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맡은 관원장, 떡 굽는 관원장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10. 21. 18:15 Writer : 김홍덕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는 유혹을 물리친 요셉은 억울하게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요셉은 여호와의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전옥(감옥의 장)이 감옥의 모든 일을 요셉이 맡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에 바로의 신하 중에서 바로의 술을 맡은 관원장과 떡을 굽는 관원장이 요셉이 있는 감옥(보디발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래서 시위대장 보디발은 요셉에게 그 두 사람을 시중들게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의 꿈을 꾸었는데 해석을 할 수 없어 근심하고 있을 때에 요셉이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으니 자신에게 말을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참 재밌는 말입니다. 꿈의 해석은 여호와 하나님께 있으니 자신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해석이 하나님께 있으면 하나님께 말하라는 것인데 그것을 자신에게 말하라고 한다는 것은 요셉은 자기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요셉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가 일하시니 자신도 일한다는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말씀들은 단지 요셉과 예수님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요셉이 하나님께 있는 해석을 들으려면 자신에게 말하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고 하신 말씀은 결국 오늘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이유도 없고, 요셉의 일을 읽고 묵상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글에서는 두 관원장에 대한 말씀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술 맡은 관원장이 꿈을 이야기하기를 자기 앞에 포도나무가 있었고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고 포도가 열렸는데 자기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에 포도를 짜서 포도주를 만들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 꿈에 대하여 요셉은 포도나무의 세 가지는 사흘이니 이후 사흘 안에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이 될 것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먼저 꿈을 이야기 한 술 맡은 관원장의 해석이 좋기로 떡 굽는 관원장도 자기 꿈을 이야기 하였는데, 흰 떡 세 광주리가 자기 머리위에 있고 그 윗 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식물이 있는데 새들이 와서 그것을 먹었노라 하니, 요셉이 해석하기를 세 광주리는 역시 사흘이나 당신은 사흘 안에 목이 잘릴 것이고 새들이 잘린 머리에 앉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삼일 째 되는 날이 바로의 생일이라 잔치를 베풀었는데 요셉의 해석과 같이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이 되고 떡 굽는 관원장은 목이 잘렸습니다. 


창세기 40장에 나오는 이 꿈 이야기를 대하노라면 우리는 “왜 술 맡은 자는 살고, 떡 굽는 자는 죽었는가?”하는 것이 가장 궁금합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그들이 무슨 이유로 옥에 갇혔는지가 없기에 단지 꿈 내용으로만 그것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바로가 옥에 가두었다는 것은 바로의 뜻을 거역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생이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듯이.


이 두 개의 꿈은 모두 “맡은 자”의 꿈입니다. 그리고 또 주인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다 바로를 섬기는 관원, 즉 바로가 자기들의 주인인 사람으로서 바로의 것을 맡은 사람입니다. 먼저 삼일 만에 복직된 술 맡은 자는 꿈속에서 포도나무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도를 짜서 포도주를 만들어 바로에게 드렸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과실입니다. 그러니까 포도주를 빈 잔에 채웠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채웠다는 것입니다.


빈 잔은 우리 인생의 정체성과도 같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빈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잔은 바로의 것, 곧 술 맡은 자의 주인의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빈 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빈 잔에는 포도나무에 짠 포도주를 담았다고 하는 것에서 우리 인생의 내용을, 빈 그릇과 같이 허망한 우리 삶의 속을 그리스도로 채운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빈 그릇과 같은 자기 인생에 채워 주인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산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맡은 자로서 사는 법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삼일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숫자 3은 하나님의 수입니다. 그래서 삼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세월이 지나면 주인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슷하지만 떡 굽는 자는 삼일 뒤에 목이 잘리게 됩니다. 머리를 잃어버린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당연히 죽었다는 것이고, 주인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술 맡은 자는 주인의 빈 잔을 가지고 있었지만 떡 맡은 자는 이미 바로를 위하여 구운 떡이 이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을 위하여 구웠지만 주인이 아닌 새들이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 구운 것이 주인의 음식이 아니라 짐승들의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새가 먹었으니…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맡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 인생은 그릇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빈 그릇입니다. 주인이 있는 그릇이 비었다는 것은 곧 주인을 위하여 채워지기 위하여 비었다는 의미입니다. 고로 이 그릇에는 주인이 원하는 것, 주인을 위한 것을 담아야 합니다. 이 잔, 이 그릇은 주인을 위한 것을 담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원하는 것을 담을 때 온전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무언가를 하려고 합니다. 떡을 굽듯, 자기 인생을 연단하여 드리려고도 합니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이 벽돌을 만든 것처럼. 하지만 빈 그릇인 우리 인생들은 그 빈 잔, 빈 그릇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채워야 합니다. 인생은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원하십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그릇에 하나님이 계시므로 이 그릇을 보고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이 나타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그릇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 그릇에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대로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사람이 되면 그 인생을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주인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관원과 같이 우리는 다 우리 주인의 뜻을 어겨 옥에 갇힌 자와 같은 죄인입니다. 이 죄인의 자리에서 벗어나려면 그릇과 같은 우리 인생을 하나님을 위한 것을 채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원하시는 바 하나님의 성품을 채우는 것, 포도를 짜서 나오는 포도주와 같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채울 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듯 이 두 관원장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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