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로 가는 정체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6. 15. 16:09 Writer : 김홍덕


딸 디나가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벧엘에서 단을 쌓으라고 하시므로 야곱이 길을 떠나게 된다. 생각해보면 딸이 수치를 당했는데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아무런 언급도 없고, 야곱도 딸을 대신하여 복수한 아들들을 오히려 책망하는 것 외에는 다른 말이 없다. 그럴거면서 왜 성경에 디나의 일이 자세히 기록되었을까?


디나의 일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실수에 대하여 경고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이는 벧엘로 가기 전에 우리 안에서 처리되어야 할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늘 디나가 이방의 여자들 곧 세상의 문화와 화려한 유혹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있고, 또 그것으로 인하여 이방인에게 강간당하듯 이방의 가치관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일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 일이 천하에 드러났다.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그 일로 강간한 세겜 족속을 야곱의 아들들이 도륙하듯이 죽여 버렸으니 이 일은 이제 비밀이 아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세상의 가치관을 간음하듯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것은 숨긴다고 될 일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 말씀이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만이 살 길인 것이다.


그렇게 그것이 드러난 다음에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 곧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단을 쌓으라는 것이다. 단을 쌓는다는 것은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고,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를)을 죽이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다는 것이며, 그것을 하나님의 집(벧엘의 의미)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께 드려지기에 합당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이제 야곱이 하나님의 집에서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이다.


야곱이 그런 상태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을 받은 야곱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하나님께 단을 쌓으라고 하니 자신의 모든 식솔들에게 이방의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며 의복을 바꾸라고 하는 것이다. 식솔이란 자기 세계다. 모든 식솔들은 자기의 모든 세계, 곧 가치관과 정체성과 삶의 모든 것이다. 그들에게 이방신을 버리라고 한 것은 이방의 가치관을 버리라는 것이다.(이때까지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리고 의복을 바꾸라는 것은 신분을 바꾸라는 것이다.


그랬더니 식솔들은 이방 신상을 버렸다. 그리고 한 가지 야곱이 시키지 않았는데 자신들의 귀걸이(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 주었다.(창 35:3-5) 왜 그랬을까? 그리고 야곱은 또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받았고 그것을 그냥 상수리나무 아래 묻어 버렸다.(출애굽 때는 귀걸이로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이것은 또 무슨 말씀일까?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귀는 믿음의 시작점이다. 귀걸이는 무엇을 듣는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방신을 버리라고 했을 때 그 귀걸이를 내어 놓았다는 것은 이방의 가치관을 듣는 증표를 내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방인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던 것을 내려놓았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들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곱이 벧엘로 길을 떠나자 그 사면 고을의 모든 족속들이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야곱의 아들들이 그 땅의 거민들을 살육하듯 죽였음에도 그들을 추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방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 사람,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은 사람은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자들이 볼 때 심히 두려운 자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가는 자, 하나님의 전에서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 자는 하나님의 존재 정체성에 합당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방신의 말을 듣거나, 이방의 문물을 좋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며, 의복 곧 삶의 모양 역시 바뀐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그런 가치관에 있었다는 것이 디나의 일이 만 천하에 드러나듯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죄를 시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방신을 섬기고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이었다는 증거인 귀에 거는 것을 다 내려놓는 것이다. 즉 이방의 가치관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들은 그렇지 않다. 교회에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왔을 뿐 아니라 교회의 근간이 되었다.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그것은 세상의 (방)법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을 말한다. 즉 애굽의 법인 피라미드의 법으로 세상이 가치롭게 여기는 학문의 세계, 재물의 세계, 신분의 세계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을 교회에 가져오는 것이다. 즉 벧엘에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아니 가져왔을 뿐 아니라 이제는 신앙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세상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세상을 이길 힘을 달라고 기도한다. 세상을 이기지 못했으니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왜 이기지 못했는가 하면, 세상의 법은 언제나 승자가 바뀐다. 자기가 성공한 그 법에 의하여 또 다른 누군가가 자기보다 이긴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런 일이 없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도회나 부흥회 한다고 하면 전투 찬송을 격하게 부르면서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방신의 의복과 신분과 가치관을 듣는 귀를 버린 사람)은 오히려 세상이 두려워한다. 예수님께서도 몸을 죽이는 자가 아니라 영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는데, 이는 세상은 육은 죽일 수 있지만 영은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노라 하고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 안에 세상의 법이 점령할 여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즉 신앙의 목적 안에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 육신이 죽지 않고 영화롭게 되는 것이 목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방 신상과 귀걸이를 땅에 묻지 않고서 벧엘로 가는 것이 그것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루는 조상이다. 그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 즉 하나님의 집이요 성전이요 교회요 공동체가 그에게서 시작되는 사람이다. 그의 여정에서 이제 공동체가 시작되는 벧엘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가기에 합당한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기의 모든 세계인 자기 식솔들 모두에게서 이방의 신상과 이방의 가치관을 듣던 귀를 상징하는 귀걸이와 신분을 나타내는 의복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묻고서 벧엘 곧 하나님의 집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진정한 교회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되려고 한다면 가장 먼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가치관, 하나님께 육신의 문제인 자식, 취업, 사업, 건강과 같은 것을 구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것이 잘 되면 은혜요 복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버리지 않았다면 교회가 건물이 아무리 화려하고 사람이 아무리 많이 모여도 회칠한 무덤일 뿐이고, 주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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