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과 보디발의 아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9. 3. 07:07 Writer : 김홍덕

요셉은 형들에 의하여 팔려갔고, 그 종착지는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요셉은 출중함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주인인 보디발은 그의 집의 모든 행사를 다 맡겼습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가 용모가 준수한 요셉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동침하기를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이에 응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다시 동침하기를 요구하였으나 요셉이 이를 뿌리치고 달아나는 과정에서 요셉의 옷을 보디발의 아내가 취하게 되었고 보디발의 아내는 이를 가지고 오히려 요셉이 자신을 욕보이려 했다고 남편에게 고하므로 요셉은 모함을 받아서 왕의 죄수들이 거하는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참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살피셨으면 이런 일이 없도록 하시면 좋을 텐데 평소에는 잘 보살피시다가 결정적일 때는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으신 것이 그렇고, 또 요셉이라는 사람의 삶이 요즈음 말로 왜 그리도 꼬이는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뭔가 하나님께 잘못을 해서 그 일로 인하여 옥에 갇히면 또 이해가 될 법도 한데, 그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살피시고 그 보살핌 안에서 충실하게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을 당하는지도 언뜻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요셉의 일에서 우리는 몇 가지 하나님의 의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겪는 일들을 보는 관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든 어떤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살면서 어떤 불행한 일을 겪으면 반사적이다시피 자기가 믿는 신께 자신이 뭔가 잘못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농담도 하곤 합니다. 그리고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행운이니 불운이라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에 반응하시는 분이신가?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신앙관 자체가 모두 행위에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신이든 사람의 행위가 신 앞에서 의로운지 아닌지가 신이 반응하는 원인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공로와 소유의 신앙입니다. 그런 신앙, 그런 믿음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믿는 신이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산신령이든 다 같은 신앙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동에 반응하시는 수동적인 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일하신 신이고 또 거룩(구분)하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사람의 행동에 하나님이 반응을 하시는 관계가 아니라,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뜻이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것입니다. 제사는 신의 반응을 도모하는 사람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일이나 욥의 일이나 같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하여 생각한다면 인생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어떤 행동을 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거나 보응하시는 것이라고 볼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떤 생각 어떤 행동을 하던 그것에 좌지우지 되시는 분이나 반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뜻을 세우시고 그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이 있어야 비로소 순종의 개념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요셉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이 뭔가 하나님께 잘못을 해서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팔려가고 모함을 받고 옥에 갇힌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있으니 그 의와 뜻을 육신으로 표현해 내어야 하는 인생인 요셉이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특히나 그리스도의 성품을 진하게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당하는 이 일이 예수님의 일생과 매우 흡사합니다. 왜 특별히 요셉이라는 사람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가 생겼듯, 요셉의 일에 이어서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나라로 가는 여정을 시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은 것은 그 꿈을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꿈은 사람의 의도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의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이야기했더니 형제들이 미워했습니다. 예수님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 형제들도 같은 백성들도 또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 땅에 와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뜻을 전하였더니 사람들은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면 자기들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기준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그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일도 마찬가집니다. 아내란 여자입니다. 여자는 성경에서 형식에 관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인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과 동침하여 하나가 되고자 했다는 것은 요셉에게 눈에 보이는 형식의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라는 유혹인 것입니다. 즉 세상적인 가치관,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 유혹은 금식을 마치신 예수님을 시험하는 마귀의 시험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모든 시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험과 같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사람이 먹을 수 있게 하라고 했습니다. 돌은 율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율법을 몸으로 지켜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유혹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살고 죽는 것은 육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삶의 생명이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라고 답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아들은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능력 이상의 기적을 일으키면 하나님의 아들이고 좋은 신앙이라고 유혹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면 죽게 되는 이 육신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기 때문에 육신의 능력을 뛰어 넘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세상의 모든 영광을 줄 테니 마귀 자신을 경배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본질이니 이것을 얻기 위하여 어떤 것이라도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은 하나님만 경배하라고 답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목적과 뜻이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세상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은 이렇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은 율법을 지킬 수 있어야 하고, 육신의 한계를 넘어야하고,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보고 그 세계의 영광을 취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즈음 말로 바꾸면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애굽(세상)의 가치관으로 이긴 자 시위대장의 아내입니다. 그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다는 것은 세상 가치관의 아내 곧 형식을 요셉이 자신의 것으로 취하라고 유혹한 것입니다. 이에 요셉은 예수님께서 시험을 이기신 것과 같이 이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물리친 그 유혹의 기준을 가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마귀가 유혹할 때 내세운 하나님 아들의 기준 예수님은 맞지 않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한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요셉 역시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오히려 그 아내가 요셉을 모함한 것입니다.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의 일은 우리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사건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정체성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이긴 자가 왕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가치관으로 유혹합니다. 그 가치관 안에서 이겨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 육신의 것이 복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이고, 그것은 좋은 믿음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또 복을 받기 위하여 세상의 가치관과 같이 몸으로 그 공로를 쌓아 영광을 돌리고 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교회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신앙이기도 합니다.


요셉의 일을 보면서 성적인 문란 행위에서 자신을 지키면 처음엔 곤혹스러워도 나중에는 총리가 되듯 세상에서 성공하는 복을 받는다는 교훈으로 삼으면 껍데기만 보는 안목입니다. 요셉의 일은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겪게 되는 일입니다. 세상 권력자의 아내(형식)의 유혹,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성공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라는 유혹을 이겨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그 정체성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를 유혹하는 가치관, 세상에서 성공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가치관에 의하여 심판 받아 죄인이 되는 정체성입니다. 요셉이 그랬고 예수님이 그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정체성인 된 사람의 삶이 어떤 것인지 요셉의 일에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정체성으로 인하여 곤고한 일을 당하기도 하는 것이지,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어떤 행위가 하나님 혹은 자기가 믿는 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여 곤고한 일을 당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그런 신앙관을 가졌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생명이 된 존재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쉬운 말로 구원받은 생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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