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을 보는 관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8. 8. 10:43 Writer : 김홍덕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들, 즉 거듭난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명 공동체 곧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생명 공동체라는 것은 인위적인 규칙이 다스리는 공동체가 아니라 생명의 본성에 의하여 이루어진 공동체를 말합니다.


창세기의 흐름이 천지창조와 아담, 노아의 홍수 등을 거쳐서 아브라함이라는 믿음의 조상의 여정이 시작된 이후에 그의 아들 이삭이 낳은 쌍둥이의 동생 야곱이 다시 그 조상의 땅으로 돌아와서 정착하고 사는데 뜻하지 않게 야곱 곧 이스라엘이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그 형들의 시기를 받아서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게 되고, 정작 그 아버지인 이스라엘은 아들이 죽은 것으로 아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는 또 잠시 난데없이 유다와 다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 본격적으로 요셉의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그리고 이 요셉의 일은 결국 이스라엘의 12아들들이 애굽에 들어와서 사는 계기가 되고, 그 이후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왕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종살이 시키게 되고, 그 압제에서 벗어나도록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시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이 땅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라를 이룬 나라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혈통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기준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유대인들의 전통인 할례와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지금 유대인이 아닌 민족들이 하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이야기할 때는 저의 말과 같이 할례나 혈통이나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정작 교회를 이루고 신앙생활을 하는 모양은 다시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육신의 혈통이나 관습에 있지 않다고, 형식에 관한 것이 아니기에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정작 신앙의 모양은 성경을 형식으로 지켜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요셉의 일이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는 시작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인하여 이 땅 위에 교회가 세워진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위에 어떤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는 지와,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의 어떤 의가 삶을 다스리는 사람인지를 요셉을 통해서 또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요셉과 예수님의 일이 오버랩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성경의 주제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 그리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 관한 말씀이니 당연히 모든 말씀은 그렇게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요셉에게 일어난 많은 일들이 예수님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 아버지와 형들이 자신을 섬길 것이라는 꿈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하여 팔아 버렸듯 예수님께서 팔리시고 또 이스라엘에게 있어 죽은 아들이었던 요셉을 만남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볼 때 죽었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것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정체성을 설명해 갑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는 관점에 있어 ‘우와! 하나님께서 예수님보다 수천 년 전의 사람인 요셉을 통해서 예수님의 어떠하심을 예언하시고 그대로 실현됐네!’라는 감탄을 하고, 그 놀라움이 성경의 신비함이라 생각하는 것에 그치면 곤란합니다. 성경에 천하에 둘도 없는 일이 있었다고 한들 그것이 나와 상관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의 일을 객관적으로 믿는 것이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 나와 상관이 없다면, 지구 반대편에 어떤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의 돈을 가지고 우리는 할 수 없는 일을 한다는 것을 객관적 지표로 확인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있고 또 성경의 모든 것이 예수님을 말씀하시는 책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성경을 사람들에게 왜 주셨을까?’ 이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문명이 발달하면서 성경에 기록된 불가사이한 것들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그 문명과 과학으로 증명하는 숙제로 성경을 주셨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은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자랑하시려고 주셨을까요?


이야기를 달리 해서, 제가 자주 언급하는 심청전을 이야기 해 볼까요? 그 저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저자가 심청전을 쓴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누구라도 심청전을 읽고서 심청이와 같이 효도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일 것입니다. 이는 비단 심청전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책, 모든 드라마와 문화는 그 작가가 의도하는 것이 그것을 접하고 소비하는 사람과 관객들의 삶의 일부가 되기를, 또 그 삶에 있어 의미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창작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창작하는 사람들이 그런 마음으로 창작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드셨기에 그 하나님의 법이 그들의 본성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알려고 심히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성경에 나오는 말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것인지를 궁금해 합니다. 욥기를 어려운 성경으로 보는 것도 그 안에 나오는 말들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학이라는 학문이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오늘 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단어나 사건이 어떤 의미인지 아무리 상세하게 알아도 나와 상관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단지 사람들 앞에서 그 지식을 뽐내는 것 이외에 쓸 일이 아무데도 없을 것입니다.


요셉에 관한 말씀을 읽고 또 들을 때에 <오늘 나와 상관이 있는 이야기>로 들려야 합니다. ‘야 요셉이 절묘하게 예수님을 표현했구나?’가 아니라 ‘이 요셉의 일도 나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과 같이 나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말씀이구나!’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의 모든 말씀의 주제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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