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본질이 있는 곳이나, 또 자신이 죽을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한 곳이다. 하지만 그가 돌아가는 것은 그 조상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하나님이 명하신 땅이기에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지면의 어느 좌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정체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땅은 흙이고, 사람이 흙이며, 하나님께서 정한 땅이란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내신 마지막 일주일은 유월절 기간이었다. 그리고 그 전에 이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마음을 먹고 있는 상태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것과 야곱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에서가 지키고 있는 본토 아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같은 모양새라는 것이 놀랍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한 땅,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목적하신 사람의 정체성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 그것을 야곱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 정확히는 십자가로 가시는 것과 같은 말씀이다. 십자가야 말로 인간 정체성을 바로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자리, 하나님께서 정하신 땅, 또한 십자가인 그 사람의 정체성의 자리에 가는 것에 있어 가지고 가야할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또한 야곱의 여정이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 돌아갈 때에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서 형에게 차례대로 보낸다. 이것은 일면 간사한 모습 같지만, 실상은 모든 사람의 모습이다. 야곱의 이 모습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땅으로 가는 길에는 자신이 육신으로 이룬 것,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가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그 세력에게 다 바치고서 가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육신은 발가벗겨진 모습으로, 신분과 정체성은 이 땅에 가장 쓸모없는 사형수라는 신분으로 돌아가시는 것과 같이, 야곱 또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자신을 죽이려는 형에게 다 바치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땅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간사한 모습이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선택이다. 다만 사람이 스스로 잃지 않으려 조금씩 버리는 것임을 야곱 또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에 가는 길에는 아무 소유를 가지지 않고 가야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소유와 공로를 의(가치)롭게 여기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뜻하신 목적(그리스도라는 정체성) 안에 있느냐 아니냐에 관심이 있으실 뿐,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가지고 가느냐는 아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반 사회에서도 무엇인가를 가지고 가야하는 관계와 그냥 가기만 하는 관계가 있다. 그냥 만나는 것 만으로 충분한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물론 그 때 아들이 아버지께 어떤 선물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풍습일 뿐, 아버지라는 정체성이 아들에게 뭔가를 받을 때 비로소 아들로 인정하는 그런 관계는 아니다. 하지만 직장 상사는 언제나 성과가 있는 것, 소유와 공로에 대한 결과를 가져가서 만나야 하는 관계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갈 때 빈손으로 가려 하지 않는다. 뭔가 라도 들고 가려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하나님께 기도한 실적이라도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지 않았다고 만나시지 않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만나주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만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기도의 공로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찾아 왔을 때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은 이런 것이다. “너는 누구냐?”, 그리고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과 자신이 어떤 관계로 인식하고 있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아! 네가 나의 뜻을 표현할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느냐?’하는 것이다. 그것도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연약해서 늘 감추고 개선하려는 그 육신을 가지고서 그럴 수 있느냐고 물으시는 분이시다. 즉 ‘공로와 소유가 네게 의미가 있느냐?’를 물으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그것을 의롭게 여기는 신으로 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자기 자리로 간다는 것은 결국 소유와 공로가 사람이 하나님 앞에 할 본분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할 것은 하나님이 어떤 신인지 바로 아는 것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것만 있으면 그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그 삶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 관계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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