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가는 야곱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3. 7. 13:34 Writer : 김홍덕

야곱이 본토 아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야곱이 가고자 하는 땅은 하나님께서 그 조상 아브라함에게 <지시한> 땅이다.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는 지금 하나님의 의를 이어받는 장자가 아니라 장자의 명분(하나님의 의)을 가벼이 여기고,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은 에서가 머물고 있는 땅이다. 그리고 에서는 야곱을 죽일 것만 같이 느껴지는 상황이다.


이 상황을 다시 우리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씀으로 다시 해석해 본다면,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이 그 의를 사람들에게 전하여 야곱이 자손을 얻어 하나님 나라인 이스라엘의 조상이 죌 수 있는 상태가 된 것과 같이 교회를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을 얻게 되었을 때(교회를 이루고자 할 때), 에서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 하나님의 의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상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고 해도.


그런데 지금의 많은 사람들, 특히 자칭 목자라는 사람들은 교회를 세울 때 교인들을 자꾸 세상에서 분리시키려 한다. 교인들을 세상에서 분리시키려 하는 것은 외형적으로 시골에 전원교회를 만들어 떠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교회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자신이 교회생활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삶들을 가볍게 여기고 그것에서 떠나게 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반대하면 떠나라 하고, 직장생활이 교회생활에 방해가 되면 무조건 떠나라 하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물론 도저히 교회생활을 할 수 없는 직장도 있을 수 있고, 정말로 사람들이 볼 때도 이해하기 힘든 부모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특수성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방침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부모를 떠나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육신이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것의 유전을 떠나라는 것이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것이 잘 되지 않아서 사회적으로 지탄 받는 이단들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야곱이라는 사람이 가지는 성경적 의미의 중요성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그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조상이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의 국호인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렇게 야곱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시작이었다는 것은, 이 땅위에 있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인 교회의 시작이 야곱의 여정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적으로 야곱의 일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야곱의 행사는 교회를 만나려는 사람, 진정한 교회 생활을 하고자 하는 사람, 그리고 교회를 시작하고 개척하고자 하는 사람은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형이 자신을 죽일 것만 같이 기다리는 땅과 같은 세상에 대하여 바른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이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교회가 사람들을 구원하기는커녕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모욕에 가까운 언사를 들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야곱의 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야곱이 거저 많은 자녀와 거부가 되었다는 것만을 언급하면서 그렇게 세상에서 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영광이라고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과 도우심으로 거부(巨富)가 되었지만, 야곱에게 있어 그것이 자기 삶의 목적이었던 때가 없었다. 그가 외삼촌 라반에게서 독립하려고 할 때 했던 말이 “나는 어느 때에 내 집을 세우리이까?” 한 말에서 보듯 야곱은 부자가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의 집을 세우는 것,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을 가진 자로서 세우는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자기 집을 세우는 것, 그것이 목적이었다. 그것도 그 조상의 땅에서.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땅으로 가는 여정을 간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집을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을 위하여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그 나라의 통치 이념인 나라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 나라의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나라인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임을 당하시면서 까지 세운 하나님의 나라 그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교회인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세상에 세워지는 것이다. 그 세상에 비록 하나님의 의를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리는 사람들이 살면서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을 가진 사람 곧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곳이라고 해도 결국 교회는 그 사회와 세상 속에 세워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외면하고 신앙의 순도를 위하여 가급적 사회와 분리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곳은 하나님의 나라 곧 교회가 아니거나 결함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야곱의 여정은 모든 신앙인의 여정과도 같다. 자기가 가진 하나님의 의(장자의 명분)만 옹호하면서 자신을 지키는 것, 자기가 가진 의를 지키려고 자신을 죽이려는 형을 만나러 가지 않으려는 듯 세상 속에서 자기 신앙이 없어질까 봐 세상을 가급적 회피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는 세상이라는 도화지에 그려내고,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세상의 가치관이 점령한 하나님이 만든 세상으로 속한 삶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의 삶인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란 세상과 가급적 분리되고, 세상의 유혹이 없는 청정지역으로 자꾸 숨어 들어가고 배타적인 교회가 되는 것이 교회나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도 세상의 가치관이 자신을 죽인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이 땅에 오셨고, 야곱도 그 형 에서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돌아갔듯이 신앙이라는 것을 펼쳐내는 장(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내는 장(場)이 바로 세상이라는 것을 알고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긴 이김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야곱이 자기의 소유를 에서에게 주었지만 그것이 다신 자신의 것이 되는 것과 같이. 그렇게 되려면 먼저 세상의 가치관이 내 영혼을 삼킬 것 같아 보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장자의 명분)이 자신의 정체성이 된 생명만 있다면 언제라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람, 하나님의 나라를 펼쳐내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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