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만나듯 에서를 만난 야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3. 26. 14:39 Writer : 김홍덕

야곱이 얍복강에서 한 사람과 씨름 하였는데 그 사람이 야곱을 이기기 힘들게 되자 환도뼈를 쳐서 야곱의 뼈가 어긋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외형적으로 이 싸움은 야곱이 진 것이다. 그렇지만 야곱은 자신이 바라던 대로 축복을 얻었다. 그것은 자기의 정체성이 바뀐 것이다. 이름이란 생명이고 생명이란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코끼리는 코가 길어서 코끼리인 것과 같이 이름은 그 정체성이다.


야곱이 얻은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이다. 더 자세히는 하나님과 및 사람과 겨루어 이겨서 얻은 이름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그렇게 이름을 얻은 것을 야곱은 축복이라고 여겼다. 그랬으니까 축복하기 전까지는 놓아주지 않겠다던 사람을 놓아 준 것이다. 그리고 야곱은 그 일을 하나님의 얼굴을 만난 것이라고 했다.


사람의 정체성이 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사람이 바다를 가르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 보다, 사람이 바뀌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더 놀라운 기적이다. 심지어 사람들은 ‘나이 40이 넘으면 변하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빠르다.’고 까지 한다. 그렇게 사람은 변하기 어려운 존재다. 그런데 야곱이 자기의 정체성을 ‘뒤꿈치를 잡고 나왔다.’는 이름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로 바꾼 것이다.(이것은 단순한 개명이 아니라, 축복을 주는 권세를 가진 이에 의하여 정체성을 다르게 보겠다는 약속에 관한 것이다.)


그렇게 정체성의 변화를 겪은 야곱은 자기가 가려고 한 자리인 땅, 장자의 명분을 빼앗겨서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형이 있는 땅에 드디어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형 에서는 야곱을 반갑게 맞아 주고 야곱 또한 형을 보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 부분을 언뜻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택한 사람인 야곱이,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 곧 사람 지으신 뜻을 가볍게 여기는 에서를 만났는데 에서가 야곱을 보고서 하나님을 본 것 같다고 하지 않고 반대로 야곱이 에서를 보고서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다고 했는가 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아마 신앙을 위해서 세상일을 포기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전혀 알 수 없는 말씀일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신앙을 가진 자신을 지키는 것이 신앙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기에 모욕을 당하지 않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지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목사나 교회들이 여성도와의 문제, 돈 문제, 세습의 문제와 같은 일에 대하여 사회적인 비난을 받으면 일관되게 보이는 자세가 자신들의 일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일이니까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그 내막을 잘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 뿐 아니라 그런 사회적인 원성을 마귀의 계략이라고 일갈한다.


그런 가치관을 가진 신앙인들은 절대로 에서의 얼굴을 보고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은 경험을 할 수 없다. 에서는 마귀의 자식이고 타락한 사람이듯 신앙이 없는 모든 세상의 사람들도 그렇게 보기 때문이다. 어떻게 마귀와 같이 여기는 사람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멀리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고, 신앙을 위해서는 세상의 일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좋은 신앙이며, 사회가 교회나 목사에 대하여 하는 이야기를 마귀의 계략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야곱이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야곱은 어째서 자신을 죽이려 한 형 에서를 만났을 때에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고 했으며, 또한 야곱의 여정이 우리 신앙의 여정이라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에게 이 일은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자.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과 및 사람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신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가 축복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 하지 않고, 초인적인 일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이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과 같은 것에 길길이 날뛰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셨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엘리야도 그랬다. 하나님을 만나려 했는데, 바위를 쪼개는 바람이나 돌을 사르는 불로 오시는 하나님을 엘리야는 만나지 못했다. 그런 놀라운 능력은 분명히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그것이 자신의 임재라고 하셨지만 엘리야는 사람의 육신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려면 신접한 것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미세한 음성으로 오시는데 말이다.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꾸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간다. 그들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한 정의는 사람은 그 자체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라면 먹어야 하는 밥을 굶고 기도하면 더 능력이고, 잠 안자고 기도하면 더 기도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에서의 얼굴을 보고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자꾸 사람을 등진다. <교회가 이단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교회가 불교와 같이 자꾸 사람 없는 곳으로 전원교회다 뭐다 하면서 가는 것은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웃긴 것은 그러면서 또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관하신다고 하고, 또한 하나님은 흠이 없고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찬양한다. 그러다 기도할 때면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바꿔달라고 기도한다. 뭐 어쩌란 말인지 알 수 없다.


야곱이 얻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하나님을 이긴 자라는 뜻이 아니다. 야곱과 씨름한 사람 곧 하나님의 사자는 분명히 <“하나님과 및 사람과 겨루어 이긴 자”>라고 했다. 사람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은 링에서 이긴 것과 같이 육신의 어떠함에 관하여 이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그래서 승자의 아량으로 에서를 하나님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야곱이 이긴 것은 사람이 가진 사람에 대한 ‘정의(definition)’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에 대한 정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사람이 만든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에 대하여 스스로 정의하는 것은 사람을 만든 신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한 정의가 사람의 삶을 결정한다. 인생에 대한 정의와 같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에게 사람은 율법으로 그 행위를 바꾸어내지 않으며 의롭지 않다는 것이 그들의 관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들은 신약의 시대, 복음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여기는 현대의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성경말씀을 몸으로 지켜내어야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던 그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이다.


야곱이 얻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 ‘하나님과 및 사람과 더불어 이겼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께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을 얻었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사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었기에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를 누린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사람의 정의, 정체성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것과 같아졌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가진 사람에 대한 관념을 이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을 겪었기에 야곱은 자기를 죽이려 한 형 에서(믿는 사람이 볼 때 세상사람)를 만났을 때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야곱이 그랬다는 것, 그것을 우리에게 전하셨다는 것은 우리도 그렇게 되라고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인,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께 사람인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 아는 은혜를 얻고, 또한 모든 사람이 사람인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 그것을 이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 세상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될 때 그런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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