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약속 받는 아브라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10. 15:01 Writer : 김홍덕

이제 아브람의 이름은 더 이상 아브람이 아니다. 이제는 아브라함이다. 그 이름은 정체성이다. 위대함의 아비가 생명의 아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그 고향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이주했다. 아브라함의 이주는 단순히 사는 땅을 이동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정체성이 이동했다는 것이다. 땅이 바뀐 만큼 그 이름이 바뀐 것이다. 위대함의 아비라는 자리에서 생명의 아비라는 자리로 옮겼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살던 땅을 바꾼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땅은 곧 사람이기도 하다.


돌아보면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는 자리까지 많은 여정을 거쳤다. 그것은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 역시 아브라함과 같이 정체성의 이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어떤 보상을 받기 위한 대가성 이동이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의무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정체성의 이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목적에 수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것은 인생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위대함을 좇는 아비라는 이름을 부여한 아브라함의 고향 땅은 바벨탑을 쌓은 시날 땅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고향만이 아니다. 모든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하늘에 이르려 탑을 쌓는 자리에서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더 위대해지기 위하여 흙에 볏짚을 넣고, 또 구워서 강하게 하여 하늘에 이르게 하려 쌓는 것이다. 흙이 사람이니 이는 사람 안에 볏짚과 같은 죽은 껍질을 넣어 강하게 하고, 또 불로 구워내듯 끊임없이 인생을 단련하면 위대해진다고 하는 자리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을 거쳐내었듯 우리의 신앙도 우리 정체성의 공허함을 세상에서 찾으려던 마음의 여정을 거쳐내어야 하고, 또 애굽을 사모하는 본성을 상징하는 롯과 함께 같은 땅(자기 마음 안)에 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렇게 롯이 떠나고서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갔던 것과 같이 흙으로 지어진 우리 인생이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을 통하여 지금까지 말씀해 오신 것이다.


여기까지의 여정, 한 사람이 위대함을 좇는 신앙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아는 자리까지는 개인 신앙의 여정이다. 어쩌면 여기까지 온 것이 개인 구원의 자리까지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처음부터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다. 즉 개인 구원의 자리가 존재의 목적을 다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을 하나님이 불러서 그 사람만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뜻을 아는 것에 목적을 두신다면 예수님 한 분이면 되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다시 그와 같은 생명을 가진 이들을 얻으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큰 민족을 얻게 된다는 것, 그것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겠다는 뜻이다.


생각해보면 이는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게 하셨다면 누군가 보게 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나타났다는 것은 이미 누군가 그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혼자 나타난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이 한 사람을 통하여 나타났다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그 사람의 삶이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의미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 사람의 삶을 보고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의미를 알게 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는 아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는 아들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이 창세기 18장에 나온다.(물론 수도 없이 약속하셨지만 확증하는 약속이랄까?) 그 장면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나는데 아주 주목할 것은 사람으로 만난다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을 보고 “주(主)”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시기로 한 아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되어야 사람인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인 자신이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다름 아닌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사람의 육신이 된 존재인데 말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처럼 남자의 몸을 가진 신이 사람인 여자를 취하여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듯이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아들이 아니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의가 몸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버지의 의와 계획이 육신이 된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아들에게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주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표현하고 이어갈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는 것은 그런 아들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아브라함 안에 있고, 그 의가 아들(이삭)로 나타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기로 한 아들이다. 하나님이 주시기로 한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 아들은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인 것이다. 아들이 그렇다면 당연히 아버지도 그런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사람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을 알아본 것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사람으로 하나님이 오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면 무슨 신비한 일을 겪는 것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하나님이시다. 즉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인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믿기에,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아는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런 사람이어야 하나님이 주시는 아들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당연히 사람인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그 삶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 삶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사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던 사람이 성령의 감동으로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자신도 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을 낳는 것이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은 성령으로 잉태된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서 거듭남을 이야기하거나 예수님의 재림을 이야기하는 것은 다 어두운 자들이고 소경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상태가 위대함을 추구하는 자리에서 떠나 애굽을 거쳐내고서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의 자리인 지시할 땅에 이르렀고, 또 그곳에 사람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을 봤을 때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나?’ 하지 않고 오히려 제사를 드림으로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그 성품과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자리에 이르렀기에 그런 아브라함이라면 아브라함을 보는 이가 하나님을 알 수 있기에 아들을 주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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