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겜 땅에서 생긴 디나의 일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5. 19. 11:47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을 받은 야곱이 그 장자의 명분이 가진 본성을 따라 하나님께서 그 조상 아브라함에게 지시한 땅으로 가는 여정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였던 형 에서를 만나는 일은 그의 우려와는 달리 너무나 해피엔딩으로 마감되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그 조상의 땅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형 에서가 함께 갈 것을 권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가지 않고 세겜이라는 땅에 장막을 친다.


야곱이 가려고 출발한 땅은 지속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지명이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이란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의 자리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기에 땅은 언제나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은 하나님께서 정한 땅, 곧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정체성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야곱이 가고자한 곳은 지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자리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가려고 그 험난한 길을 와서 왜 머뭇거리는 것일까?


이러한 것을 이야기함에 있어 세겜이라는 땅에서 겪게 되는 유명한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야곱의 유일한 딸인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일이다.(창 34장) 사건의 전말은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야곱이 머무른 이방인의 땅 세겜 땅의 여자를 보러 갔다가 그 땅의 히위 족속 하몰의 아들 세겜 추장이 디나를 강간하고 연민하여 자기 아내로 삼고자 하나 야곱의 아들들이 이를 용납하지 않고 자기 누이를 욕보인 족속들에게 할례를 받으면 딸과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한 다음 다들 할례를 받아 고통 중에 있을 때에 칼로 살육하고 디나를 데리고 온 사건이다.


이 사건은 유명한 사건이다. 더욱이 야곱이 유언을 할 때도 이 사건을 주도했던 시므온과 레위에 대하여 강하게 언급하기도 했다(창 49:5-7) 그러나 나름 반전이 있다면 야곱이 딸 디나의 일이 있기 전에 이 세겜 땅을 사서(창 33:19) 나중에 그곳에 묻힌다는 것이 반전이라면 반전이다. 이 반전에 관한 것은 여호수아(24:32-33)에도 나오고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설교에도 나온다. 이것이 바로 세겜 땅에서 있었던 사건의 전말이라면 전말이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두고 이렇게들 말한다. 먼저는 야곱이 자기 길을 바로 가지 않고 세겜에 머물렀고, 그 딸 디나도 이방인이 궁금해서 돌아다니는 실수로 인하여 심각한 일을 당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틀린 해석은 아닐 수 있지만 문제는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 보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왜 막지 않으셨는가?’ 하는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이 나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이런 일이 나와 상관있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성경을 자신의 이야기로 듣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먼저 사건 자체로만 본다면, 세겜이라는 땅은 ‘언덕’, ‘어깨’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 어원들에 대한 더 근원적인 것이 있다면 산과 비교에 중간 정도, 머리 아래쪽의 어깨를 가리키는 의미, 즉 반 혹은 다 차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세겜이라는 말을 ‘반만 믿는다.’는 뜻을 가졌다고도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야곱이 하나님께서 그 조상에게 명한 사람의 자리에 이르는 여정을 눈앞에 두고 반만 믿는 행동을 보였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딸이나 여자는 언제나 내용을 표현해 내는 형식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 블로그에서 말해 왔다. 그러니까 육신으로 여자를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육신으로 여자에 관한 이야기로 보는 것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는 사람의 안목이다. 여자란 남자의 성씨(혈통)를 가진 아들을 생산하는 존재, 즉 의와 뜻과 내용을 표현하는 형식을 뜻한다. 그래서 의와 뜻을 가지신 하나님 앞에 모든 인생은 늘 여자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신부로서 맞이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 핵심적인 인물인 딸 디나는 이방인들을 보러 갔다. 그런데 문제는 여자인 디나가 남자를 보러 간 것이 아니라 여자들을 보러 갔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방인의 여자를. 이 말씀은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았다는 말씀을 연상하게 한다.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러 간 것이나 여자를 보러 간 것이나 같은 의미이다. 내용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을 구하러 갔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앞에 여자와 같은 사람이 내용이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의 일인 육신의 일을 구하는 것에 관한 말씀이다. 여자는 의당 자신의 신분을 바꾸어 낼(결혼하면 바뀜) 혈통을 가진 남자 곧 하나님의 의와 뜻을 구하여야 하는데, 육신의 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구하는 것과 같이 세상을 살 동안 육신이 겪게 되는 일을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일들의 미래가 어떤가? 아니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아름다움이고, 이방 땅의 여자들을 구경하는 것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내용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세상 사람들도 다 구하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신앙은 모두다 야곱의 딸 디나가 이방 여자들의 모습을 보러 나갔다는 것과 같은 말씀이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자식 문제, 사업 문제, 교회의 행사 문제와 같은 것을 구하는 신앙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이방 여자를 구경하러 갔더니 딸 디나가 이방 남자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것이다. 즉 이방 족속의 씨를 자기 내용으로 수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강간을 당했다는 것은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에 가서 돈 달라, 밥 달라, 세상에서 하는 일이 주님의 이름으로 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신앙은 자기도 모르게 세상의 가치관이 자기 신앙의 정체성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디나가 강간을 당했다는 것을 굳이 성경에 기록하신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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