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겜 땅에서 생긴 디나의 일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5. 20. 12:45 Writer : 김홍덕

문제는 이러한 사건이 <오늘 우리와 어떤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딸이 없는 사람도 많고 아예 남자인 사람도 세상의 반인데, 성경을 읽고서 문자 그대로 지켜내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어떤 의미가 되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야곱이나 디나처럼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그럼 반문하고 싶다. 사람이 실수하려고 드는 사람이 있나? 그리고 실수 하지 않으려 한다고 항상 성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이것은 사람의 실수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로 가고, 또 야곱을 통해서 한 개인의 신앙이 공동체(교회)의 신앙으로 가기 위해서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처리되어야 하는 문제를 이야기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야곱이나 디나의 실수로만 보면 안 된다. 그것이 실수라면 하나님께서 실수를 하지 않으시는 분이신데,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사람이 실수를 하는 것이 되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실수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그리고 괜히 야곱에 대한 관리를 느슨하게 해서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려 하시는 그런 고의적인 경영을 하시는 분은 더더욱 아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공동체로 가는 과정에서 누구나 그런 과정을 겪는 것이기에 보이신 것이다.


많은 공동체들이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 즉 온전한 교회로 가기 위하여 애쓰는 과정에서 반드시 처리해야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세상의 좋은 것을 가져오고 싶은 욕망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것을 잘 처리하지 못하는 교회가 거의 대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세상이 좋아하는 것을 교회에 자꾸 가져오려 한다. 성경을 보는 관점에도 과학이나 인문학과 같은 다른 학문을 가미한 관점을 도입하려 애쓴다. 이유는 있다. 교인들이 세상에서 그런 것을 보고 또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은 모두 디나(교회가 갖추어야 할 형식)가 세상의 여자들(세상의 형식들)을 보러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교회들이 그렇게 하다 보니 이방인에게 강간당한 디나와 같이 교회에 세상의 것들이 자리하고 있다. 창조과학회와 같은 것이 그렇고 무엇보다 성경을 공부해야 설교할 자격을 가진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이 그렇다.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에 세상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바로 눈에 보이는 형식인 학력과, 경력과 또 다른 사람과 경쟁해서 이긴 경쟁력을 갖출수록 더 좋은 대우로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을 주고, 그런 관행에 암묵적으로 동의를 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에게 강간을 당한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공동체로 가는 길에 누구나 그런 욕심이 있기 마련이다. 디나가 이방의 여자들 곧 세상의 형식을 궁금해하고 보러 갔던 것과 같이, 교회가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잘 나가고 좋은 것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세상 속에서 사니 그것을 가져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디나의 일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바로 그런 일이 야곱의 속에서 나온 디나에게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를 이루는 여정을 설명하시고자 택하신 야곱 안에서 나온 디나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결국 아들들이 할례를 빌미로 이방인들을 살육하는 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야곱의 유언에서 보듯 야곱은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야곱은 그 일을 주도한 아들 시므온과 레위에게 그 일이 야곱에게 화를 미쳤다고 한다. 반면에 야곱은 디나가 수치를 당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거나 화를 내거나 하나님께 책망을 받지 않고 오히려 35장에 들어서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복을 주신다. 그러니까 이 일은 실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야곱이 가는 여정에서 처리되어야 할 것이 처리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아들들의 일도 그렇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형식이 아닌 내용에서 비롯된 씨로 인한 생명을 낳는 사람이 되고, 또 그런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는 하나님의 뜻이 육신으로 표현된 예식인데, 이것을 복수의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마치 교회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행실(형식)을 심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밥 먹을 때 기도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십일조 하는 습관이 없고, 술 마시고 담배 피는 행동을 보면서 ‘그런 것을 우리의 규례대로 지키지 않으면 함께 할 수 없다.’고 엄포를 놓는 것이 그것이다. 자신들이 이미 세상의 가치관을 교회에 가져왔다는 것은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이러한 일들은 이 일이 있고 난 다음인 창세기 35장에 이어진다고 할 수 있는데, 야곱이 벧엘로 가기 전에 자기 식솔들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이방신상을 버리고 의복을 바꾸라고 하니 모든 식솔들이 이방신상과 귀고리를 다 야곱에서 가지고 오고, 야곱은 그것을 세겜 땅에 묻고서 벧엘로 가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으로 보면 야곱과 그의 식솔들이 디나의 일이 있기까지 이방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고, 또 디나의 일로 인하여 이방신을 버리게 되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가 그것은 온전한 공동체로 가기 위해서는 이방신을 섬기는 일, 즉 이방의 여자들을 보는 것과 같이 세상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살펴서 교회에 가져 오려는 일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이고 생각이다. (돌아보면 필자도 이 복음을 전하는 일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실수하시는 셈 치고 세상에서 성공을 보장해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얼마나 오랫동안 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은 다 그 땅에 묻고 떠나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을 회복한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과정을 표현하신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렇다는 것은 야곱의 일은 교회가 되기 위하여, 또 온전한 교회를 누리기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는 세상의 것을 신앙 안에 도입하면 어떨까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강간을 당하듯 자기 안에 세상의 가치관이 들어온다는 것과 세상의 가치관이 나를 엄습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그 생각을 이방신상을 땅에 묻듯이 버려야 하는 사건이지 할례를 빌미로 심판할 일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야곱의 딸 디나의 일은 신앙의 실수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개인의 신앙에서 공동체의 신앙으로 가는 길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세상의 것을 가지고 공동체를 이루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디나가 야곱 안에 있는 사람인 것이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늘 세상에 살기 때문에 세상의 좋은 것을 더하면 교회가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것을 다 버려야 벧엘 곧 하나님의 집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 서신에서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말씀이다. 디모데나 또 골로새 교회를 세운 에바브라와 같은 이들이 목회를 함에 있어 교회에 어리석은 자들이 세상의 헛된 철학과 초등학문을 가지고 와서 그런 것이 있을 때 더 좋은 복음이라며 그런 것을 이야기 하지 않는 디모데나 에바브라를 업신여긴 일들에 대하여 편지로 강력하게 권고한 것이 그것이다. 교회는 세상의 것을 필요로 하는 곳이 아니다. 세상이 교회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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