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과의 언약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3. 13:11 Writer : 김홍덕

아브람 개인으로서의 언약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실 때에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아브람은 헤브론 땅으로 왔다. 그 땅을 아브람과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셨다.(창 13:14-18) 그러면 그것이 다 인가? 그렇지 않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아브람이 헤브론 땅에 왔다는 것이 약속의 본질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람도 그렇고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도 그런데, 단순히 사람이 먹고 살 땅이 약속의 본질이라면 금방 오면 된다. 그런데 돌고 돌아서 들어가게 된다. 아브람도 벧엘과 아이 사이에서 애굽으로 갔다가, 애굽에서 나와서 다시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있다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으로 왔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걸어서 보름이면 갈 수 있다는 길을 40년을 돌고 돌아서 도착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지도(地圖) 상의 땅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땅은 곧 사람이다.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은 헤브론이라는 지명을 가진 땅이 본질이 아니라, 아브람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이 나타난 전부라고 성경을 본다면 아브람의 믿음을 본받으려면 헤브론 땅으로 가야할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고서 그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을 성경을 지키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세상 사람들도 사람의 일을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일이겠는가? 성경을 눈에 보이는 대로 믿으려 하다 보니 예루살렘을 두고 싸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은 그렇지 않다 싶겠지만, 교회나 성당에 가서 기도하면 더 잘 들어주신다고 여기거나, 교회나 성당의 건물이 더 거룩하다고 여기는 생각이 있다면 그게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가 부정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보이는 것인 본질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지시한 땅은 헤브론이 아니라 아브람이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 관한 말씀을 성경으로 사람들에게 읽으라고 주신 것은 아브람과 같이 같은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 육신의 자리에서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정체성을 가진 자리로 가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기 육신의 일을 해결하고, 육신을 위하여 살던 자리가 바로 본토 아비 친척 집이라는 의미다. 가끔씩 사람의 삶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목숨이 붙어 있으니 그 목숨이 수명을 다할 때까지 어떻게든 견디듯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곤고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 최고의 갑부나 권력자나 또 반대로 굶어 죽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육신의 문제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좋은 기술과 철학으로 만들어낸 놀라운 물건과 사상들이 지향하는 효과, 이익이 무엇인가 할 때 인류라는 인간 종족의 육신을 가진 삶의 윤택함 그것일 뿐이다. ‘인간다운 삶’ 존엄성과 같은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그 어떤 고상한 철학도 결국 인생이라는 삶의 기간 동안 스스로가 만족할 만한 어떤 의미를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일 뿐이기에 그 모든 것은 아무리 고상하든, 놀라운 기술이나 발명이라도 다 살라고 주어진 시간을 버티듯이 사는 것일 뿐이다. 그런 모든 것이 다 보이는 세상 이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육신으로 사는 삶이 본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신앙과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믿노라 하여도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안다면 결국은 신앙이 육신의 문제에 수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을 역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그냥 산신령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신앙을 가지지 말라고 십계명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지 말라고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금식 후에 마귀가 세상 만국을 주겠다고 했을 때 하나님을 시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너무나 많은 신앙이 하나님을 세상사는 동안 보급계나 해결사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잘 공급을 받는지를 기준으로 신앙이 좋다 아니다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잠깐 이야기가 곁길로 가겠지만, 오늘 당신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를 두 가지 관점에서 보자. 먼저 그 기도가 이루어지면 하나님께 유익인가 당신의 육신(과 연관된 또 다른 육신)에게 유익인가? 나에게 유익이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은 단연코 당신의 이익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 한 가지는 내가 한 기도로 인하여 다른 사람은 손해를 보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입학 정원 10명인 대학에 기독교인 20명과 신앙 없는 사람 10명이 지원했을 때 그곳에 합격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의 기도가 이 둘 중의 하나 이상에 속한다면 당신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있는 사람이다. 당신의 기도가 눈에 보이는 것을 구했지 않는가?


한 가지를 생각해보자. 세상의 어떤 사람이 자동차를 위하여 자동차를 만들겠는가? 자동차는 사람이 사람을 위하여 만든 것이다. 사람이 만든 그 어떤 것도 그 물건을 위하여 만든 것이 하나도 없다. 사람이 만든 모든 것은 사람 안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만든 목적과 그 목적이 이루어짐으로 사람이 유익하게 되도록 눈에 보이지 않는 목적과 유익을 위하여 만든 것이다. 그것이 그럴 찐데 하물며 하나님이 만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사람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믿음이라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바로 그런 얼토당토않은 가치관을 가진 세계에서 떠나서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자기 삶의 존재 이유라는 것이 감사한 자리로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아브람을 통해서 우리 모든 인생에게 보여주신 언약의 말씀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본토 아비 집을 떠나서 하나님이 지시할 땅, 곧 사람의 정체성으로 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브람이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언약한 것이고, 우리 각 사람을 향한 언약인 것이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 >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스마엘  (0) 2015.11.06
아브람과의 언약  (2) 2015.11.03
멜기세덱  (0) 2015.11.02
사로잡힌 롯을 구한 아브람  (0) 2015.10.30
롯과 갈라선 아브람  (0) 2015.10.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