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반을 떠나는 야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2. 13. 12:56 Writer : 김홍덕

야곱이 라반과의 약속에 따라 점 있고, 아롱지고, 검은 양과 염소를 얻었는데 그 수가 많으니 라반의 아들들이 이를 시기하여 아비 라반에게 고하므로 라반이 마음이 변해서 야곱과의 언약에 대하여 재고하려 하는 것을 야곱이 알고 그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떠나게 된다.


이때 야곱은 그의 두 아내, 즉 라반의 두 딸에게 떠나려는 마음을 알렸는데 야곱의 두 아내는 야곱을 흔쾌히 따라 나서겠다고 한다. 그들의 생각은 “어차피 아비의 집에 자신들의 분깃이나 유업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재밌는 것은 그 두 딸은 아버지가 자신들을 팔았다고 생각(창 31:15)한다. 그래서 그들은 떠나게 된다.


성경에선 늘 남자가 여자에게로 가서 결혼하고 여자가 남자를 따러 떠나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적어도 아브라함에서 야곱의 때까지는 그렇다. 아브라함이 왜 그러냐고 할지 모르는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의가 없는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당시 아브람)에게 찾아 가셔서 떠나라고 했고, 아브람이 말씀에 순종해서 떠난 것은 하나님 앞에 여자와 같은 인생에게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그 여자와 같은 인생이 남편 곧 하나님의 의를 좇아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도 같다. 이삭과 야곱은 둘 다 자기 고향에 가서 아내를 얻고 아내들 곧 여자들이 남편을 따라 나선다.


신앙이란 이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인생들에게 찾아오시고, 그 인생들은 신부에게 신랑이 와서 그 신랑의 아들을 얻게 되듯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생명을 얻고, 그리고 아내가 남편을 따라 나서듯이 육신의 의를 떠나서 남편과 같은, 또 아들의 생명을 주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삶이 바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신앙의 여정을 지나서 교회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것이 야곱이 나라의 근간이 되는 족속을 이루는 것으로 표현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두 딸이 아버지가 자신들을 팔았다는 것은 자신들을 외인으로 여기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세상의 법으로 보면 하나님의 의를 따른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이한 인생은 자기들이 볼 때 외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미워할 것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꿈에 나타나셔서 <출생지>로 돌아가라고 하신 것도 그와 연관이 있다. 출생지라 함은 자기의 원래 모습, 근원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즉 출생 곧 존재의 원래모습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땅의 지명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야곱이 있는 자리는 라반이 볼 때는 외인으로 여기는 자리(정체성)인 것이다. 그래서 라반은 딸을 주는 것도 야곱의 노동의 값으로 계산했던 것이다.


그런 모습은 세상의 모든 본성이다. 문제는 세상이야 그렇다 쳐도 교회도 그렇다는 것이 문제다. 이 블로그에서 아주 자주 이야기하는 <세상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은혜로 주시는 것인데, 세상의 법이 들어온 교회는 신앙적 가치, 즉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사람이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에 늘 값을 요구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장로나 장립집사와 같이 소위 신앙의 직급이라 하는 자리에 오르는 때에 많은 헌금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야곱의 아내들은 그 아버지의 그런 의에서 떠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즉 당대의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야곱, 즉 자기 눈앞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가진 이와 함께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문제는 조용히 떠났으면 될 텐데 둘째 딸이자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아버지의 드라빔을 훔친 것이다. 드라빔은 뭐랄까? 가문의 상징 혹은 가문의 우상과 같은 것이었다.


라헬이 무슨 의도로 그것을 훔쳐서 분란을 일으켰는지는 알기 어렵다. 더욱이 그 드라빔으로 인하여 야곱의 일생에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다만 라헬이 그 드라빔을 훔침으로 인하여 야곱이 라반에게 오히려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사건이 생기고, 그 과정에서 야곱이 라반을 어떻게 섬겼는지, 반대로 라반이 야곱을 어떻게 보고 착복했는지가 드러나게 된다. 즉 세상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와,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세상의 본성에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가 드러난다.


라반은 결국 자신의 신인 드라빔을 찾지 못하고 야곱이 원하는 대로 야곱과 자신의 두 딸인 야곱의 아내와 손자들을 보내주게 된다. 자신의 신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단순히 드라빔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을 지닌 야곱이 자신에게서 떠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의 신을 찾지 못했다는 자기 말로 고백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반면에 야곱은 자기 신을 찾지 못한 라반, 즉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고 있는 분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부정한 라반에게 정성을 다했다. 어떻게 보면 야곱이 라반에게 한 행적을 보면서 야곱을 야비하다 할 수 있겠는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성실하고 신실했다. 이것은 정말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은 하나님을 알고 그들이 말하는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시한다. 심지어 ‘짐승들’이라는 표현들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이 그러는 이유는 단 하나다.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다. 장자의 명분이 없는 신앙이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필자는 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봤다. 예를 들면 도둑질 수준이라 하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직장의 물건, 예를 들면 종이컵과 같은 것들을 교회에 가져와서는 ‘신앙 없는 것들의 것은 이렇게 쓰도 된다.’식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봤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도적일 뿐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이들일 뿐이다.


야곱은 라반의 짐승이 죽거나 상하면 자신의 것으로 다 보상했다고 했다.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어도 그렇게 했다고 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가진 의의 장자가 보이는 삶의 모습이다. 야곱이 형을 속인 것, 그렇게 야비하게 보이는 야곱의 모습도 알고 보면 세상의 것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에 관해서는 오히려 더 철저해야 한다. 야곱이 그랬던 것은 아내를 위해서와 양떼를 위하여서였다. 즉 세상을 얻기 위하여 그런 것이다.


많은 교회들, 특히나 스스로 성경에 대하여 다른 교회나 종교보다 더 안다는 사람들이 세상을 멸시하면서 자신들의 신앙이 우위에 있음을 말한다. 그것도 자기들끼리 모여서. 신앙이 없다는 이유로 시댁이나 부모님 댁을 들리지 않는 것, 신앙이 없는 부모와 같이 살 수 없으니 가출해서 자기들끼리 모여 사는 것과 같은 모습은 아내와 양떼를 얻는 모습이 아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시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을 가졌지만 그 장자의 명분으로 세상에 속한 이들, 라반과 같이 딸을 팔아 버리는 그런 가치관을 가진 이들을 멸시하거나, 그들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수고하는 삶을 살았기에 나라가 이루어진 것이다. 아내란 자기 의를 표현해 줄 세상의 형식과 삶의 모양이고, 또한 라반의 양떼는 세상에 있는 양떼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과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가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세상을 등지고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법에 따라 그들을 위하여 수고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그렇게 해야 천국에 간다는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 즉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있어서 그 의가 자기 삶으로 표현되고 이끌기 때문에 하지 않으려 해도 할 수 밖에 없는 본성이 되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성경의 어떤 말씀이 저촉될까? 또 세상의 어떤 사람이 그를 욕할까?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몰라주고, 비난하는 것은 “왜 그렇게 바보 같이 사느냐?”하는 것을 알지 못해서이지, “니들이 뭐 길래 우리에게 이러며, 그렇게 별나게 사느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 가치관, 그런 신앙으로는 참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이룰 수 없다. 교회라는 건축물과 제도로 묶인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가능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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