바울 사도와 같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나도 그렇고 너도 그러하며 아주 계시가 밝은 사람도 그러했고, 지금 막 예수를 믿기 시작하는 사람도 그렇다는 것이다. 신앙은 여정이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도 여정인 것이다. 어디를 향하는 여정인가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여정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시대에서는 신앙이 교회로 가는 여정인 것이다. 즉 교회에 적합한 사람이 되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가 되는 여정인 것이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명에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과 같이 처음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 그때 사람들의 모습은 성경에서 많이 나온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라.’고 했을 때 따라 나섰지만 자기 생업과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에 대한 이중적인 삶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와 같이 우리 모든 사람들이 신앙의 여정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세상에서의 자기 삶, 그 사이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브람이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있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말씀일 수 있다. 그냥 접속어처럼 성경 말씀을 써 가면서 연결고리 역할로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성경일 수 있는데, 아이라는 지명의 뜻이 ‘황폐’한 것이라는 것을 도입해서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의 상태라며 그것이 오늘날 사람들 역시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를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비약이 심한 견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의 말씀은 그 어느 하나 버릴 말이 없다는 것을 도입하지 않더라도 이 말씀은 정말로 우리를 안식하게 하는 말씀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나서도 스스로 그렇게 자책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이상하거나 신앙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통해서 그런 연약한 모습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을 삼으셨다는 것이 그것이다.


아브람은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자신의 장막을 치는 것에서 하나님이 지시한 가나안 땅에서 애굽으로 내려가기도 하고 그곳에서 아내 사래는 누이라 거짓말하면서 까지 자신을 살려고 하다 빼앗길 뻔도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방식으로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다. 그런 아브람이 결국 하나님 백성의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다. 그렇듯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저런 모습들, 감추고 싶은 것들을 행하면서 신앙의 여정을 가는 것이다.


다만 사람이 그것을 보는 관점이 중요하다. 여정의 어느 한 시점을 그 사람 혹은 자신의 정체성으로 여긴다거나, 아니면 그런 여정을 가는 중에 보이는 이런 저런 모습을 가지고 그 사람을 선악 간에 판단한다거나 하는 것과 같은 것은 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저런 모양의 실수를 한 아브람이 결국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아브람의 실수들을 아브라함의 본질로 보지 않으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여정이 다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가는 과정에서 아브람이 보여주는 모습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신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래도 무관하다는 것이 아니라, 아브람의 이런 모습이 우리 신앙을 위로한다는 것이다. 즉 이런 모습을 아담이 벗은 몸을 부끄러워했듯이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 가는 과정에서 이런 모습을 보일 때 우리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정말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 말씀이 나와 상관있는 말씀으로 보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각양의 사건들은 그 말씀 자체로서 주는 교훈이 있다. 아브람이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자기 장막을 쳤다는 것을 읽으면, 우리도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우리의 정체성을 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교훈으로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래! 그럼 나는 안 그래야지?’ 그래봤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안 그런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살다보면 어느새 ‘나는 그러지 않아야지!’ 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연약함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사람인 나도 그렇다는 것이고, 사람의 본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다.


아브람도 그랬다. 재밌는 것은 아브람과 이삭은 부자가 둘 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자기는 살려고 했다는 것이다. 2대에 걸쳐서. 그런 집안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모습을 보고 ‘저렇게 예수 믿으면 안 되지’라든가 심지어 ‘저렇게 하면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할 것이 아닌 것이다. 성경에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그것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그런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면 그 사람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같은 신앙의 사람이 될 것이고, ‘나는 저렇게 하지 않아야지.’하면 다른 신앙이 되는 것이다. 그 차이는 사람의 연약함을 인정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인 것이다.


인생이 연약한 것은 자랑할 일은 아니다. ‘나는 그렇다 왜? 어쩔래?’ 이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도 아브람과 같이 어중간한 삶의 모습을 얼마든지 보일 수 있다. 그때 ‘이것이 사람의 모습이구나!’ 이렇게 아는 것이 제대로 본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의 일을 제대로 본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의 연약한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고 인정이 되는 사람은 먼저 겸손하며, 믿음이 수동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이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 관점에서 아브람이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자기 장막을 친 것이 오늘 자신의 이야기가 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가 그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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